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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 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샬롬!
제 14 장 남편(하나님)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3:15-19,2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모두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길로 나간 가인의
길에서 사단의 지배를 받고 사단이 이끄는 대로 영혼의 소망을 마비시켜 가며 육신의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복음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참생명을 얻고
영생의 나라를 소유하는 너무나도 귀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을 복이라 여기지 못하는
감각 없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영생의 복을 얻으려면
예수님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 생명 안에서 날마다 사단적인 나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인격
으로 변화를 받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16절에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까지는
지난번에 깨달아 보았고요, 그다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말씀에
대해서입니다.'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하신 것은 영적 죄를 유전하는 고통이 있게 된 것임을 말한다는 것과 죄를 담당해주실
여인의 후손, 메시아가 오시도록 할 때의 사단의 참소와 훼방과 핍박과 고난과 고통을 겪어야 하는
그 수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때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이 겪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예표하고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한 '너'는 여자를 말하는데 그 여자도
똑같이 이스라엘 신앙을 비유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은 여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내를 돌봐주고 보호해주는 남편처럼 이스라엘의 사명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하신 그 사명을 완수하도록 끝까지 돌보고 책임지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말씀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남편과 같은 관계로 계시면서 다스리고 돌보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이 말씀을 인간의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말씀한 것처럼 해석을 내려놓았음으로 하나님의 의도가 가려져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하말티아'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말씀에 대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에게서 나는 것들로 덮어씌워 전함
으로써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아, 여자가 선악과 따 먹고 남편에게도
먹게 하여 아담을 죄 짓게 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벌로 여자에게 애 낳는 고통을 크게 더하셨고,
남자에게 구속받게 하셨고, 남편의 말은 곧 법이 돼서 옳든 그르든 아내는 거기에 무조건 복종
하고 따라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필요 때문에 있는 부속품 정도로 여겨도 되는 종과 같은 위치가
되라고 하셨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영님이 오셔서 밝히 보이시고 가르치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식의 해석들을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남자들 속 깊은 곳에 여자를
경시하며 '감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 나와서도 성경을 보니
하나님께서도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니 맞는 말씀을 하셨다는 생각을
쉽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남편을 죄짓게 한 여자를 하나님도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니 당연히 맞는
다고 여기는 겁니다. 자기들의 본성 안에 뿌리내린 그 같은 오만한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의 의도하신 말씀 안에 두신 뜻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자를 다스려라'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 그것이 남성들의 성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기도 해서 지당한
말씀을 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들의 숨겨진 이기심의 발로요, 하나님의 뜻을 변질
시키는 인본의 사단적인 것이요, 죄악의 극치의 일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말하는 것도 성경을 해석
하고 가르치는 것도 다 남자들의 특권처럼 여겼고 그것을 남자들의 전유물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남자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남존여비 사상, 남성 우월적인 사상은 충분히
하나님 앞에 사단적인 오만이요,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르시는 권위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대단한 자존심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께는 죄인이요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면 제가 하는 이 말이 여자가 너무 불리하고 억울한 것 같으니까 여자가 성경을 해석해야 하고
여자가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겠습니까? 남자 여자 편 가르고 여자의 권리를 찾자고 여성들에게
이것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그런 쪽에는 전혀 관심 없습니다. 그것은 저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해석은 남자니까 할 수 있고 여자라서 할 수 없고가 아닙니다. 또한, 남자니까
말씀 말할 수 있고 여자니까 말씀 말할 수 없고가 아닙니다. 말씀에 관해서는 이런 성의 구분이나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의 뜻을 바르게 아는 것은 남자든 여자든 오직 성영님에
의해서입니다. 성영님은 하늘의 진리의 법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남자냐 여자냐를 구분하여 찾아
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 안에 임하시는 것이요 성영님이 눈이 돼 주셔야 성경의
뜻을 보고 아는 것이요, 성영님이 말하게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이 말씀은 분명히 여자에게 이르신 것이지
아담에게 이르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 여자에게 이르신 것이 맞습니까? 아담에게가 아니라 여자
에게 이르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자(아담)에게 남편이라 했다면 여자에겐 아내라 해야
합니다. 부부이면 '남편과 아내'지 '남편과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라 했을 때는 남편의 아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호칭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기 이 말씀은 아담에게 '너는 남편이 되었으니 네가 네 아내 좀 다스려라' 그리고
'여자 너에게 이르는데 남편에게 다스림을 받는 위치가 되라'하는 따위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
