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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시간 사이 - 용담호에서
한 해가 저무는 늦가을의 들녘은 왠지 쓸쓸하다. 지역민들이 다 빠져나가고, 한낮 고양이나 개들만이 이따금 서성거리는 도시 재개발 동네처럼... 서울을 떠나 남도땅을 향해 내달리는 차창 밖으로 한 계절에서 한 계절을 향하여 가는 시간을 보았다. 10월도 지나 11월 하순인데, 이 곳에 오색 단풍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구봉산과 천황사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1000여 년의 전나무가 있는 - 운장산이 가까운 첩첩산중인 이 곳엔 아직도 가을이 좀체 떠나기 싫다는 듯 둥지를 틀고 머물러 있었다. 용담호수 주변에 최근 조성한 「주천생태공원」의 눈부신 만추 풍경은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매료시켰다. 지난 2001년 완공한 용담호 수면 위 반영은 한 폭의 멋진 수채화였다. 가끔 카페 모임 「송디카 세상」에서 출사를 나가곤 한다. 2주 전에도 국내에서 애기단풍으로 유명한 백양사와 문수사를 찾아 햇살에 빛나는 가을풍경을 담았다. 단풍 절정기였던 그 때는 전국의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을 지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을산과 공원을 찾았다. 이제 절정기도 지나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왔는데, 뜻밖의 멋진 풍경에 흡사 다른 나라에 여행 온 느낌이었다. 산업화 도시화로 전국의 왠만한 자연은 원형이 훼손되고 망가져 갔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아름다운 곳이 존재한다니! 이백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도교의 무릉도원, 불가의 출세간, 기독교의 유토피아가 연상되는...어휘는 다르지만 다 같은 곳을 지칭하는 의미가 아닌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이곳저곳을 옮기며 사진찍기에 몰입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오후 2시경쯤 왔는데, 어느 사이 서쪽으로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린다. 사위가 조용한데 어디선가 컹컹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노령정맥의 첩첩산중인 용담호수 주변의 분위기는 마치 고향에 온 듯 안온하고 정겹다. 차로 50여 분 거리에 있는 완주군 소양으로 이동해, 유명한 맛집인 「화심두부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1957년 개업한 화심순두부의 원조격으로 60년 전통의 맛을 자랑한다. 100% 국내산 콩으로 만들어 담백하고 고소하다. 인근에 고찰 송광사 위봉사 대아수목원이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분 거리에 전주가 있다. 근처 찜질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이튿날 오전 5시에 일어나 다시 찾은 「주천생태공원」. 그 곳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뭍별들이 현란한 자태로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좋아하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신비롭고 환상적인 정경이다. 도시 속에만 살다가 실로 오랜만에 보는 천체 풍경이다. 낮의 주인공 인간이 고이 잠든 한밤의 주인공은 은하의 무리였다. 신은 시계바퀴 같은 일상을 떠난 자에게만 무상의 선물을 말없이 내려 준다.
용담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까지 삶을 일구며 대대로 살아왔던 이들에겐 정든 고향땅이었을 이 곳. 언젠가 수몰 전 이 곳 여러 마을들과 주민들을 오롯이 담은 사진전을 본 기억이 교차한다. 이제 낯선 타지에서 살아가는 실향민들에겐 아픔과 그리움의 양가적 정서가 어려있는 곳. 용담호를 빙 돌아가는 순환도로를 따라 가노라면, 「망향의광장전망대」「용담호사진문화관」「태고정」이 나온다. 」「용담호사진문화관」에 들르면 실향민들의 과거 삶의 생생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둠이 가시고 동녘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0분이다. 장엄한 서사시처럼 호수 수면 위로 물안개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설치한 삼각대 위의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본 자연의 구도는 완벽에 가깝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상쾌하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 삼각대를 설치하며 저마다 사진찍기에 열중한다. 추위도 잊은 채 와룡교에서 조용히 허공 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정경을 오래 응시한다. 마치 요술을 부린 듯 ,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생동하는 물 위의 움직임. 좋아하는 클래식 선율처럼 조금씩 파도치듯 일렁이며 변화한다. 참 멋진 풍경이다. 일상에 쫒기듯 분주한 우리네 삶에서 언제 또 이런 순수한 자연 속에 내가 들어가 하나될 수 있겠는가! 물심일여의 경지가 이런 것인가. 저기 피어오르는 용담호의 물안개와 문득 첫 해외여행 가서 보았던 물안개가 오버랩된다. 옛 고구려땅 집안(지안)의 압록강변에서다. 주몽이 세운 고구려 첫 도읍지 환인의 졸본성(오녀성)에 이은 두 번째 도읍지가 집안의 국내성이다. 이 곳에는 환도산성, 국내성,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 호태왕릉, 고구려 고분, 집안박물관 등 수많은 고구려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저곳을 둘러 본 후 저녁 때 시내 호텔에 투숙했다. 유서 깊은 집안을 휘감돌아 흐르는 압록강 건너편이 북한 만포시이다. 지척의 만포시가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이튿날 새벽, 숙소에서 나와 주변을 산책하다가 압록강변에서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무수한 물안개를 보았다. 그땐 한여름이었다. 주변 자연과 잘 어우러진 그 이색적이고 환상적인 풍광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내 마음에 오롯이 남아 있다.
유한적 존재인 인간이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의 외연 속에서만 사유하고 판단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인식해 본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내일도 어디론가 카메라를 들고 훌쩍 떠날 여정을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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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과 사진 다 좋아요
사진 출사의 여정을 상상해 볼 수 있네요.
출사와 함께 행복한 시간과 추억을 담고 오셨네요.
사진도 멋지고 글도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