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문화사(115)-亥安(해안, 펀치볼)
‘펀치볼’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은 아주 특이한 지형을 가진 지역으로 명성이 높다. 동남 방향으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작고 좁은 골짜기 하나가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유일한 통로일 뿐 온 사방이 높은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바깥세상과 분리된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분지 지형도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막혀 있는 곳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고립된 공간이 바로 해안 지역인데, 고산(高山) 지역이어서 상당히 춥고 습하기는 하지만 땅이 매우 비옥해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여겨졌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토착민들은 텃세가 아주 심하고 매우 흉포해서 악명 높은 지역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되었다고 혹평한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20세기의 해안 지역은 군사 분계선과 맞닿아 있는 곳이면서 국가 안보상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어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이런 제한이 겨우 풀리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나 여전히 오지 중의 오지로 인식되어 있다.
‘해안’의 별칭이라고 할 수 있는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은 남북이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6.25 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주둔했던 미군의 종군기자가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펀치볼’은 영어인데, 물, 과일즙, 향료 등에 포도주나 다른 술을 넣어 만든 음료인 ‘펀치’를 담기 위해 움푹한 형태로 만든 커다란 그릇을 지칭한다. ‘해안’ 지역의 지형상 모습이 바로 펀치볼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여서 불렀던 것인데,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서 원래의 지명보다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펀치볼’과 ‘해안’이라는 땅이름의 뜻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두 명칭이 모두 이 지역의 지형상 특징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안면은 사방이 완전히 막힌 특수한 형태의 분지 지형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땅이름 역시 매우 특이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亥安’이라는 지명의 유래와 뜻에 대해 양구군에서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海安’이라고 썼는데, 이곳에는 주민들이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뱀이 많았다. 조선 시대 초에 주민들이 시제(時祭)를 지내면서 유명하신 스님 한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그 스님에게 지역 사정을 소상히 말하고 뱀을 없앨 방도를 구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이 뱀과는 상극인 돼지를 말하며 ‘海’를 ‘亥’로 바꾸어 쓰면 되겠다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지명을 ‘亥安’으로 바꾸고 마을에는 돼지를 많이 기르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신기하게도 뱀이 없어져서 주민들이 집 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모든 자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이해해 보려 해도 돼지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과 특성은 아무리 해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海安’을 ‘亥安’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매우 희박한 설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지명 유래는 그야말로 전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민간 어원설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인 시간을 특정하기는 어려운 애매한 시대를 제시한 점(조선 초기),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해결책을 구하는 것(승려), 사람들이 공감하기 좋은 정보를 활용하는 것(亥-돼지), 믿음을 굳건히 하는 물증을 제시하는 것(뱀) 등은 모두 민간 전설이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돼지’라는 뜻으로 잘 알려진 ‘亥’의 원래 뜻이 ‘풀뿌리’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지명 유래의 진실성은 완전히 무너져 버리고 만다.
‘풀뿌리’라는 의미를 기본으로 하던 이 글자에 ‘돼지’라는 뜻이 붙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로 한(漢)나라 시대에 탄생한 사주명리학(四柱命理學)에서 시간이나 방위 등을 표시하기 위해 12가지 동물을 구성요소로 하는 십이지(十二支)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는 ‘돼지’라는 동물을 맨 끝에 두었다. 열두 번째 동물인 돼지를 나타내기 위해 ‘亥’를 가차(假借)하여 사용했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사주명리학이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돼지’라는 뜻이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그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亥’가 ‘돼지’라는 뜻을 가질 경우는 십이지의 마지막 글자를 지칭할 때뿐이므로 이것을 기본적인 뜻으로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海’를 ‘亥’로 바꾸어 지금의 지명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비약이 아주 심한 주장이 될 수밖에 없음이 한층 명확해진다.
‘亥’는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부터 나타나는데, 초기에는 머리 꼭대기에 볏이 달린 새의 모양이 글자의 위에 있고 아래에 뿌리, 혹은 돼지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다가 새 모양이 사라지고 아래의 것만 남았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글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식물의 뿌리로 보는 견해와 돼지의 모양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데, 설문해자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亥’의 달인 음력 10월은 추운 기운이 왕성한 시기로 음(陰)이 강하고 양(陽)이 가장 약한 시기이다. 양은 만물을 키우는 근원, 혹은 근본인데, 이것은 땅 아래에 있는 식물의 뿌리처럼 둘러싸여 숨겨져 있다”라고 하면서 ‘亥’를 ‘풀뿌리(荄)’로 풀이하고 있다.
음력 10월을 해달(亥月)이라고 하는데, 자연의 순환 과정에서 만물은 이때가 되면 시들어 죽으면서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음의 성질을 가진 추운 기운이 매우 충만한 때로 양의 성질을 가진 따뜻함은 가장 작아져 묻혀 있으면서 음을 뚫고 나올 준비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이론들이 문화적 현상으로 반영되어 ‘亥’는 땅속에 있는 뿌리(根), 혹은 알맹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면서 ‘숨겨져 있다’, ‘둘러싸여 있다(懷)’, ‘감추어져 있다(藏)’, ‘품고 있다’, ‘장벽에 막혀 있다(該閡)’, ‘핵심(核)’, ‘안겨있다’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었고 그에 따라 쓰임의 폭도 매우 넓어졌다.
회의자(會意字)인 ‘安’은 세 개의 구성요소가 아래위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글자의 초기 형태는 집 모양(宀, 집 면)이 가장 위에 있고, 여자(女)가 중간에 있으며 맨 아래에는 발(止, 멈출 지)의 모양이 있었다. 집, 혹은 방은 위험하지 않은 공간을 나타내며, 여자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상징한다. 발 모양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 멈추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글자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바깥으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서 머문다는 의미를 기본으로 한다. 누군가가 집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이므로 ‘安’은 편안하다, 안전하다(安全), 즐겁게 여기다(樂意), 앉다, 고요하다(靜), 머물다(留), 잘 지내다(安寧), 안(內) 등의 의미를 가지는 글자로 쓰임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런 뜻과 기능을 가지는 두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亥安’이라는 땅이름이 가진 뜻은, ‘온전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편안한’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곳만큼 사방팔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은 없다고 할 정도로 특이한 지형이기 때문에 이런 지명을 붙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인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어머니 품에 안겨서 보호받는 아이(懷子)처럼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지는 것이므로 안정, 안심, 편안, 안녕, 고요, 숨음, 숨김 등의 뜻과 느낌이 담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해안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보호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부르기 좋은 우리말 땅이름을 붙인다면 ‘뫼안골’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첫댓글
한라산 백록담 분화구와 산굼부리
분화구를 보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