라는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권위나 권리를 부여하신 뜻이 전혀 아니에요. 만일에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라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아담에게 이르시되'로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이 주신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는 주권적인 것이 아니라
남자나 여자나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서 그 뜻에 함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돕는
협력자로 배필이 돼서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입니다. 그 같은 사단적인 것들로
하나님이 명하신 것처럼 하여 육신의 것에 적용하는 것이 권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세상 사람들이야 어차피 죄 가운데 있으니 할 수 없지만, 우리도 그 가운데서
똑같이 살아왔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 들어왔으니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깨닫고 회복해야 합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살면서 사단이 가져다준 육체의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았던 것, 죄악의 포로가
되어 살았던 그 세상 습관, 자기 성향, 취향 등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신영한 권리를 가져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창2:18에 우리가 말씀을 듣고 배운대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가 아니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신 말씀 그대로 '돕는 배필의 관계'입니다. 서로 모습은 다르지만 동등한 인격을 가진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누가 누구를 다스리고 누구를 지배하는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사로 돕는
배필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서로 돕는 관계이지 남편이
권위를 가지고 아내를 다스리라는 그런 위치의 관계가 되라는 것 절대 아닙니다. 다스린다는 것을
예를 들면 통치권자가 또는 권위를 가진 자가 책임지고 다스릴 때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징계도
하고, 매(채찍)를 들 수도 있습니다. 벌을 내릴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아내가 잘못
한다고 징계하고 매질할 수 있습니까? 폭력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까? 벌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 남자는 전혀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까? 남자가 여자를 때릴 권한이 있습니까? 어린아이라도
이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남편처럼 돌보
시며 다스릴 것이라 하신 이 계시의 말씀을 남자, 즉 남편의 권위를 말씀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스릴 수는 있습니다. 인간이 피조물계를 다스릴 수는
있습니다.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거예요. 또한, 또한 부모가 자녀를 다스릴 수 있고 선생이
학생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피차 동등한 인격적 관계인 것입니다. 여자를 아담에게서 나오게 하신
것이 바로 서로 동등한 인격적 관계임을 뜻합니다. 동등함을 의미합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남편과 아내의 위치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15,16절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 배운 대로 여자는 하나님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이 친히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시고 키우신 이스라엘을 예표하여 비유를 드신 것이요.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여자의 남편처럼 책임지고 돌보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자, 즉 이스
라엘이 사모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뜻입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다스리신다는 계시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 여자와 남편의 관계처럼 말씀하셨
습니다. 호세아서에도 보면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
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하셨고, 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컬을 것이라(호2:16) 하셨고, 그들의 신앙이 타락한 것을 '음녀'라고도
표현 하셨습니다. 또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다(호5:7)고 말씀하
심으로써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여자와 남편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하신 말씀이 15절에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과
그대로 이어져서 그 후손을 생산할 여자, 즉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만을 남편처럼 여겨 사모하여야
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으라 하시면 있었던 것처럼 15,16절에 언약하신 말씀 또한 그대로 이루어져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우리가 너무나 확실하게 보고 아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의
역사가 된 이스라엘을 보면 예수님이 계실 당시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 또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등이 출현했던 몇백 년 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여자를 경시
하는 풍조가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막12:24) 지적하셨던 것처럼 이들이 참으로 성경의 모든 뜻을 인간 생각에다
맞추고 오해했었던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다른 방향으로 나갔으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알아
보지를 못했고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창세기의 말씀도 똑같이
하나님의 표적에 맞히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15,16절 말씀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생명의 언약을 넣으신 복되신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가 될 교회와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지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그런 남성과 여성의 불합리한 권위나
위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똑같이 '아, 여자가 선악과 따먹고 자기
남편도 먹게 하여 하나님께 죄 범하도록 끌어들여 남자를 망쳐 놓았구나, 남자를 망쳐 놓은 것이
여자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여자를 오직 남편만 바라보고 남편의 말만 듣고 복종하고 절대로 다른
남자 얼굴 쳐다보는 것도,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남편만 보고 남편의 지배를
받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라고 하셨구나, 아주 지당하고 맞다, 여자가 아주 문제다 문제!'하는
식으로 받아들여 여자의 지배자처럼 군림하며 무시하고 물건 취급하듯 하는 엄청난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얼굴 내놓고 외간 남자 마주치는 것도 죄악시했습니다. 심지어 아내를
노예 취급하는 것도 예사였고 여자는 혈통 잇게 하는 자식 낳는 도구 성적인 도구로 취급당하고
말하자면 여자라는 것 때문에 인권이 무시당한 것입니다.
