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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7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이신 그가 성육신하신 것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 그의 낮아지신 신분 자체가 고난의 내용인데,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사셨던 기간 내내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특히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가장 크고도 치욕스러운 고난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몸과 영혼으로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영혼의 고통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기까지 한 고통이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 성자의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도 없고 나눠지지도 않습니다. 물론 혼합되거나 전이되지도 않습니다. 신성은 신성대로, 인성은 인성대로 있으면서 교통하십니다. 이런 성자의 신성과 성부 그리고 성령의 신성 역시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은 신성이 인성을 버린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단지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런 고통을 당하여 괴로워할 정도로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지만 신성이 인성을 전혀 돕지 않음으로 그의 몸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이 극심한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46절의 말씀처럼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는 영혼이 떠나신 것으로 표현하는데(마27:50, 요19:30), 죽음이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기 때문에 영혼이 그 육체로부터 떠났다는 것은 실제로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부분이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0문은 왜 그가 죽으시기까지 하셔야 했는지를 묻습니다.
40문. 그리스도는 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셔야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로 인하여(창2:17),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 이외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를 방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롬8:3-4, 빌2:8, 히2:9,14-15).
이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이 과연 필요했는가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맨 첫 사람 아담에게로 가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이라는 동산에 두시면서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먹었는데도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가 서며,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가 서겠습니까? 말씀하시고도 말씀하신대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는 분이 되는 것이고, 공의롭지도 않는 분이 됩니다.
물론 아담이 곧바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죽은 처지가 되었고, 또한 조금씩 죽는 상태에 있었고, 그동안 그는 이미 영원한 죽음의 시작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창세기 3장 10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을 찾으시자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즉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두렵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되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이해도 있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신 모든 선한 은사들이 상실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음의 은혜를 더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그러나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이상 누구도 예외 없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곧 사망이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의 책을 보면 이런 내용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에 대해서 다룹니다. 지난주에 살핀 37문의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몸과 영혼으로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으니’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때 온 인류라고 하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면,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입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의 경우는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또 디모데전서 2장 6절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그런데 성경의 어떤 곳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마태복음 20장 28절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어떤 부분은 모든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내용을 조화시켜 주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충족성과 유효성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보상의 충족성과 관련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지만, 그 보상의 적용과 유효성과 관련해서는 오직 택한 자들과 믿는 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신 것이라고 말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어떤 인물의 입장이냐 하면 가톨릭 스콜라 신학의 중심에 서 있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입니다. 또한 소뮈르 학파의 아미랄두스라는 사람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아미랄두스라는 사람은 가정적 보편구원설 혹은 가정적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작정은 보편적이고 조건적인 작정과 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작정으로 구별합니다. 보편적이고 조건적인 작정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보편적 구원을 마련하고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믿음을 조건으로 한 구원으로 초청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고, 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작정은 그 누구도 스스로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을 영생으로 택정하여 그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위해 필요한 은혜를 주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정적 보편구원의 입장은 아니지만 개혁자들의 다수가 충족성과 유효성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리스누스도 여기에 속합니다. 도르트 신조 역시 이런 입장에 있습니다. 또한 칼빈도 그의 요한일서 주석의 내용 속에서 이런 입장에 대해 거절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충분성과 유효성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속죄할 수 있는 능력은 얼마나 되는가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면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못하실 것이 없는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계시를 통해 알리고 계신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무한한 능력을 마음껏 펼치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심을 알립니다. 작정만 하더라도 에베소서 1장 11절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의논을 따라 역사하시는 이의 작정을 따라 일하신다고 표현합니다. 그의 뜻, 그의 의논, 다시 말해 그의 의지 없이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편 3절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도신경의 첫 번째 부분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 가운데 시편 115편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단지 하늘과 땅이라는 의미를 넘어 하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그만큼 전능하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어떤 식으로 행하시느냐?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정할 필요 자체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충족성과 유효성의 논리처럼 모든 자를 위해 충분하다는 것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가 ‘하고자 하는’(롬9:18) 의지에 달린 문제이지, 그런 의미와 상관없이 행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 전에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면 바로 그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고, 그 효력 역시 그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서 밝힌 것처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셨다면 자기 백성만을 위해 죽은 것이고 그들만을 위해 충족한 것이지, 여기에 모든 사람을 위해 충족하다는 말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 모두가 아닙니다. 온 세상, 다시 말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면 그들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셔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인데,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 이외에는 우리의 죄에 대한 보상을 치를 방도가 없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만이 참 사람이시고, 또한 의로운 분이시고, 나아가 모든 피조물보다 더 능력 있는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의 장사지낸 바 된 것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1문입니다.
