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남한강 변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아침일찍 두물머리 양수리로 향했다
석훈이가 눈 수술 시간이 근 3시간이나 걸린다고 하여 그 와중에 양서면 구정승골을 들르기 위해서이다
먼저 정창손 묘역을 방문했다 겨울 날씨는 날씨인지라 오전 일찍 날씨가 꽤 쌀쌀하다
정창손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효중(孝仲). 정양생(鄭良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정부(鄭符)이고, 아버지는 중추원사(中樞院使) 정흠지(鄭欽之)이며, 어머니는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좌참찬 정갑손(鄭甲孫)의 아우이다.
사당 왼편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가 새롭게 만들어져 세워있다 글씨를 쓴 김수동은 사위 김질의 아들인 것 같은데 이 비는 연산군 때 파손되어 최근 다시 세운 것이다
1423년(세종 5) 사마시를 거쳐, 1426년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집현전의 저작랑과 교리를 역임하면서 『통감훈의(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1443년 집현전응교가 되었는데 재직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
같은 해 풀려 나와 응교로 복직된 뒤 1445년 집의가 되었는데, 이듬해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다시 좌천되었다.
이듬해 용서를 받아 직예문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48년 집현전부제학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번 왕실의 불교 숭상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사당 및 재실 오른편엔 구비각이 있다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과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면서 『고려사』·『세종실록』·『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구신도비는 인조 때 외손 이원익의 재건으로 한준겸이 서거정의 글에 추삭하여 짓고 심열이 글자를 썼다
이듬해 문종이 즉위하자 우부승지를 거쳐 1451년(문종 1) 대사헌이 되었는데, 조정의 관원들로부터 남달리 깨끗하며 절조를 잘 지키면서 자신의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 제학·대제학·병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창손 6대 손자들의 비이다
1455년(세조 1) 우찬성으로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과 판이조사를 겸했으며,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녹훈되고 봉원군(蓬原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위 김질(金礩)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단종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했는데, 일이 여의치 않자 김질이 이 사실을 자신에게 폭로함에 이를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이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서 1자급을 올려 2등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이 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더해졌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어 대사성·대제학을 겸직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이러한 처사로 절의를 숭상하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 등으로부터 많은 비난도 받았다.
고손자의 비이다
그러나 세조로부터는 대단한 신임을 얻어 1457년 좌의정이 되었고,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여묘(廬墓)살이를 하고 있는 그를 기복(起復:나라의 일이 있을 때 상중에 있는 대신을 3년상이 지나기 전에 벼슬에 임명하던 제도)시켜 영의정으로 삼았다.
이에 여러 번 소를 올려 이를 사양했으나 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62년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말했다가 삭직되고 여산(礪山)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용서받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복작(復爵)되었다.
증손자의 비이다
1468년(예종 즉위년) 예종이 즉위한 뒤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옥사를 잘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랐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원상(院相)이 되었다.
1470년 나이가 70이 되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궤장이 하사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죽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懿敬世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
손자의 비이다
한편, 남효온(南孝溫)이 소를 올려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 복위를 주청하자, 소릉의 폐출에 참여한 그는 복위에 반대했는데, 후일 복위된 뒤 이 일로 지탄을 받았다.
1475년 영의정에 재임되었으며, 이듬해 왕이 왕비를 폐하려고 할 때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간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번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1485년 나이 84세에 영의정으로 재임된 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2년 뒤인 1487년 86세로 죽자 왕은 청빈재상이라 하여 많은 물품 등을 부의로 하사하였다.
증손자 정치의 비이다 이원익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의 생모를 폐출하는 논의에 참여한 죄로 윤필상(尹弼尙)·한치형(韓致亨)·한명회(韓明澮)·어세겸(魚世謙)·심회(沈澮)·이파(李坡)·김승경(金升卿)·이세좌(李世佐)·권주(權柱)·이극균(李克均)·성준(成俊) 등과 함께 십이간(十二奸)으로 몰려 부관참시(剖官斬屍)되었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신원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어 부관참시 때 철거한 석물을 다시 세우고 예로써 개장(改葬)하였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배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사당과 구비각으로 부터 여러 후손들 묘를 거쳐 제일 위 꼭대기에 비로소 정창손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무덤의 경계를 정한 곳이고, 석물은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말한다.
정창손의 묘는 연산군 때 무덤이 파헤쳐지는 형벌에 처하면서 묘지와 석물이 훼손되었다. 이후 중종 때 죄가 풀려 묘를 새로 꾸몄다.
1970년 서울 방이동에 있던 묘를 옮겨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이때 따로 묻혀 있던 부인 청주 정씨와 합장하였다. 묘와 석물은 현대에 다시 만든 것인데, 옛 석물 일부는 옮겨 왔다.
누구의 무덤인지 표시하는 무덤 앞의 묘표는 총 2기가 있다. 위가 둥근 형태의 비석은 정창손의 묘표이고, 연꽃잎을 뒤집어 놓은 형태의 머릿돌을 가진 비석은 부인의 것이다.
15~16세기에 만들어진 묘표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문인석은 2쌍이 있는데 돌 표면이 닳은 정도 등으로 볼 때, 아랫단에 있는 문인석이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연고로 이 석물들은 계유정난, 갑자사화 등 역사적 격동기를 잘 대변해주는 묘역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인물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는 묘역 아래 입구에 있다. 원래의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서거정이 글을 지어 세웠으나 연산군 때 파손되었다. 그 후 외손 이원익이 앞장서서 인조 1년(1623)에 다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