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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7
로마서 9장 16절 [3장 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입니다. 1항은 작정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데,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정하시되 불변토록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작정의 내용이 이러하다면, 다시 말해 영원 전부터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불변하도록 정하신 것이라면 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일단 죄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도 작정하신다고 하면 하나님을 죄의 저자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신다고 할 때 그렇게 일하시는 것이 그분의 속성과 상반되게 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거룩한 분이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구별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할 때 죄를 짓거나 죄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죄를 작정하시되 죄의 저자가 아닌 분으로서 작정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는 완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작정대로 된다면, 그래서 죄조차 작정하신다면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그분은 능력은 죄의 원인자, 죄의 저자가 아닌 분으로 죄를 작정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 앞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자유의지와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신다고 할 때, 그리고 그러한 작정은 불변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인간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의지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작정대로 된다면 그런 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지를 주셨다는 것이고, 주신 만큼 거기에는 강제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바로 그 의지로, 다시 말해 그 스스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작정을 말한다고 해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닌, 오히려 확립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시면서도 죄의 저자가 아니 분으로서 작정하실 수 있는 것이고, 또한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을 제공하는 것도 아닌 방식으로 작정하실 수 있으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작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자에게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이런 작정과 관련해서 2항은 소위 예지예정으로 알려져 있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가르침을 배격하는데, 알미니안주의만이 아니라 몰리노주의 혹은 몰리니즘이라는 중간지식에 대한 반박도 담겨져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존 페스코의 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란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제가 구체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중간 지식(scientia media) 문제를 다루고 있다.”(p.138) 이 부분은 후반부에 가서 살펴볼 텐데, 일단 2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을지라도(행15:18, 삼상23:11,12, 마11:21,23), 그는 미래나 혹은 어떤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어떤 것을 작정하지 않으셨습니다(롬9:11,13,16,18).
먼저 중간 지식보다는 좀 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미니안주의와 관련해서 살펴보자면, 그들의 예정론 핵심은 예지예정입니다. 하나님의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고 주장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이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행위를 실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러한 예지에 근거하여 선택하시는 작정이 예지예정입니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예정론과 대립하는 내용으로 네덜란드 교회의 신학자인 알미니우스와 그 제자들이 주창한 것입니다. 물론 1609년 알미니우스는 사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하네스 위텐보해르트(Johannes Uytenbogaert)를 위시한 43명의 알미니안주의 목사들이 1610년에 모여 다섯 조항의 항론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이하 내용은 정지수 목사의 도르트 회의 최종 결정문 개략 참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영원하며 불변하는 작정(aeterno et immutabili decreto)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구원의 대상과 저주의 대상은 그들의 예지된 미래가 열쇠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대상은 “타락하고 죄악된 인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credituri) 자와 이 믿음과 믿음의 순종을 보존할(perseveraturi) 자”라고 합니다. 특히 이 때 그런 구원의 대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in Christo, propter Christum, et per Christum) 구원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둘째, 세상의 구주(Mundi Salvator)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 죽음으로 화해와 죄사함을 얻고자 모든 개개인(omnibus et singulis)을 위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사함을 즐거워하는 자는 믿는 자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셋째, 구원받는 믿음은 자신으로부터도 자유의지로부터도 아니라고 말하며, 인간이 배도와 죄의 상태에 있는 한,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참된 선을 생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넷째, 모든 선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중생자에 대해 선행하거나 안내하는(praecedente sive praeveniente) 은혜 및 일깨우고 따르며 협력하는(excitante, prosequente et cooperante) 은혜 없이는 선을 생각하지도 의지하지도 행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의 역사 방식은 불가항력이지 않다고 합니다(quod ad modum operationis ejus gratiae attinet, non est ille irresistibilis).