지금도 창조주의 신(알라)을 믿는 이슬람 종교는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법전입니다. 그들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하라는 것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나가다가 다른 차가 자기 차를
부딪쳐 뭐라도 깼으면 자기도 가서 그대로 깹니다. 그런데 그들의 종교가 여자의 인권을 얼마나
짓밟고 있는지 여자가 밖을 나갈 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매야 합니다. 눈만 내놓고 다닙니다. 그
들도 하나님의 법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이용하고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그 나라의 어떤 여자가 바지 입은 것이 종교를 모독하는 이유가 되어
종교법에 회부가 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세계 언론에 그 사건을 알려서 여자도 인권의 자유가
있으며 여자의 자유를 찾고 싶다는 인터뷰가 방송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같이 여자의 인권이
얼마나 속박되었는지를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보고 있는 겁니다. 같은 종교는
아니지만 같은 오경을 가진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인간 사상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 버린 것이 되어 흘러왔다는 것은 이슬람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경에 여자들을 인구수에 넣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여자를
가치 없게 여겼기에 남자의 대열에 넣지 않았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렇게 해석 안 하는줄 아십니까? 똑같습니다. 유대인들의 해석이나 지금 사람들의
해석이나 같은 맥으로 흘러 왔습니다. 그런데 여자를 인구수에 넣지 않은 하나님의 의도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 지로다(창2:24) 하셨으니 말씀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왜냐?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여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연합의 뜻 예수님 안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는 이 관계로 하나가 되는 영적인 뜻에 두신 것이기에 여자를 인구수에 넣지 않았
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복음의 뜻을 사람들이 도무지 깨달을 능력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한 그대로 혼인한 여자는 그 남자에게 속하여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하기에 인구수에
결혼 적령기가 된 20세 이상 된 남자만 올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속하여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 인간이 예수께 속하여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어야 함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떡 만들어 먹이던 그 두 표적 사건 있잖습니까?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
었더라(마15:38)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21)했던, 그 칠병
이어와 오병이어 사건이 말씀 그대로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보이신 표적으로 실제로 예수님과 연결된 사건입니다. 신부를 맞으러 이 땅에 오신 남자
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 속하여 생명을 얻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신 이적과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를 통해 가르치신 말씀과 사건들은 나무로 본다면 뿌리와 같은 때이고 이스라엘 역사는
나무줄기와 같은 때이고 예수님이 오신 이때는 열매와 같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신부를
맞으려고 남자(초림)로 오셔서 신부의 자격(번제단과 물두멍을 거친 자)으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아버지 집으로 들이시려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성영님이 오셔서
에수님과 뜻이 하나가 된 신부로 온전케 된 자들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시게 되어 예수님과 신부로
한 몸이 되었음으로써, 이제 신약 시대는 남자만 인구수에 오르는 것은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의 말씀하신 뜻을 이스라엘 혼인
속에 넣어 여자가 남자의 아내로 연합하여 하나로 보신 것(여자를 인구수에 넣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 오신 이후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구수에 남자만 오른 것도 다 끝났습니다. 이제
신약시대는 결혼에 두신 의미는 끝났다는 말입니다.
