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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세마포장 9-1 성도들의 옳은 행실
16. 뜰 사면의 포장은 세마포요 17.기둥 받침은 놋이요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머리
싸개는 은이며 뜰의 모든 기둥에 은 가름대를 꿰었으며 (출38:16,17)
9.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을 향하여 뜰 남편에 광이 백 규빗의 세마포장을 쳐서 그 한 편을
당하게 할지니 10.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그 북편에도 광이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중략.........
17.뜰 사면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뜰의 장은 백 규빗이요
광은 오십 규빗이요 세마포 장의 고는 오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
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찌니라 (출27:9-19)
그동안 성전의 모든 과정을 거치고 이제 마지막 단계인 성막 뜰을 둘러친 포장, 즉 담에 왔습니다.
오늘 "뜰 사면의 포장은 세마포요"하는 것은, 성소와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뜰을 가려주는 담과
같은 포장입니다. 그 사면 포장은 재료가 뭐라고요? 세마포, 그다음 27:10에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했습니다. 기둥과 받침의 재료는 무엇이라는 겁니까? 놋입니다. 그다
음 38:17에서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이요 기둥머리 싸개는 은이며 해서 여기서는 재료가
은입니다.
세마포와 은과 놋, 이 세 가지를 재료로 하여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뜰의 경계를 이루는 울타리
를 쳤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울타리나 담장이나 담이라고 말한 곳은 없습니다. 뜰의 포장이
라는 정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 뜰과 외부와의 경계를 이루기 위해서 세마포장을 치
라 하신 것이기에, 저는 그냥 울타리라고 부르고 이 울타리에 사용된 세마포와 은과 놋으로 주시는
뜻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고전3:16)하신 그 성전이 되었으
면, 지금까지 우리가 성전에 대해 배우셨잖아요? 그 성전의 믿음이 되었으면 그 믿음에서 나는 것,
곧 보이는 것이 바로 세마포요, 은이요, 놋이므로 그것을 말씀드릴 것이란 말입니다. 오늘은 세마
포에 대해서입니다.
구약에선 성전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이름을 두시고 이스라엘을 만나주셨고 신약은 예수
님을 믿는 이들을 성전이라 하시고, 이제 하나님이신 구주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성영님이 가지
고 들어오셨습니다.(구약은 여호와 신약은 예수)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
요, 어디에 있나 찾아다녀야 하는 것도 아니요, 이제 내가 성전이면 성전인 내 안에 와있는 것입
니다. 내가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느냐에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지
않다는 것 말씀드렸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나오스'라고 하는 것은, 네가 성전이면, 하나님의 뜻이 네
안에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님의 복이 네 안에 와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내가 그 성전이면 하나님의 이름이 내 안에 있는 것이요, 그 이름으로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것이요, 나에게 복이 와있는 것이니, 나는 그 이름을 모시고, 그 이름이 주시는 복을 경험
하고,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그 이름으로 사는 그것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 성전 뜰 울타리입
니다. 그래서 울타리의 세마포와 은과 놋은 또 다른 뜻을 받아야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동안 듣고 배운 성전의 것입니다. 성전을 통해 주신 믿음이 되었으면, 세마포와 놋과 은이 주는
뜻이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마포와 은과 놋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자기 믿음을 볼 수 있으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성소면 세상을 따르거나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은혜의 경험을 영혼에 가졌으면, 용서할 능력도 자기 안에 있습니다.
성영님이 함께하시니 사랑할 능력도 있습니다. 성영님의 열매를 맺은 것이요, 믿음의 결실이 있게
된 성전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세마포장입니다.
번제단부터 지성소까지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과
정이고, 성전을 둘러친 울타리 세마포장은 성전 안의 것이 내게서 드러나는 것으로, 사람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용서와 화해의 관계, 복음을 주는 보이는 성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에 대한 성전은 보지 못하니 모릅니다. 그러면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전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를 보면서 성전 안의 일을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
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통로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보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이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처럼 세상 사람들도 성전인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통로로 삼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추측한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을 보는 안경으로 삼습니다.
예수님의 산상 말씀이 바로 성전의 성소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나와 맺은 관계로 성전의 믿음이
드러나지는 울타리의 말씀입니다. 마5: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곧 지성소가 돼라''하나님의 성전으로 온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셨습니까?
