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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형설지공 없는 복지의 밤>의 줄거리:
성경에서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루는 해질 저녁무렵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낮보다 밤이 더 먼저인 셈이지요. 일몰은 하나님이 이 땅의 삶에 관한 관심을 중단하라고 전깃불의 스위치를 끄듯이 빛을 꺼주시는 것이었지요. 밤은 매일의 안식이었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만을 집중하여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인류의 불행은 형설지공의 정신으로 인해 이처럼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형설지공 없는 복지의 밤
(미가 2장 1절~13절)
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4.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6.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형설지공 없는 복지의 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형설지공 없는 복지의 밤’
전깃불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께서 왜 밤을 주셨을까요? 창조주 마음대로 잠을 안 자는 동물로도 만드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이 서서 자는 것처럼 사람도 서서 자거나 아예 안 잘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사람에게 밤을 주시고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일몰이란 전깃불을 끄듯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끄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밤이 되면 더 이상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하지 말라고 하심입니다. 대신에 마음은 땅을 떠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마음으로 보고 접촉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양이 환히 비치는 동안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끄심으로써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차단하시고 마음으로 하나님 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동이 있다면 바로 형설지공(螢雪之功)일 것입니다. 형설지공은 어려운 형편에서 글공부를 할 때에 겨울에는 눈에 반사되는 달빛으로 책을 보았고 여름에는 반딧불을 모아서 책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전기불이 없었던 시대의 선조들이 공부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음을 기리며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에 최선을 다해 도모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기준에서 보자면 형설지공의 정신은 인생을 어렵고 힘들게 하고 결국은 망하게 합니다. 태양이 사라져서 이 땅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도 굳이 세상을 밝히 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일몰을 허락하신 이유는 마음으로 하나님 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시간이 주어지면 하나님과 친해지게 되고 삶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끌어 가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형설지공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일몰은 무색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전깃불을 비롯한 각종 조명을 발달시키면서 낮에 관심하던 것들을 밤에도 관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은 상실되고 하나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폭은 좁아지다가 아예 없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평강과 보람과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형설지공의 정신으로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이 세상에 관심하면서 하나님의 개입 없이도 기쁨과 평강의 삶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설지공의 정신으로 낮에 하던 일을 밤에까지 한다면 성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마귀가 이 세상을 향해 전도하고 선포하고 설교하는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본래 선민의 삶이 어떠해야 했는지에 대한 구상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출애굽 한 선민들은 가나안 복지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복지에 들어와 사는 선민들은 형설지공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이방인들과 달라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의 삶이란 땅에 대한 관심을 더욱 더 심도 있게 하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이러한 이방인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시며 복지로 이끄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바람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선민 역시도 이방인과 똑같은 삶의 패턴을 영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를 한탄하며 멸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죄를 꾀하고 악을 꾸며서 하는 일들의 내용이 2절에 이어져 나타납니다.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의 산업과 토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신명기 19장 14절에서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는 말씀처럼 결코 임의로 강탈하여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형설지공의 정신과 관련해서 유념하여 살펴볼 부분은 1절의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는 부분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독특하게도 그동안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부분에서 선민의 죄의 뿌리를 찾고 있습니다.
어제는 ‘라기스’라는 도시가 언급되었습니다. 라기스는 애굽의 문명과 준마가 수입되는 곳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라기스에 준마를 이용한 병력이 배치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죄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그늘로부터 빠져나와서 이 세상의 일들에 관계해서 직접 접촉하는 동안 열 받아서 시동을 걸고 반응하며 살게 되는 것이 죄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죄가 이루어지는 곳으로써 침상이 언급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루의 시작이 해가 뜨는 아침이 아니고 해가 지는 밤입니다. 해가 지는 저녁 무렵에 하루가 시작되고 다음 날 해가 질 무렵까지가 하루였습니다. 태양아래에서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밤이 하루의 시작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안식의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밤에 집에 들어가서 침상에 누우면 그로부터 안식이 시작됩니다. 모든 세상일들에 대한 마음의 활동을 끊는 것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 마음에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관심을 끄고, 하나님께 관심을 돌려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생각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 숙면을 취하는 것이 선민이 가져야 할 밤의 의미였습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이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는 넘쳐나는 하늘의 에너지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선민의 삶이었습니다. 밭이나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할 때나 배우자나 자녀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을 통해 마음에 기쁨과 만족 얻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을 통해서 채워지고 넘쳐나게 된 하늘의 에너지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선민의 삶에 대해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서 낮보다 밤이 먼저였던 이유는 우선 하나님께 몰입해서 하나님을 갖고 난 다음에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운 후에 넘쳐나는 부분으로 세상과 관계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세상이 가진 본연의 모습을 마주할 수도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지금은 비단 밤이 아니더라도 그 의미를 항상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몰입하는 안식이 매순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이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선민들이 다 깨뜨리고 침상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일을 꿈꾸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설지공의 정신으로 밤에도 여전히 낮에 붙잡고 있었던 세상일을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선민들이 침상에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옆집 사람의 밭이 너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밭만 가질 수 있으면 기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하나님의 크기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대상을 담아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담은 마음은 여전히 비어있기에 그로인한 흡입력이 작용하는 동안에 실제로 그것을 탐하는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본문에서 미가 선지자가 문제시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선민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밤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만큼 세상에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 되면 선민들이 삶의 불빛을 전기스위치처럼 끄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마음의 불을 끄지 않고 이 세상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밤에 마음으로 붙잡고 꿈꿨던 일들을 낮에는 손에 쥐기를 원했습니다. 