오실 그분, 바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그 의미를 부여하신 사건은 더는 필요가 없고 이제 신약
시대는 개개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성영님이 내주하시면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
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혼인에 두셨던 '하나'의 의미는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이제 두 종류만 보십니다. 신약시대는, 성영님으로 오신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었느냐 아니면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아담, 육체의 사람이냐 그 둘만
보십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없으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요, 그에게 예수님이 계시면 영원한
영생으로 가는 것 그 두 종류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이런 영적인 역사를 성영님의 눈이 되어 보지 못하면 그같이 자기 것으로
방향을 바꿔버릴 수밖에는 없고 하나님과 상관없게 돼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 하나님도 선악과 따 먹고 남자도 먹게 해서 죄짓게 한
그 여자를 가치 없게 여기시는구나'하는 자기 방향의 생각밖에는 드는 것이 없으니 그러니 하나님도
무시하는 여자라는 것이 무기가 되어서 아내가 자기 눈에 안 차고 비위에 거슬리면 스스로 가진
자만심으로 군림했을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아보지 못한 마귀의 아들들인 유대 사회 남자들이 이 같은 성향으로 흘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행실이 안 좋거나, 또는 남편 위신에 체면 깎는 행동이 있다거나 어찌 되었든
마음에 안 들면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그것을 정당화시켜 이혼 증서하나 써 주고 내쫓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음행한 연고도 없이 이혼
증서 하나 써 주고 내쫓은 것은 저로 간음하게 하는 연고가 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남자 자신은 간음이나 음행의 문제없는 도덕적인 사람이냐? 예를 들면 여자가 간음하면
죽을 죄라고 돌로 치거나 내 쫓았는데 남자 자신은 간음하고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아, 난
남자니까, 남자는 그럴 수 있다, 남자는 용납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도 가치 없게 여기시는 여자는
남자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위치'라는 자기 자만심에 의해 남자인 자기는 죄로 여기지를 않은 것
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교만한 속성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의 특권처럼 여겼습니다. 나는 당연하고
너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죽어야 할 범죄자라 여긴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자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잖습니까? 간음했으면 여자 혼자 했습니까? 여자가 있으면 남자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자만 붙잡아 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유대 사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 사는 인류 역사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남자 분들도 대체로 '나는 남자니까 그럴 수 있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과 성향에
있지 않았습니까? 또 지금도 '남자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그 피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나는 당연하고 너는 맞아죽어야 한다고 하는 오만이 있었잖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 있으면 어디 한번 자신 있게 손들어
보시겠어요? 만일에 남자의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이런 우월적인 교만을 품고 있는 것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오만이요, 더러움이요, 사단과 같으므로 하늘이 무너져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바친다 해도 거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주인처럼 군림했던 이 유대 남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던 중에 있었으면서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는데 아주 깜깜한 소경이 되어서 보지 못하는 겁니다. 도무지 보지 못
했습니다. 눈이 너무 캄캄해져서 눈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다스려야 한다는 오만을 가지고 여자를 다스리는 정도를 넘어서서 군림하는 자세가 된
교만과 이기심으로 눈멀어버려서 여자가 낳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천대하고 멸시하던
그 여자에게서 나신 그 거룩하신 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똑같이 예수님을 천대하고 멸시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오늘 15절에서 누구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뱀에게 말하고 있지만 사단의 후손이라고 뱀과 동격인 사단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여자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그들이 바로 남자라고 자부했던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성전 제사를 맡은 제사장들로 그들이
바로 네피림의 후손, 사단의 후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과 관계없이 자기 영과 혼과 육과 삶을 통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그 예수님을 나타내는 자가 영적으로 남자인 것입니다. 이 영적인, 영의 세계는 남성, 여성 하는
그런 인간의 성에 대한 것을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데나 남자라고 하지 말란 얘기
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는 예수님의 사람이, 즉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남자요, 그러나
참생명을 주시는 진짜 남자는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남자가 되지도 않았으면서
남자처럼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것이 그런 남자 타령이나 하는 자기들의 특권인 양 나서서 생명을
주지도 못하는 껍데기들을 먹여준다고 하는 짓들을 두려움으로 그치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성영
께서 주시는 경고요, 예언입니다. 여자(신앙)만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린 여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자요,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여자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오신 보혜사
진리의 성영님으로 거듭나 생명의 충만을 가진 이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사명의 측면으로는
종이요, 연합의 측면으로는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누구냐? 신부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제자들처럼 세상을 뒤로하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죄의 특권을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사단으로부터예요. 그래서 권리를
찾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죄에서 돌이킴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일
지라도 그것을 성영님이 들추어 내주시면 애통하여 회개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이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다 씻어주셨는데 그걸 믿으면 되지 그걸 믿으면 죄에서
용서받는다고 했는데 무슨 회개? 무슨 고백이 필요하냐?'하는 그런 자기 지식에서 나는 생각들을
내세우는 교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가 그런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더럽고 흉측한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죄인이었
습니다. 정말 제가 그런 죄인이었군요, 나같은 죄인을 위해 피 흘리셔서 그 피로 내 죄를 씻어
주셨으니 이 은혜가 내겐 너무 커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인인 제가 용서받아 자유하게
되었으니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요'하는 고백이 자기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올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해야 하는 권리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는 겸손이요, 겸손한 자라는 증거입니다. 자기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겸손입니다.
