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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실적 가치(現實的價値)의 결정과 가치기준(價値基準)
(1) 가치(價値)의 決定
가치는 주체인 인간과 대상인 만물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즉 수수작용에 의하여 결정 또는 평가되는 것으로서, 대상이 구비해야 할 조건, 즉 대상적 조건(對象的條件)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 중심한 상대적 요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한편, 주체(主體)에도 주체가 구비해야 할 조건 즉 주체적 조건(主體的條件)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과 대상에의 관심(關心)을 가지는 것이 가치결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리고 가치결정을 좌우하는 요소는 주관(主觀)적 요인(要因)으로서 주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 취미, 개성, 교양,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 등이 있다.
주체의 이 주관적 요인과 가치추구욕 및 관심 등은 모두 주체가 지녀야 하는 주체적 조건들이다. 현실적 가치는 이 주체적 조건과 대상적 조건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그림 4-2)
(2) 주관작용(主觀作用)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관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즉 주체의 사상, 세계관, 취미, 개성, 교양 등의 주체적 조건이 대상에 반영되어서(또는 대상적 조건에 첨가되어서) 그 주체만이 느끼는 특유한 현실적 가치(現實的價値)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주체적 조건과 대상적 조건이 성립할 때, 거기에 수수작용이 행해짐으로써 구체적인 가치가 결정된다. 구체적인 가치(價値)가 결정된다는 것은 가치의 실제의 양(量)과 질(質)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의 양(量)이란 꽃의 경우 매우 아름답다라든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와 같이 가치평가의 양적(量的)인 측면을 말한다. 또 가치에는 질적인 측면도 있다. 예컨대 예술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후술(後述)) 美에는 우아미(優雅美)라든가 외경미(畏敬美), 장엄미(莊嚴美), 익살미 등 여러 가지 차이성(差異性)의 美가 있는데, 그것은 질적인 측면의 차이를 보이는 美(가치)이다.
그런데 같은 달(月)도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게 보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또 같은 사람이 보아도 슬플 때 보면 달도 슬프게 보이고, 기분이 좋을 때 보면 달도 아름답게 보인다. 주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美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미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선(善)이나 眞의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은 상품가치에 관해서도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주관(主觀)이 대상에 반영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치의 차이가 생기는데 이러한 주체적 조건의 작용을 주관작용(主觀作用)이라고 한다. 즉 주체의 주관이 대상에 반영되는 작용이 주관작용(主觀作用)이다.
이것은 미학(美學)에 있어서 맆스(T. Lips)의 감정(感情)의 이입(移入)(empathy, Einfuhling)에 해당한다 하겠다. 감정의 이입(移入)이란, 자연풍경을 볼 때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기의 감정이나 구상을 대상에 투사(投射)해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주관작용의 예를 한 두 가지 더 들어보자. 먼저 문선생님의 말씀中에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이 당신에게 손수건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손수건은 돈보다도 귀하고, 생명(生命)보다도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은 어떤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살고 있더라도 거기는 궁전(宮殿)이나 마찬가지로 느낄 것이다. 그때는 의복(衣服)이 문제가 아니며, 거처하는 집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왕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自覺)을 가지면 오막살이 집도, 그대로가 궁전(宮殿)같이 휼륭하게 보인다는 뜻으로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적절한 예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누가 17:21)는 성구(聖句, 성경구절)가 있는데 이 역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예이다. 또 불교에는 삼계유심소현(三界唯心所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三界, 즉 세계 전체의 모든 현상은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뜻이다. 모두가 주관작용의 예인 것이다.
(3) 가치(價値)의 기준
1) 상대적(相對的) 기준
상술한 바와 같이 주관작용으로 인하여 가치결정(評價)의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적 조건에 공통성이 많을 때에는 가치평가에도 일치점(一致點)이 많아진다.
따라서 같은 종교나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가치평가의 결과는 거의 일치한다. 예컨대 유교의 덕목인 부모(父母)님께의 효도(孝道)는, 유교사회에서는 언제나 일치(一致)되게 평가되는 보편적인 선(善)이다.
이것은 종교나 사상을 같이 하는 사회에서는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함을 뜻한다. 로마의 평화(平和, Pax-Romana)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이 일반화(一般化)되어 있었기 때문에, 극기적 정신(克己的精神)과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통일된 가치관이었다.
또 중국의 당나라시대나 한반도의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덕목이 중심적인 가치관이었다. 또 기독교국가인 미합중국(美合衆國, USA)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기독교(新敎)의 도덕관이 미국민의 통일된 가치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회 사이에서는 가치관의 차이가 나타난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쇠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과 자유주의세계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즉 공통된 종교나 공통된 사상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地域)이나 사회에서의 가치관은 국민간에 대개 일치(一致)하지만 종교나 사상이 서로 다를 때에는, 가치관의 일치(一致)는 일정(一定)한 범위 내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이 공통되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일정한 범위에 국한될 때, 이러한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을 상대적 기준이라고 한다.