41문. 그는 왜 “장사지낸바” 되셨습니까?
답. 그가 참으로 죽으셨음을 그로써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마27:59-60, 눅23:52-53, 요19:38-42, 행13:29).
장사지낸바 된 것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할 때 장사지낸바 되기 전부터 그 사실을 입증하는 내용이 있는데, 요한복음 19장 31절 이하입니다. 우선 30절에서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19:31-3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두 사람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의 다리는 꺾은데 반해 예수님은 꺾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완전히 죽지 않은 데 반해 예수님은 완전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는데, 찌른 곳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다리가 꺾이지 않는 것과 관련해 성경은 이 일조차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6절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출12:46, 민9:12 참조).
그리고 난 뒤 예수님은 장사되셨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19장 38절 이하를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고 허락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언급되는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쌉니다. 이런 모든 과정도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분의 죽음을 입증함과 동시에 이런 의미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 19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자초한 형벌과 저주와 치욕의 일부로써 그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일이 그의 영광의 일부인 것처럼, 그가 장사되어 죽은 자들이 묻히는 곳에 묻혔다는 것은 우리로 인하여 당하신 낮아지심과 치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죽은 척 하신 것도 아니고,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신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 죽음을 장사됨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유익과 관련해서 설명하는데, 먼저 42문을 보시면 이렇게 묻습니다.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여전히 우리도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요(시49:7),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요 영생에 들어가는 것일 뿐입니다(요5:24, 빌1:21-23, 살전5:9-10).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의 성격은 분명히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때로 성도의 죽음에 대해 죽었다는 표현보다는 다른 표현을 쓰는데,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육체로부터 영혼이 떠나는 죽음을 경험하지만 성도의 죽음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잔다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아닌 자들도 마지막 때 부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활은 불명예스러운 부활이요, 부활 이후 심판을 통해 영원한 고통 안으로 던져질 것이고 영원한 멸망으로 처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결코 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그 생명이 영생하도록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지라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결코 죄로 말미암는 죽음이 아닙니다.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결과를 낳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음 이전에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으로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지만, 죽음은 그런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로 있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듭니다. 신학적으로 완전 성화에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 성도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통해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은 살아 있을 때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통해서 이루시는 역사로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원인이 제거되면 결과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는 논리로 죽음의 원인인 죄가 우리에게서 제거되었다면 죄의 결과인 죽음도 당연히 제거되어야 옳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원인이 완전히 제거되면 그 결과도 당연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원인인 죄가 우리 속에서 완전히 제거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있고, 또 그런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습니다. 우르시누스는 죽음의 원인인 죄가 우리 속에서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고, 그저 죄가 사해진 것일 뿐이라고도 말합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죄책은 제거가 되었지만, 죄 그 자체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우리 속에 남아 있어서 점차적으로 제거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죄에 대한 회개를 우리에게 요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원인인 죄가 우리에게 제거되지 않는 이상 죽음도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은 제거되지 않았지만 성도의 죽음은 그 성격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결과로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요리문답의 답변처럼 죽음을 통해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고, 이제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것입니다.
42문이 죽음을 통한 유익이라면, 죽기 전 다시 말해 살아 있을 때의 유익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3문입니다.
43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는 또 어떤 유익을 받습니까?
답. 그의 공효로 우리의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장사되어(롬6:5-11, 갈2:20, 골2:11-12), 육체의 악한 정욕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며(롬6:12-14),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사로 그에게 드리게 되는 유익을 받습니다(롬12:1, 엡5:1-2).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죄 사함, 그로 인해 죄에서의 자유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형벌의 원인인 죄로 말미암아 동일한 형벌을 당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동일한 죄목으로 두 번 형벌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정당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있지만,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한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의 죄는 원죄는 물론 자범죄까지입니다. 과거의 죄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입니다. 작위(作爲)의 죄만이 아니라 부작위(不作爲)의 죄까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미래의 죄에 대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으로 인해 죄에 대한 인식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때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산 자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롬6: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죄 사함, 그로 인한 죄에서의 자유함만이 아니라, 둘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본성이 새로워진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유익입니다.