그런 겸손을 가진 자에게 죄를 짓도록 힘을 준 악한 영들이 붙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영혼에 충만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기쁨의 생수가 그 속에서 흘러나오니 성영님께 더욱
의지하여 죄를 보고 회개하기를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아가는 예수님과 연합된 신부의 자격인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유대인 남자들, 즉 사단에 속한 가짜 남자들에게 여자(신앙)가
그 같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을 허락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사단의 유혹하는 말을 여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자)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단에게 여자가 참소와 핍박과 훼방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의미한다고 말씀했던 대로 이스라엘의 신앙이 사단에게
그 같이 참소를 받고 핍박을 받고 훼방을 받는 그 수고의 짐을 짐으로써 즉 영과 혼과 육체의 안식
없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바로 안식하기를 원하고 그 굴레에서 구원 얻기를 소망하며 메시아를
기다려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때는 여자에게 그 고난이 더욱 기세등등하여 가중되습니다. 신앙 때문에
받는 고난이 정점에 달하여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오셔서 여자의 그
고통의 바통(배튼,baton)을 받아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바로 연단된 신앙을 통해 나셨다는 말입니다. 풀무 불같은 연단을 통해 정금으로 나신 것
입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나심을 통해 그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여자, 그 신앙의 바통을 받아
예수님이 그 고통과 고난을 지고 걸으셨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시고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단이 후손이
될 만한 사람이 날 때마다 죽이기를 힘썼고, 후손을 낳을 여자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통과 멸시를
받게 함으로써 신앙이 무너지게 하려했고, 그 후손이 올 수 없게 하려고 온갖 간계를 부려 여자를
무시하고 경멸한 것입니다. 사단의 후손인 유대인의 가짜 남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구약의 영적 역사를 이제 눈을 열고 분명하게 보는 눈이 되어서
자기 믿음의 사건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영의 사람으로 단단히 세워져 장성한 믿음의
능력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단은, 어찌 되었든 남자가 여자의 지배자처럼 군림하게
했고 주인 노릇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남성의 죄성과 딱 맞는 것이어서 거기에 동의하고 동화되어
인류 속에 그대로 흘러왔습니다. 인간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말씀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이것을 사단이 인간 남성 속에 뿌려 넣었습니다. 또한, 사단은 남자나
여자나 성적인 노예가 되게 하여 남자로 하여금 육체의 정욕인 죄의 성욕으로 여러 여자를 거느리게
하거나 부정한 행위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죄의 씨를 퍼뜨리게 하여 사단이 세운 세상 나라에 기여
하게 했는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더러운 성욕 더러운 정욕들로 사단을 도와
사단의 세상을 확장하는 데 열심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함의 권리로 깨끗이 돌아와야 합니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절대적으로 몸을 단정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이기적이고 더러운 성욕의 노예가 된 것은 음란의 창조자이자 간음의 창조자인 사단에게 자기 몸을
내주었기 때문이요, 그들은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가서도 더한 고통, 더럽고 추한 고통이 가중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으로 구원 얻은 사람은
거룩한 신분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예수님이 신랑이시니 신부는 신랑이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사모해야 하는 것이요, 그 신랑이신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하는 것이요, 말씀으로
기꺼이 지배받아야 합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가 바로 이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으로 지배받아야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권리이기 때문에 이 권리가 확실하게 세워져야 합니다.