낮에 하는 모든 일들이 탐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밤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마음의 안식을 누렸다면 그로 인해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낮에 세상과 마주하면서도 갖고 싶은 것이 없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복지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에 하나님으로 채우지 못한 빈 마음으로 낮에 활동하는 동안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도둑질과 강도질의 탐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3~4절에서 분명하게 멸망이 예언됩니다. 또 5절과 10절을 보면 독특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 이것은 너희가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니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워진 곳은 바로 복지 가나안 땅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지란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리적 위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지는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과 섭리 안에 존재하는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지를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과 친해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선민들은 하나님을 놓치게 되었고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 속에 있는 복지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하나님께 몰입할 수 있도록 성전과 번제단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상번제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함께 세상에 대해 관심하던 마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번제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에게서 이러한 번제의 의미는 상실되었고 하나님의 생각과 섭리 속에 들어있는 복지 또한 상실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0절의 ‘일어나 떠나라’는 내용의 말씀은 신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먼저 만날 때에야 비로소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는 것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하는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을 먼저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만나는 배우자는 가짜 배우자입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고 손을 뻗어서 만져지는 배우자의 모습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속에 들어있는 배우자의 현상(sign)일 뿐입니다. 진짜 배우자와 만나고 싶다면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 안에 진짜 배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나는 배우자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나는 배우자의 오장육부를 몰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붙잡고 싸우고 승강이를 벌여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가짜 부모가 진짜 행세를 하려고 하니 될 리가 없습니다. 자녀의 진짜 아버지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내가 부모로써 진짜 자녀와 대면하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 진짜 자녀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 진짜 부장님과 사장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진정한 모습과 대면하고 싶고, 그들에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기운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밤으로 상징된 안식의 시간이 중요하게 언급 된 이유입니다. 안식은 곧 세상일에 대해서 관심을 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몰을 허락하신 것은 내 삶에 전기스위치를 내리셔서 세상을 못 보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써 밤을 만드신 이유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으셨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화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는 선민의 라이프스타일이 깨진 상태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라이프스타일을 복원하셔서 유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침이 시작되기 전에 밤을 맞이하듯이 안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을 세상일에 붙이는 동안에는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을 갖기 위해서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눈이 시뻘겋게 충혈 되어 탐심을 발동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밤이 상징하는 것은 안식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입니다. 태양이 없을 때에는 세상일을 할 수 없듯이, 마음도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가 바로 밤을 켜는 스위치입니다. 밤을 되찾음으로써 그동안 세상을 보느라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증거로서 마음에는 평강과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고 나면 직장에서 만나는 동료도 진짜가 됩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비로소 유익한 이웃사랑이 됩니다. 가족을 마주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에 밤을 만들면 진짜 가족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종종 언급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자녀가 미국의 뉴욕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부모는 여전히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 마음은 뉴욕에 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마음은 뉴욕에 가 있는 자녀를 접촉하기에 앞서 내게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하나님과 접촉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접촉하기 위해서 뉴욕에 있는 자녀에게 접촉하고 있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 안에서 진짜 자녀의 모습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뉴욕에 있는 자녀는 하나님 안에 있는 본래 모습의 현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오히려 진짜 자녀를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선민들이 가나안 복지를 받고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민들은 세상과 접촉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 안에 있는 복지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직장을 주셨다면 하나님 안에 그 직장 또한 존재합니다. 눈으로 보고 만져지는 직장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십자가에서 직장에 대해 죽어서 하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직장에서는 어떤 기쁨과 만족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직장에 나가면 요셉의 경우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았고,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손을 대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승진이나 월급을 바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가 될 때에 비로소 직장은 하나님이 주신 직장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29절에서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배우자에게서 기쁨을 원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가질 때에 비로소 본모습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아내를 만나고 진짜 남편을 만날 수 있기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도 맺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돈을 예로 들어봅니다. 수중에 500만 원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해야 하는 일은 먼저 이 500만 원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하므로 이 돈으로써 만족할 필요가 없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 뜻 안에서 500만 원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에 마치 오병이어와 같은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500만 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을 먼저 찾음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으면, 내가 죽은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이 될 수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늘 말씀을 통해 기가 막히는 깊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미가 선지자가 애타게 부르짖는 핵심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드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본래 구상하신 선민의 라이프스타일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내 마음에 밤을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이 밤을 통해 세상에 대해 마음이 꺼지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켜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먼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으로 충만해짐으로써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들의 진짜를 만나서 살아가는 기가 막히는 선민의 삶이 내 것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