2) 절대적(絶對的) 기준
가치의 상대적 기준으로 전인류의 가치관을 통일할 수는 없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대립이나 투쟁을 무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인류(全人類)의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차이, 문화적인 차이, 사상적인 차이, 민족적인 차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평가기준(評價基準), 즉 전인류에 공통되는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절대적(絶對的) 기준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절대적 기준은 어떻게 해서 세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종교, 모든 문화, 모든 사상, 모든 민족 등을 있게 한 근원자가 하나임을 밝히고 그 근원자로부터 유래된 여러 공통성들을 발견하면 된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 만물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지만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또 모든 만물은 공통적인 속성(屬性)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여러 종교, 문화, 사상, 민족은 각각 그 가치관이 다른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들을 발생시킨 근원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근원자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성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가 출현하였지만 각각의 교조(敎祖)들이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최종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대와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교조를 세워서 우선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을 선(善)의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언어, 습관,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대 그 지역에 적합한 종교를 세워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전개해 오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각 종교의 공통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세운 근원자(根源者)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만물의 근원자를 유대교에서는 야훼,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유교에서는 천(天)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모두 동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 각 종교가 근원자의 속성(屬性)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교에서는 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에서의 진여(眞如)나 힌두교의 브라만도 그러하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야웨, 이슬람교의 알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가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으며, 비참한 인류를 왜 하루 속히 또 일시에 구할 수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와 같이 각 종교의 근원자는 베일에 감추어져 있어서 막연하게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각 종교의 근원자에 관한 설명들은 그 근원자의 일면(一面)만을 파악한데 불과했기 때문에 각 종교를 세운 근원자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하였다.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根源者)가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근원자가 어떠한 분인가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속성(屬性), 창조목적(創造目的), 우주창조(宇宙創造)의 법칙(로고스) 등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각 종교는 동일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兄弟의 종교(宗敎)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겪어온 대립(對立)과 투쟁(鬪爭)의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문화, 사상, 민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화, 사상, 민족을 발생시킨 근원자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그 문화의 공통성, 사상의 공통성, 민족의 공통성 등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가치평가(價値評價)의 절대적기준이 될 수 있는 공통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絶對사랑)과 하나님의 참진리(절대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의 아가페,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 이슬람교의 자애(慈愛)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모든 종교의 사랑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가정을 통하여 부모(父母)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자녀(子女)의 사랑이라는 삼대상(三對象)의 사랑으로서 나타난다(여기의 자녀의 사랑은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자녀 상호간(형제자매간(兄弟姉妹間)의 사랑을 말한다.)
기독교의 이웃 사랑의 실천, 불교의 자비(慈悲)의 실천, 유교의 인(仁)의 실천, 이슬람교의 자애(慈愛)의 실천 등은 그 내용이 전부 이 삼대상(三對象)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의 운행을 지배하는 진리(眞理) 즉 이법(理法)는 영원불변(永遠不變)한 것이다.
우주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사실(事實)은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자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선악(善惡)의 기준은 타인(他人, 인류)을 위해서 사는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3) 절대적(絶對的) 기준(基準)과 인간의 개성
이렇게 해서 가치결정의 절대기준이 세워진다. 즉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진리에 의해서 세계 만민의 가치판단(價値判斷; 決定)이 一致되게 된다. 그러면 그때 인간의 개성(個性)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고 해서 인간의 개성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판단은 개인의 주관적(主觀的)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에 따라서 가치평가에 반드시 차이(差異)가 생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기준하에서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면 개인(個人)의 개성(個性)은 무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에서 가치판단이 일치화(一致化)한다 할지라도 개성은 무시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공통성)과 개별상(특수성)을 닮고 있으며, 또 연체(聯體)이기 때문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가치평가의 절대적 기준은 보편상(성상, 생심, 심정, 로고스)과 전체목적에 근거한 평가기준이요, 주관작용은 개별상 및 개체목적에 기인한다.
따라서 아무리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절대적가치가 결정된다 할지라도 주관작용에 의한 개인차는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절대가치란 개인차를 포함한 보편가치이다.
그것은 마치 개성진리체가 개별상을 포함한 보편상을 지닌 개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전체목적을 우선시키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고, 보편상을 지니면서 개성(개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인간이다.
절대적 기준에 있어서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인간의 개성에 따른 주관작용(主觀作用)을 피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차이성(差異性)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차이성(差異性)에 의한 가치관의 혼란(混亂)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때의 차이(差異)는 질적(質的)차이가 아니라 양적(量的)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善)의 판단의 경우 가난한 사람(貧者)을 돕는다는 것은 종교나 사상여하(思想如何)를 막론하고 선(善)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악(惡)으로 판단(질적판단)하는 사람은 이상세계(理想世界)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선(善)이 크게 선(善)하다 중간쯤 선(善)하다 보통으로 선(善)하다 등과 같이 양적(量的)인 평가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미(美)나 참(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란 요컨대 질적판단(質的判斷)의 일치(一致)를 말하는 것이다(그런데 타락사회는 이기주의(利己主義) 사회(社會)이기 때문에 질적 차이마저 생기게 되어서 그 결과 가치관에 혼란이 일어나기 일쑤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및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즉 가치관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가치평가의 기준을 절대진리(絶對眞理), 절대애(絶對愛)를 중심하고 일치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한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이다. 이러한 절대가치로 모든 가치관을 조화(和合), 조화(調和)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통일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통일에는 하나님의 속성, 창조목적, 심정, 사랑, 로고스 등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宗敎)통일, 사상(思想)통일도 가치관의 통일로써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