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숙은 평양시 미림정(美林町)에 있는 모리자와 구미(森澤組)라는 기와공장의 공장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1944년 3월에 처음으로 부모형제를 떠나 고향을 뒤로 하고 천리 길을 떠났다. 동기동창 양형배(梁亨培), 홍태선(洪泰善), 임성규(林成圭)와 함께 그 곳으로 갔다. 외숙모는 어머니가 중매한 고향분이어서 우리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외숙의 도움으로 평양 사동에 있는 평양농업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중학교육을 4년 받고 대학으로 진학했다. 나의 목표는 평양사범학교였다. 소학교 6학년 때 담임하셨던 권오석(權五錫) 선생님이 그 학교 출신이라, 이미 그 학교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중학생활은 2년을 못 채우고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왔다가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해방을 맞이했다. 덕분에 나는 8ㆍ15 해방을 고향에서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38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의 자유로운 내왕이 어려워지자, 평양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서 나의 진학의 꿈은 또다시 깨지고 말았다. 하늘이 캄캄해졌다. 절망이었다. 그래도 나는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뒤떨어질 수 없다는 각오를 수없이 다졌다.
부모님의 권유로 다시 서당에서 사서(四書: 大學, 中庸, 論語, 孟子)를 배우면서, 동시에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강의록으로 중학교 전과정을 독학했다. 비록 큰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문맹퇴치의 일환으로 야학당(夜學堂)을 세워, 고향에 있는 남녀 청년들과 주부들까지 모아서 한글공부를 가르쳤다.
뒤에 생각하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다. 만일 내가 북한에서 해방을 맞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혹 지금까지 북한에서 살아야 했다면, 어찌 목사가 될 수 있었겠으며, 어찌 하나님의 일을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고향친구들과 함께 조국광복기념(1945년).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