우리 세마포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계19:7,8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에게 입게 하
신 옷이 무엇이라고요? '세마포를 입게 하셨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겁니다. 그러
면 내가 성전이면 세마포 울타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치라고 명하신 세마포장
이 있습니다. 세마포를 입게 하신 것, 구원받은 자의 행실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된 믿음에
서 나오는 옳은 행실입니다.
옳은 행실에 대해 모두가 다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분명히 밝혀 말씀드립니다. 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했으니 그러면 세마포를 내가 입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내게서 나온 것, 내가 행하
는 것으로 입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입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옳은 것이
내게서 행실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입게 하신 세마포가 아니라
자기가 입은 것을 열심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가 옳은, 자기 행실의 옷을 입으려는 것에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는지, 그러다 보니 그 신앙생활이 힘겹고 족쇄처럼 여겨져, 믿자니 괴롭고 안
믿자니 그것도 두렵고, 편하지 않는 종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찢겨 나
가거나 무너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게 하신 세마포는 절대로 무너지거나 찢겨나가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모세가 세운 성막 성전의 울타리의 세마포는 광목과 같은 천입니다. 그 천으로 성막 울타리를 했으
니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람이 세게 불면 그 천이 바람을 타서 뽑히거나 날아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그대로 다 맞아야 하
는 광야 한가운데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도 비바람이 쳐도 날아가거나 무너지거나 주저앉지 않
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을 따라 제작하여 세운 세마포장은 그대로 제자리에 견고히
서 있습니다. 그것은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온전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입게 하신
온전한 세마포는 주저앉지도 무너지지도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대로 무너질 수 없습니다. 무너
지는 것은 자기가 세우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옳은 행실은 옳으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더욱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로 비치는 것입니다.
옳은 행실을 헬라어로 '디카이오마'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성전의 모든 가르침의 말씀을 포함한
것으로 여러 가지의 뜻을 가졌습니다. 성소의 믿음이 되면 그 믿음은 드러나게 돼 있다고 했잖아
요?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밥 먹었느
냐?'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 밥(쌀)만 먹었느냐를 묻는 것 아니잖습니까? 여러 가지 따르는 음
식이 있잖아요? 그처럼 '용서를 받은 자'라는 것은 밥 먹었느냐와 같은 이치입니다. 바로 세마포
는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용서를 받은 자라는 뜻이에요. 이것이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용서를 알고 용서를 받은 것이면,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그에게서
보이는 말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하는 것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용서
를 알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옳은 행실이에요. 두 번째, 하나님의 용서
를 알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나타나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드러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옳
으신 것을 입은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하늘의 언어, 하나
님의 선한 말이 그 입의 언어가 되어 은혜를 끼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옳으신
것을 입게 하신 옳은 행실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는 우리 믿음에 대단히 중요한 뼈대와 같습니다. 그렇기에 흘려보내듯 가볍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용서에 걸려있으면 믿는 것은 다 허사입니다. 이 용서에 걸려있으면 그
것은 용서받지 못했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죄 용서의 피를 믿고 죄 사함을 받
은 것을 믿는다 해도 용서에 걸려있으면 하나님과 막혀있는 것이기에 영이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할 능력도 없는 겁니다. 영적인 행복, 성영님의 기쁨을 그 안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용서에 대한 것은 다음번에 말씀드릴 것으로 하고, 오늘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나타
나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주의 깊게 듣고 자기 안에 능력이 될 수 있도록
사모함이 있어야 성영님께서 도우실 수가 있으니, 용서에 해당하는 말씀을 좀 읽고 오시면 좋겠습
니다. 마18:21 이하의 말씀과 마6:14,15의 말씀입니다. 말씀한 대로 용서에 걸려있으면, 두 번째
영혼의 기쁨도, 세 번째 입의 말의 능력도 없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것, 하나님의 용서를 알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나타나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하나
님의 용서가 무엇인지 그 용서를 아는 자에게 영적 자유가 있게 되어, 영혼의 기쁨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 받은 것에 대하여 영혼에 깨달아지니, 용서하는 능력이 있게 되고, 영이 자유하게
되니 기쁨이 있다는 말입니다. 매였던 모든 것을 용서로 풀고 나가면, 그것이 곧 영의 자유를 얻는
것이더라 말이에요. 그에게 성영님이 오실 수가 있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예수님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평안과 행복함이 있는 것입니다.