다섯째, 성령의 조력하는 은혜(auxilio gratiae Spiritus Sancti)로 사단과 죄와 세상과 자신의 육체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첫 시작을 저버리고 악한 현세로 돌아가거나, 구원의 거룩한 교리를 잃거나, 선한 양심을 잃거나, 은혜를 잃어버리면 언제든지 구원에서 간과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항론서 내용에 대해 개혁주의자들은 반항론서(Counter-Remonstrance)를 작성했으나 합의점에 이르지 못하다가 마침내 도르트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 때 항론파는 이전의 항론서(1610)를 기반으로 하여 보다 확대된 항론파 입장을 에피스코피우스를 대표로 하여 표명하였습니다(1618. 12. 13, 17). 이 때 에피스코피우스에 의해 언급된 각 항론들의 주제는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1항),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의 보편성에 대해서(2항),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회심에 대해서(3, 4항), 견인에 대해서(5항)”로 분류되었는데, 도르트 회의의 결과물인 도르트 신조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토르트 신조와 관련해서는 기회가 되면 살펴보겠지만, 알미니안주의 예정론의 핵심은 첫째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예지된 미래가 열쇠라는 것입니다. 예지된 미래가 열쇠라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1항의 내용,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작정하시되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그 자신의 뜻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의논에 의해 장차 일어날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불변토록 정하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따라 신앙고백서가 말하고 있는 작정의 내용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강조되는 내용입니다. 절대적일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예지된 미래가 열쇠라고 할 때 그것은 조건적입니다. 조건적이기 때문에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이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행위를 실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러한 예지에 근거하여 선택하신다면 그의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까? 아니면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되 인간의 어떤 조건을 미리 보시고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정론이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도 오류로 가득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자를 위한 것이지만 그의 죽음의 결과 죄사함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있다고 말함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셋째 부분의 경우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넷째 부분과 함께 생각하면 오류가 없다고 할 수 없는데, 넷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능력적이지 않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힘으로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부분에서 분명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저항할 수 있다면 결국 구원은 인간에게 달렸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다섯째 부분에서는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지예정은 말은 예정이라고 붙이고 있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구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경우 이런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그는 미래나 혹은 어떤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어떤 것을 작정하지 않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고자 하시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자신의 의지를 앞세우십니다. 분명 하나님의 속성에는 충돌이 없습니다. 또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단순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지만 하나님은 단순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의 의논을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시편 115편 3절이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그 전능하심을 그가 원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예지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그런 전지함으로 예지하셔서 예정하시는 게 아니라, 누구를 먼저 택하시고 유기하실지를 정하시고 정하신 대상을 보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예지를 앞세우는 구절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해서 예지예정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우리는 예지가 조건과 원인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작정 없는 예지는 없다고 말합니다. 작정은 사역이고 예지는 속성이기 때문에 속성이 앞서야 하지만, 이때 작정은 의지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예지보다 작정,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지가 앞선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속성에는 우선순위가 없다는 측면에서는 예지를 작정 혹은 예정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예지와 작정을 같은 뜻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작정하신 바를 미리 아신다는 측면에서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로마서 8장 29절에서 예지를 앞세웠다고 해서 예지예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로마서 8장 29절에서 예지를 앞세우고 있지만 성경은 사람의 조건이 아닌 작정, 특별히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늘 강조합니다. 그에 대한 한 예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나타납니다. 로마서 9장 16절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1절로 올라가시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도 말씀합니다. 선택과 유기, 그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18절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 그리고 작정 안에서 선택과 유기를 다루고 있는 예정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말미암습니다. 결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을 제공하시지도 않고, 또한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하시지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에 따라, 그런 의지를 미리 보시고서 작정하시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이 예지예정이라면 우리는 그 반대인 예정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나 알미니안주의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음과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은 동일하게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반면, 저들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으로 작정하실 때 작정의 원인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성경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9장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 내용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은혜의 강조와 함께 인간의 공로에 대해서는 배격합니다. 어떤 선행이나 믿음의 공로를 미리 보고서 선택하거나 유기하시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따라 구원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를 보면 이런 내용에 앞서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을지라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많은 분들이 이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한 예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해설로 내놓은 딕스혼 부부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책에 보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발생했거나 ‘장차’ 일어날 모든 일들만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또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흔히들 중간지식-middle knowledg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하여서도 아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 가운데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소위 중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 이미 발생했거나 장차 일어날 모든 일들만이 아니라 변수까지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 때문입니다.
일단 중간지식이란 무엇인지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중간지식과 관련된 주장을 하는 자들을 몰리노주의 혹은 몰리니즘(Molinism)이라고 합니다. 알미니안주의가 알미니우스의 이름에서 나온 것처럼 몰리니즘도 몰리나란 신학자의 이름에서 나온 것인데, 16세기 스페인의 예수회 신학자 루이스 드 몰리나가 주창한 것입니다.
중간지식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지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장 2항에서는 하나님의 지식이 무한하며, 무오하며, 피조물을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에겐 우연이나 불확실한 것이 전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지식에 대하여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대상에 대한 지식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아신다고 말하며, 대상과 관련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능한 것들과 존재하는 것들도 아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대상과 관련해 두 부분으로 나눠 이해하는데, 가능한 것과 존재하는 것입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 신론 부분에 보면 하나님 지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완전히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또한 가능하고 현실적인 모든 것을 하나의 영원하며 가장 순수한 행위로 아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도 있는데 대상에 대하여 가능한 지식과 현실적인 지식, 존재하는 지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한 지식 자체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인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의 의논에 따라 역사하여 작정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지는 가능성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지보다 하나님 지식, 그것도 전지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충돌 없이 세우려고 하는 과정에서 가능성과 같은 말들이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전지하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 전지가 앞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앞섭니다. 이 부분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중간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중간지식이란 무엇인가? ‘모든 가능태에 대한 하나님의 불확정적 지식’과 ‘작정의 필연적이고 확실한 결과들에 대한 하나님의 확정적 예지’ 사이에 놓이는 하나님 지식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가능한 지식과 존재하는 지식으로만 나눈다면, 중간지식은 그 사이에 하나의 지식을 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몰리나는 이런 지식을 주장했는가? 단지 가능하고 필연적인 것 사이에 ‘제2원인들의 자유 안에서 이뤄진 우연적인 행동들의 범주’를 상정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중간지식은 인간의 의지가 어떤 조건들 속에서 어떻게 행할지 다 아시지만, 그 지식조차 확정적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들과 조건들을 미리 정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리처드 멀러, p.671).
