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철 - 하늘 나라 청지기 - 1. 입교와 은사 생활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한 집이라고 하더라도 그 집에서 살 주인이 없다면 빈 집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살아야 할 주인이 살지 못하고 잡된 것들이 살 때 흉가라고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입교와 은사 생활 1 나는 1958년 4월의 어느 날 “하나님의 집에 청지기가 없으니 집을 지키러 가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듣고 떠난 것이 뜻길 출발의 시작이었다. 2 6.25사변의 와중이라 누구나 외롭고 괴로운 나날의 생활이었지만, 외아들로 곱게 자란 나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요 고통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반강제로 끌려간 3년간의 군 복무와 심한 훈련 때 얻은 병으로 제대하고서부터 더욱 괴로웠다. 3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어떤 힘에 이끌리어 새벽 교회의 종소리에 예배드리는 교회 안을 기웃거리기 몇 번인지 모른다. 4 1954년 가을 어느 날, 지나는 길가 교회에서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에 끌려 당돌하게 함께 노래 부르자고 청한 것이 통일교회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5 바로 풍금 치시던 분이 이원주씨라고 하는 초창기 식구였다. 서툰 찬송이지만 같이 몇 곡 부르고 나니 “우리 집으로 시간이 있으면 같이 갑시다”라고 하여 인도받은 곳이 부산 영도 3층 집이었다.
6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의 심정과 민족적인 사명을 외치시는 말씀은 이론적인 모순이 없고 내 양심을 일깨워 주셨다. 통일교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만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7 허무하게만 느껴지던 인생, 불행하기만 했던 나에게 “함께 갈 수만 있다면” 하고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림론을 들을 때의 감격과 기쁨이야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다. 8 가난하고 불행한 국민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선민으로서 태어난 자랑과 긍지와 기쁨으로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짓말이라도 좋다. 소망 없는 이 민족에게 소망을 심어주고 새세계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간다면 어찌 주저하겠는가”라고 절규했던 한 청년의 말씀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9 자신밖에 모르고 살아가던 나에게 이웃과 민족을 의식하게 해주셨으니, 정말 새로운 인생의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생활도 몇 달 못 가서 청산하고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10 처음 서울 청파동 교회로 찾아갔을 때 작고하신 유효원 전 협회장님께서 몇 분과 함께 친절하게 대해 주며 예배 의식에 대해 소상히 가르쳐 주셨다. 서울에서 처음 예배드리는 주일에 내 눈을 다시 비비고 인도하시는 분을 쳐다보았다.
11 나의 삼촌을 이곳에서 뵙는 것과 같은 착각 속에 한참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언제나 뒷자리에서 선생님의 눈길을 놓칠세라 응시하며 말씀을 경청하였다. 뜻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우시면 같이 울고 웃으시면 같이 웃었다. 선생님의 말씀과 인류를 사랑하시는 간절한 기도는 방황하던 어린 마음과 몸을 꼭 잡아 주셨다.
12 그동안 아저씨 댁에서 작은 공장의 일을 책임지고 일했다. 그러나 그간 열심히 일해 왔지만 말씀을 들은 후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주 먼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13 하루는 하던 일이 밀려서 주일이지만 교회에 가지 않았다. 오전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종로에서 차를 타고 가던 군인들이 이유 없이 때렸다. 얼굴이 붓도록 매를 맞고 3일 동안이나 밖에 나가지 못했다. 14 “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귀한 말씀으로 거듭나야 할 것인데 자기 일을 했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알뜰히 키우시고자 하시는구나 생각되면서 오히려 감사와 회개의 눈물이 앞을 가렸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