다만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표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죄책은 제거가 되었지만, 죄 그 자체는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제사와 죽으심의 유익은 요리문답의 표현처럼 육체의 악한 정욕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악한 정욕들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라, 그 지배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체의 악한 정욕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 아래 있게 되거나 죄의 노예가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패한 본성은 죄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상에 사는 동안 주의 은혜를 따라 죄를 죽이며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명령의 형식, 권면의 형식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가 가장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실제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나를 위하여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벌어 놓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내 속에 새 생명을 시작하시는 성령을 베푸사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되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찬송과 존귀를 받으시게 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44문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해석하는데, 사도신경에도 여러 사본이 있어서 이 부분이 있는가 하면 없는 사본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사도신경은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지만, 개혁자들의 요리문답을 보면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44문. 거기에 “지옥에 내려가셨고”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크나큰 시험을 받을 때에라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 내내, 특히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와 지옥의 괴로움을 친히 당하심으로써(시18:5-6, 116:3, 사53:10, 마26:38, 27:46, 히5:7)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로써 전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사53:5).
사도신경의 조목을 보면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것,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장사지낸바 되셨다는 것, 그리고 나오는 것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이후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으로 고백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이후, 그리고 부활하시기에 앞서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인가?
우선 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 번째는 무덤을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창세기 42장 38절에 보면 야곱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야곱이 이르되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음이라 만일 너희가 가는 길에서 재난이 그에게 미치면 너희가 내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이때 스올이 지옥이라는 뜻인데, 실제 지옥으로 내려가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무덤에 들어가게 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버림받은 자들의 처소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부자의 경우 음부, 즉 지옥에 있다면, 나사로의 경우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고 하는데, 지옥과 상반되는 낙원 혹은 천국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지극히 심한 괴로움과 고뇌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시편 116편 3절에 보면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라는 말씀이 있는데, 스올의 고통 다시 말해 그 고통이 지옥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그런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지옥이라는 의미를 사용합니다.
그럼 사도신경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할 때 세 가지 중 어떤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단 첫 번째 의미인 무덤은 사도신경에서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말에서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의미인 버림받은 자들의 처소, 다시 말해 실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도 아닌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에 앞서 이런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 또한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양 편에 있던 강도 중 한 사람에게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물론 어떤 사람은 이 낙원을 천국과 지옥이 아닌 중간기로 보기도 하지만, 낙원 천국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실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 번째 의미인 지극히 심한 괴로움과 고뇌를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리문답 44문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 항목을 고백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그런 지옥에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당해야 했지만 그가 대신하여 당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지옥과 같은 고통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고통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의 욥이라는 인물을 떠 올리지만 이 땅에서 당하는 어떤 고난과 고통도 지옥에서 당하는 그런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고난과 고통은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해서 그런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혹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그런데 그 시험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매우 큰 시험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고통은 사실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시험일지라도 우리가 본래 받아야 할 고난과 고통은 결코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받으심으로 우리가 그런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도신경에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할 때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생각을 가지는가?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20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 6절 때문입니다. 우선 베드로전서 3장 19절과 20절을 보면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때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지옥에 있는 혹은 연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것으로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18절 후반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씀과 22절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라는 말씀 사이에서 뭔가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18절 죽음과 부활, 그리고 22절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 사이에서 뭔가를 강조하는 것인데, 19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 다시 말해 성령으로 가서 옥, 이때 옥은 지옥 혹은 연옥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20절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시대 인성을 취하여 오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성령으로 노아가 살던 시대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시적 교회의 상징이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온 자만이 멸망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노아의 식구들이란 것입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이에 이 내용이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17절에 보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러나 고난만 받으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이후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예를 노아 시대를 통해 증거 하는 것이 베드로전서 3장 19절 이하 21절인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부터 보면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베전4:5-6)라고 말씀하지만 실제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의미하거나, 베드로가 편지를 쓸 때만 해도 죽었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 복음이 전파되어 믿게 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도신경의 구절은 실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과 고난을 친히 당하셨다는 뜻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뇌와 고통과 공포와 지옥의 괴로움을 친히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이고, 살아 있을 동안에도 나아가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옥과 같은 고난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우리에게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고난을 주시기 때문에 고난을 통하여 인내하며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