그다음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는데 아담이 먹었으므로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말씀입니다(이 저주에
대한 것은 <뱀에게 흙을 먹으라,잉태의 고통을 크게>에서 언급했음). 그리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살게 된다는 인간의 절대적 위치를 선고받은 것이 되었고, 아담이 먹은 것은 '먹지 말라'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아내의 말을 듣고 먹었음으로써 땅이 그로 인해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종신토록 수고해야 소산을 먹을 수 있다(이것은 영적인 것을 얻기 위해 수고
해야 함을 의미함), 이제 사람이 육체를 위해서는 사는 동안에 힘쓰고 애써야,즉 땀 흘려야 소산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땅에서의 삶은 고달픈 나그네와 같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은 땅이
저주받았음을 반드시 알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저주를 받은 땅의 것들을 위해 산다면 그도
또한 저주받은 자임을 알라는 거예요. 인간은 이제 그 에덴의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담에게 분명히 보이신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 들어가는 길을 가도록
하신 하나님의 교훈이요, 교육이요, 방법입니다.
오늘 18,19절이 그 수고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땅에서 육체가 사는 데는 많은 수고를 해야만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땅이 저주 받았으므로
순주롭게 내주는 것을 거역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음에도 아내의
말을 듣고 먹었으므로 이제 아담은 아내를 위하여 수고로이 땀을 흘려야만 하게 되었는데, 땅이
아담으로 인해 저주를 받았으므로 땅도 그 아담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역하듯이 엉겅퀴와
가시를 내주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예수님과 연결된 영적인 뜻이 있는데 말씀드리
기는 복잡하고 그동안 들은 말씀으로도 여러분이 깨닫고 믿음이 되는 것에는 부족하지 않다 생각
되어 생략합니다. 땅도 순종하지 않는다. 순조롭게 땅에서 소산을 내주지 않고 땀 흘리고 수고해야
거둘 수 있는 그런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 보내신 것은 버리려고 그러신 것 아닙니다. 오늘 23절
에서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셨다고 말씀하듯이 이제 근본 된 토지를 가는 그 육체의 고달픈 삶을
통해 마음의 쉼이 없고, 죽음(두려워하는 것)이 들어와 두려움을 가진 영이 되었으므로 이제 안식을
그리워하는, 안식을 사모하게 된 영적 존재임이 드러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의 본능은 땅의 것입니다. 인간은 땅의 성분인 흙으로 지어졌으므로 육의 본능이 더 강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넣어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이 되게 하셨지만, 땅에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의 욕구를 육의 본능의 것으로 채워 보려고 하는 인간의 약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실체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은 수치요, 두려움이요,
무가치한 것이요, 저주인 것을 보게 하신 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 근본 된
토지를 가는 수고 속에서 안식하기를 원하는 영의 고통과 욕구를 느끼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안식을
사모하며 소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제 첫 사람을 비롯한 인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하는 그 사명의 길로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할 그 육체는 사는 동안 수고하고 고난의 떡을
먹어야 하고 그 고달픔의 광야에서 안식을 사모하게 하셨습니다.
에덴은 하늘의 모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자기가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다 있다는 말입니다. 안식이요, 평안입니다. 이제 천 년 시대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누릴 행복입니다. 사람이 육체는 땀 흘리고 수고해야 먹게 되고, 여러분 얼마나
수고스럽습니까? 그러나 그 수고하다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이제 광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게 되는 것임을 배우고 안식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걸어가야 하는 길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보이신 것은 그들이 죄지었다고 그들을 떠나신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본질을 알도록 하기 위해 삶의 고난의 현장으로 이끄시고,
그 고난 속에서도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하나님도 같이 고난의 길에 계셨다는 것을 아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기를
원하셨지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기에 용감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들도
말할 것 없지만 믿는다고 하는 자들 속에서도 용감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예수님이 없이 사는 자의 마지막이 어떤 것이냐, 바로 17,18절에 육체를 위해 사는 자들은
영으로서 영원히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육체가 끝나는 날 육체만을 위해
사는 자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가, 자기 안에 하늘의 생명이 없다면 일생 평안함이 없이 수고하였
으나 결국 그 영은 저주로 들어간다는 선고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 하늘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영이 죽음의 두려움에 있기 때문에 무서워
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 영에 예수님의 생명이 와 있는 사람은 하늘을
보는 영의 눈으로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니 두려움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는 것입니다. 기쁘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하신 말씀의 뜻을
여러분 모두 깨닫는 말씀으로 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 복에 복을 더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제14장 남편(하나님)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p321-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