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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16
설교 제목: 더 나은 삶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설교를 위한 묵상:
우리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셨다. 그 이야기는 다니엘서에 배경을 두고 있는데, 거기에는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다고 소개된다. 성도들도 다스린다는 의미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다니엘 7:18)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7:22)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임무를 주셨다. 다니엘서에서는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다. 그리고 열방을 통치한다고 되어 있다. 시편 2편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세상 나라들을 다스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은 아담 안에서는 사망이 왕 노릇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백성들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왕 노릇은 사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맡기신 일이다. 그것은 관리하고 다스리는 것이며, 가꾸고 번영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이 그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생명으로 충만하며 번성하도록 가꾸는 것이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일도 바로 그것이며, 그 전에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도 그것이다.
아담은 그 왕 노릇을 실패했다. 그렇게 보면 노아의 가정에도 그런 실패가 있었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도 온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지를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온전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대리인의 통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선배 신앙인들의 삶도 우리에게는 소중한 지침이며 귀감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그곳에서 길을 찾기 위함이다. 우리가 찾는 길이란 인생의 길이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와 존재목적,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최고로 가치 있는 일, 즉 인생의 최고봉에 대한 실마리나 그림을 찾기 위함이다. 성경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이 소중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그런데 그 방식은 어떤 그림을 제공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우리에게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신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 통치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구역과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이해하는 소중한 길잡이다. 누가 인생의 의미를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그 진리를 풀어서 알려준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나 과제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는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도 생각할 수 있도록 힌트를 제공한다. 개인의 위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느 위치에 있을까? 이것은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성경은 그것을 그림으로 제시한다. 즉,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 발등상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땅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지휘부다.
그런데 그 하늘의 지휘부가 땅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은 하늘의 출장소가 된다. 그 출장소에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작은 모습(소우주, micro-cosmos)은 거룩한 처소다. 그곳으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통치가 나타난다. 그런 출장소와 지휘부를 에덴동산이나 성막, 또는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앞 길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대대로 성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헐라고 도전하셨다. 그런 성전은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이 계속 일어나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그들 공동체와 개개인이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그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늘 조심해야 한다. 톰 라이트는 그곳이 위험한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주일에 설교할 제목은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법’이다. 최초의 아담이 통치를 하기 시작하던 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사실 우리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던 그런 통치와 유사할 것이다. 사도 바울의 용어를 빌자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면서 다같이 탄식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
톰 라이트는 로마서 8장을 주제로 다룬 그의 책(A Deep-Dive into the Book of Romans: Dr. N.T. Wright)을 낸 후에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에서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탄식의 기도를 드림으로 피조세계의 고통에 동참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탄식을 성령이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바로 그 탄식의 기도를 드림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통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조물의 왜곡과 뒤틀림을 바로잡기 위하여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통곡과 뜨거운 헌신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통치가 어떤 성격인가를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45절). 이 말씀이 나오기 전에 예수님은 세속의 통치자들이 다스리는 방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들의 통치는 사실상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망을 증가하게 하는 것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통치는 본질적으로는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그 통치의 양상은 자연계에 피는 수많은 꽃들처럼 다양하며 아름답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 다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톰 라이트는 그 다양한 모습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제시한 적이 있다. 그의 책, 톰 라이트와 함께 하는 기독교 여행(Simply Christian)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통치는 아래의 네 가지 영역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정의: 세상을 바로잡는 일
(2) 영성: 숨겨진 샘
(3) 관계: 서로를 위해 태어나다
(4) 미: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이 네 가지 영역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란 바로 이것이며 이런 영역에서 완성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그려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은 사실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왜곡이 발생할 때 언제 어디서나 일어난다. 정의가 외면될 때 의로운 자들이 고통을 받는다. 영성이 외면될 때 갈급한 영혼들이 헛된 것에 매달린다. 그리고 관계가 파괴될 때 그 속에서 깊은 탄식과 아우성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미는 어떨까? 미가 외면되는 경우는 어느 때일까? 톰 라이트에 따르면 그것은 늙고 병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황혼 때처럼 한낮의 광명은 사라져 간다. 그 속에서 탄식하는 피조물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고 함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이며 예수님은 그 통치에 어떻게 동참했는지를 살피고,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그 통치에 동참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설교가 일정한 시간 동안에 일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이라는 점은 책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압축적이고 간략하며 핵심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설교안을 작성해야 한다.