요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
이니라 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내
기쁨이 너희 기쁨이 되어, 그 기쁨이 충만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
이면, 반드시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
가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는다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예수님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믿음
은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에서 돌이켜 영적인 기쁨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기쁨은 세상 것이 잘되었기 때문에 기쁘고, 안 되었기 때문에 안 기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과 상관없어요. 환경에 좌우되는 것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 것으로 기쁜 일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빼앗기지 않는 무너지지 않는 영에 있는 기쁨입니다.
살전5:16에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쁠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기쁠 일이 없으면 기뻐하
지 않는 그런 인간 자기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성영님으로 믿는 영적인 믿음, 성전의 믿음이면
자기 안에 예수님의 평안함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니 항상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
님이 내 안에,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 하면서도, 세상 것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 것에서 기쁨을
얻고자 좇는 것이면, 그것은 성전의 관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위태한 모습으로 예수님도 잡아보려 하고, 세상도 잡아보
려고 하는 자기 방식의 믿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어렵게 소유하게 되
면 기쁠 수 있습니다. 행복한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자기의 기쁨일 뿐,
언젠가 사라질 것이요, 그런 기쁨을 얻으려고 믿는다 한다면, 지금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된 믿음에서 나는 말,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면, 성전이 말과 행실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12:34,35에 독사의 자식들아 너
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
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세상 사람에게 하신 말씀 아닙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선하고 착하기 때문에 그 속
에서 선한 말이 나온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이니,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으면, 그 선이 나온
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 있으면 예수님이 나온다는 그 말입니다. 그 속에 쌓은 것이
무엇인가? 선인가? 악인가? 선을 쌓았으므로 선이신 예수님을 내는 선한 사람인가? 자기의 좋은
대로 기분대로 믿어 무익한 것을 쌓고, 무익한 것을 내는 악한 사람인가? 쌓은 것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선입니까? 악입니까? '아 예수님 믿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것이지요, 누가 뭐래도
믿지요' 입의 말은 분명 선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면 그것은 악을 쌓는
것이요, 입의 말은 포장일 뿐입니다. 참으로 예수님만 계신 성전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게 되어 있고,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게 되어 있고, 행실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있어, 생명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믿는 자면 새 방언을 말한
다고 하셨습니다(막16장). "새 방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어인 영이요, 생명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어요, 새 방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면 그 입의 말은, 새 방언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입었으니, 그것으로 언어 행실이 되어 빛나고 깨끗한 세마
포 입은 것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엡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했습니다. 약1:26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
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 나는 믿음으로 산다'고 자기 입으로 하늘의 말은 열심히 하는
데, 또 그 입으로 험담하고 상처 주고 다투고 저주하고 원망하고 세상 걱정 염려 늘어놓는 것이면
'구원 받았다고'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것은 믿음도 구원도 없다. 자기 마
음에는 없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헛것, 즉 거짓이라는
거예요.