쉬운 예로 들자면 예전에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라고 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이쪽을 선택하느냐, 저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내용입니다. 가난한 애인과 결혼해서 사느냐? 아니면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돈 많은 여자를 선택하느냐? 중간지식은 모든 가능한 일과 그런 가능한 일들 속에서 작정하신 일 사이에서 단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 페스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방해 받지 않는 선택, 즉 정말로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이라는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주장한 것입니다(앞의 책, p.139).
알미니안주의의 경우 예지예정이 핵심입니다. 이때 변수에 대한 이해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예지를 기초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보시고자 그를 선택할지, 선택하지 않을지를 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몰리니즘이라는 중간지식은 여러 변수들까지 열어 둡니다. 인간이 여러 가지 가운데 첫 번째를 선택하면 그 선택에 따라 작정된 내용이 펼쳐지고, 두 번째를 선택하면 그 선택에 따라 작정된 내용이 펼쳐지는, 그런 식으로 다양한 길들이 있지만 인간의 결정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변수에 대하여 어떤 신적인 결정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지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런 몰리니즘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받아들이는 입장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체를 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가 늘 나타납니다. 그런 신앙고백서가 몰리니즘이라는 중간지식을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시간 제3장 1항에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강제성이 제공된 것도 아니며, 제2원인들의 자율성이나 우연성이 제거된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피조물의 의지, 제2원인들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 2항의 진술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을지라도...”라는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다는 내용으로 볼 수 없습니다. 딕스혼 부부의 책만이 아니라, 존 페스코의 책에서도 이런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들은 비록 이 속성을 단순히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 아래에 두고 있지만 중간 지식이라는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마태복음 11장 21, 23절을 증거 본문으로 인용하는 것이 그 증거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신앙고백 3장 2항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존 페스코는 곧바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자들은 중간 지식이나 예견된 믿음에 근거한 예정을 거부하고 작정의 절대적 성격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신앙고백 3장 5항을 인용하는데, 만약에 번역 자체에 오류가 없다면 그 스스로가 상충되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알미니안주의만이 아니라 몰리니즘이라는 중간지식도 비판하는 입장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몰리니즘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표현했다면 신앙고백서 자체가 상충되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몰리니즘이라는 중간지식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2항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을지라도...”라는 이 표현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는 내용들이 있지만, “...그럴지라도 그는 미래나 혹은 어떤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어떤 것을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내용으로 봐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존 페스코나 채드 반 딕스혼의 경우 신학자들입니다. 특히 채드 반 딕스혼의 경우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하여 손꼽히는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총대들이 3장 2항의 고백을 내놓을 때 어떤 의미로 내놓았는지는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대들에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신앙고백 전체적인 내용에 근거해서, 더 나아가 성경의 진술에 따라 중간지식을 인정할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총대들이 인용하고 있는 마태복음 11장 21절과 23절을 확인하고 정리하고자 하는데, 거기 보면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21),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23)고 말씀합니다. 이때 ‘행하였더라면’이라는 가정문을 쓰고 있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실 수 있을지라도’라고 쓰고 있지만, 빌헬무스 아 브라켈이라는 신학자의 경우는 이 부분에 대하여 과장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실을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과장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라는 겁니다(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 1, p.295). 그러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런 본문에 대하여 이렇게 보는 일들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그런 이해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을 일으킬 수 있는가? 없습니다. 전지하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의 뜻의 의논을 따라 작정하시고 예정하십니다. 그분의 의지가 앞섭니다. 그분의 의지가 앞선다고 할 때 결코 예지에 기초하여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가능한 지식에 기초하여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변수가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지식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불변하게 작정하실 뿐입니다. 비록 인간의 의지가 있고, 또 제2원인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도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고, 제2원인도 하나님의 의지 안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의지를 말할지라도, 제2원인에 대해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지와 상반되게 나타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는 말씀, 이것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조금 뒤에서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이해, 작정 안에서 예정에 대한 이해는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와 의지 안에서 이해해야 할 내용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