위의 생각들을 토대로 주제를 정하고 주제문을 정한 후에 그것을 이야기로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위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을 설교라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간략하고 선명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설교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들을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배우는 이유는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함이다. 인생의 길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 희망에 대한 근거를 말한다.
2. 하나님은 인생을 지으시고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3.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신 후에 그를 동역자로 삼으셔서 함께 세상을 경영하시려고 장소를 예비하셨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에덴동산과 성막, 성전은 바로 그런 곳이다.
4.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며, 그 대리인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서 거룩하고 위험한 땅이다.
5.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은 인간은 세상에 사망을 증가시키는 일에 동참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생명을 증가시키는 일에 동참한다.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6.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의 회복과 번영을 이루는 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아담이 살던 완벽한 상황과는 달리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바로 그 깨어지고 왜곡된 시절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통치방식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통치방식을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섬기는 것이다.
7.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한다는 것은 세상의 회복과 번영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배우며 그 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에 따르면 그 활동은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정의, 영성, 관계, 아름다움.
8.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위의 네 가지 영역에서 회복과 번영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원적인 갈망이며 그 갈망의 근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형상이나 성령의 기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9. 이 활동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사명이자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정의가 왜곡되어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라. (2)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헛된 것에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주라. (3)삶은 관계로 이루어지며 행복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죄악도 그렇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깨어지고 멀어진 관계들을 복구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 (4)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수명이 있어서 나중에는 추해지고 결국 썩어지게 된다. 그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도우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탄식의 기도에 동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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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준비할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은 시사성(時事性)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가?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위의 네 가지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유익한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물론 설교안을 쓰거나 설교를 묵상할 때 이런 질문은 우리의 의식 밑바탕에 깔려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을 제시하고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정의, 영성, 관계, 아름다움… 정의가 없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서로 좋은 관계로 화목하게 살아가지 않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장려하지 않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정의가 중요한 이유는 정의가 실종되면 진실한 사람들이 고난을 겪기 때문이며 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곳에는 우상숭배가 넘쳐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회에는 무관심과 냉담, 그리고 증오와 차별이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자라나지 않는 곳에서는 추함이 자리잡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그 어디나 지옥이다.
정의에 대하여
프로야구 심판진의 거짓말: 4월 14일 프로야구 대구경기에서 자신들의 실수를 가리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심판들에 대해서 한 사람은 계약해지, 두 사람은 3개월 정직의 처벌을 받았다. 심판들이 대화를 나누는 음성이 담긴 영상은 삽시간에 대중에게 퍼졌다. 그 영상이 며칠 사이에 35만명에게 전달된 것을 보면 정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대하여 소개한 방송사들을 방심위를 통해서 처벌했다. 그것은 대통령의 잘못을 가리기 위하여 온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였다. 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는 다수의 국민이 바보로 전락한다.
해병대 채수근 상병의 사건은 2023년 7월 10일에 일어났는데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을 종결짓지 못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해병대 수사단장인 박정훈 대령이 명령불복종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세월호 사건 10주년이 지난 지금 그 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논란과 음모론 같은 소문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사회의 위험요소를 바로잡는 것이 건강한 사회가 갖추어야 할 제도이며 소양이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실과 정의의 영역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다. 누구의 조사도 제대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회는 그만큼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영성에 대하여
영성에 대해서는 어떨까? 영성은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새소망교회 부임 초기에 나는 기독교 신앙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나는 그때도 회중을 대상으로 최근에 정리한 용어정의집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도회에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 기도회를 마무리한 후에 나중에 드는 생각은 이랬다: ‘그 사람은 기도를 드리러 왔는데 신학적인 이야기만 듣고 가는 바람에 실망할 수도 있겠구나!’ 최근에 나는 금요기도회 시간에 가장 먼저 기도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같은 이유로 현대인은 과학의 발전에 기대어 인간의 수명과 행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우려한다. 천체물리학과 천문학의 발달로 우주의 기원이 곧 밝혀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생명의 발생 원리와 우주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생명체의 발견이 시간의 문제이지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염원이 해결될까?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삶의 안정을 찾고자 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 놓음으로써 비로소 느끼게 되는 영적 평안과 안정감, 또는 기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더 높은 과학문명과 고도화된 기술을 가질수록 인간에게 더 불안이 커져가고 삶의 만족과 평화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원적 열망이나 갈망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톰 라이트는 그것을 수도관에 비유했다. 잘 닦인 수도관 몇 개만 인정하는 바람에 인간에게 있는 다양한 영성의 샘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수도관이 터져버리는 것이 오늘 현대인이 겪고 있는 병리현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톰 라이트의 글을 읽고 정리한 것이다. 다시 곱씹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아래에 그대로 소개한다:
관계에 대하여
세 번째 메아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서로 좋아하다가도 미워하고,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정체성을 오해하며, 국가간의 관계도 매우 유동적이다가 파괴적이 된다. 개개인 사이에 있는 이기심이 국가간에도 작용하며 자국의 유익을 가장 최고의 가치로 여기다 보니 충돌이 일어난다. 톰 라이트는 이것을 인간이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서로를 위해 존재하며, 피조세계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 설명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의 일부임을 깨달을 때 정의, 영성, 그리고 인간관계의 갈망을 해소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네 번째 메아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탄을 하지만 그것을 붙들어 둘 수는 없다. 사진을 찍어 그 순간을 영원히 보관하려고 하지만, 사실 그 사진은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료일 뿐이다.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은 금세 참혹함으로 바뀔 수도 있다. 즉, 부패하고 시들어가고 죽는다. 그래서 이사야서의 예언에 의하면,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물리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노래한다. 그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요, 부족함이 없는 그런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우리에게 있고 기독교는 바로 그런 점을 충족시켜 준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니 처음에 잡았던 설교의 제목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는 법’도 좋지만, 오늘 설교를 더 명확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제목을 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려면…?’ ‘더 나은 삶은 어떤 것일까?’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이다.
설교 제목: 더 나은 삶은 어떤 것일까?
설교 목적: 성경을 통해서 더 나은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그것이 결국 인간을 본래적인 삶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임을 확인하자. 그리고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네 가지 영역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교우들과 함께 생각해 보자.
설교 개요:
1. 왜 그럴까요? 프로야구, 금요기도회, 관계, 주름살과 흰머리
2. 마음 속의 메아리, 그리고 희망의 무지개
3.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인간의 존재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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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위한 핵심 요약문
지난 주일 대구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있었다. 요새 프로야구에는 투수가 던진 공을 판별하는 기계장치가 도입되어 운영된다. 그런데 그날 심판의 오심이 있었다. 심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해서 모의를 했는데 그 대화가 중계방송의 카메라에 들어가서 시청자들이 듣게 되었다. 그 심판들 중에 한 사람은 퇴출되고 두 사람은 3개월 정직을 당했다. 그들의 대화가 담긴 영상은 수십만의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전달되었다. 사람들은 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분노할까? 왜 사람들은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5년 전 어느 금요일 밤 기도회 시간이었다. 나는 당시에 교회생활 용어사전을 제작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날 금요기도회에서 나는 교우들과 그 동안 정리한 용어사전을 함께 읽고 설명했다. 그때 기도하러 예배당을 찾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날밤 기도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그 사람에게 그날 밤의 기도회는 별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은 단지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까?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발생 기원이 밝혀진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더 깊은 갈망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그 갈망은 하나님을 찾고 만날 때 채워지는 그런 영적인 것이 아닐까? 인간에게 있는 이 영적인 갈망은 왜 있는 것일까?
우리는 서로 좋아하면서도 미워하고 가까워지기를 원하면서도 그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들 간에도 갈등과 전쟁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역사는 보여준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관계를 힘들어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들은 함께 살면서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까? 그 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은 태어나고 청춘시절을 보내다가 나이가 들어 병들고 죽는다. 아름다운 자연도 때가 되면 시들고 퇴색된다. 이렇게 시들어 가는 인생에게 미래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시들지 않는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아름다움은 잠깐 뿐이며, 잠시후면 시들고 썩어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사람은 보편적으로 정의를 원하고,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기를 원한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일까? 아니면 우리 마음 속에서 울려나는 이 네 가지 메아리는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아마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가 아닐까? 즉,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다는 창조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피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셨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복을 주시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신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셔서 그들을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 성경은 창세기에서 들려준 인간의 통치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려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 통치사명을 어떻게 수행하는 지를 가장 잘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처럼 정의롭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며 번영하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보면 더 나은 삶이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삶이며, 그 삶은 결국 더 정의롭고 진실하며 서로를 위하며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을 연습하는 것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이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서로를 격려한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아마 그런 삶, 더 나은 삶, 하나님 나라의 삶을 주시려는 것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