참으로 믿는 자로 복을 받았으면, 한 샘에서 쓴물 단물 낼 수 없듯이, 쓴물이 있지 않습니다. 세상
이 있지 않습니다. 성전에는 바리새인 없습니다. 서기관 사두개인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예수님
과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내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관계만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와있다는 것이요. 복이 와 있다는 그것을 자기가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어는 그
복을 말하고, 믿음을 말함으로써 자기에게 와있는 복을 삶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하나님의 복이 자기에게 와있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믿
음은 자기에게 복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복이 와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면
믿음에 문제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을 보인 아버지요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음을 알았고, 자식에게 축복할 수 있는 권위가 있음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들 이삭을 축복하고 또 이삭은 그 아들 야곱을 축복하고 또 야곱은 그 아들 요셉과 형제들을 축
복하고,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이삭도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이 와있는 권위를 알
았기에, 아버지의 그 축복을 원했어요. 야곱도 요셉도 아버지의 축복을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믿음이 성전이면 자녀를 축복할 권위가 있습니다. 자식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축복의
권위가 있는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여 부모의 축복을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의 복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가족을 세우신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족과 함께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을 드러내시
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같은 하나님의 복을 가진 부모가 몇이나 있을 것이며, 그 부모의
신앙의 복을 보는 자녀가 몇이나 있을 것이며, 부모에게서 신앙의 복을 보아도, 부모의 신앙의 복
을 유산으로 사모하여 축복을 원하는 자녀가 있을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엄청난 복을 말
하면서도, 사실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고 교만한 것은 여전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뭐하자고 이
말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부하는 말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으려면, 혹 자녀에게서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보아도, 자기 속이 썩을 만큼 힘들게 한다 할지라도 절대 그것을 비판하거나 정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자신이 성전의 믿음이 되십시오. 성전 안에는 비판이나 정죄가 없습니다. 어
두움은 없습니다. 그 안에는 빛이요, 생명이요, 성영님으로 나타나는 열매로 옳은 행실만 있습니
다. 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믿는다면 자녀를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웃고 깎아내리므로 하나
님의 역사를 막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전의 믿음을 가졌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거예요.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을 그
대로 드러내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방해하는 자에게 속한 것이요, 자기와 함께 자녀를 저
주 안에다 묶어두는 악한 자의 행실일 뿐입니다. 자기가 성전이면 오직 생명과 축복이 나가는 것
이지, 거기에 악한 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오직 성영님의 열매만 있습니다. 자녀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그 같이 자기에게서 어둠의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
신 때문에 자녀가 저주에서 놓여날 길이 없게 되어 함께 저주로 가는 행위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세마포가 성전 밖의 것인데 맨 나중의 말씀이 되는 것은 세마포 안 곧 그 안에 있는 성전이 이루
어진 믿음만이 정상적으로 세마포 옳은 행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 가족이 되었든 내 이웃이
되었든 이 성전 밖의 사람들은 성전 안은 보이지 않으니 울타리를 봅니다. 세마포 옳은 행실은 믿
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보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내 행실을 전하는 것은 아닙
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보다는, 믿는 자들의 행실, 언행심사를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고,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평가
하기 때문에,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지어진 성전이 보이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알게
되고, 잘못 평가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또한, 천국을 소유한 믿음은 두려움이 있을 수 없고, 세상 염려에 매일 수 없고, 불안이 있을 수
없기에, 만일에 믿지 않는 이들 앞에 세상 염려에 있고, 두려워하고 불안한 모습을 비치면, 그들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너나 잘 믿어라, 나는 믿지 않아도 믿는 너보다는 더 낫다'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예수님의 은혜로 영원히 고통받을 죄를 용서받았으니, 내게 잘못한 사람도 용서로 화해를
이루는 옳은 행실이 있고, 예수님의 의로 옷 입었으니 그 의의 삶을 살므로 나타내는 옳은 행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 하나님의 지성소가 된 그 엄청난 복이 내게 있으니, 그 기쁨
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옳은 행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사람들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실 성전의 믿음이 되지 못하여 옳은 행
실이 없습니다. 거짓 포장된 옷, 자기가 입은 옷들, 자기가 입은 검은 옷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입은 행실들로 드러나는 것이어서 그것을 보는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 믿는 것을 생명이라
고 보지 않습니다. 구원이라고 보지 않아요. 영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지옥이 예비 되어 있다
고 해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믿는 것입니다. 정
신의 힘이나 얻고, 마음의 위로나 얻고, 형편 좀 잘되게 해주시고, 자녀들 좀 잘되게 해주는 하나
님을 찾고 믿는 척이 되어서, 사람들이 복음을 종교처럼 여기게 되었고,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않
게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제 말씀을 접하신 이들에게 진심으로 당부하고 당부합니다. 기회는 육체
에 있을 때뿐이니, 성영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구하시면서,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 믿는 믿음이 되도
록, 믿음의 힘을 얻도록, 말씀을 계속 듣고, 읽고 새김질하여 말씀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리는
은혜를 입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마포의 옳을 행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고 한다.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는 것, 첫째는 용서를 받았으므로 용서가 드러나는 것, 둘째는 용서를 받았으
므로 영혼의 자유가 임한 기쁨이 드러나는 것, 셋째는 용서를 받았으므로 입에 선한 언어 곧 하늘
의 말로 은혜를 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이해가 되었습니까?
오늘 말씀은 여기서 맺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세마포 옳은 행실을 입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아멘!!
세마포장 9-1 성도들의 옳은 행실.p311-p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