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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본(原理原本) - 제1권
[17]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섭리하신 근본의의(根本意義)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기 고향 산천(山川)과 정든 향토정(鄕土情)과 부모에 대한 정리(情理)라든가 친척에 대한 정리라든가가 아브라함에게는 큰 고통의 대상이었으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노정에는 이 모든 것이 문제되는 곳에는 시작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정(情)은 하늘 정(情)을 이루고자 하는 데는 반대되는 직접행동(直接行動) 여하(如何)를 도약(跿躍)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것을 문제로 하지 않고 갈대아 우르를 출발하는 그 행동은 과연 인간으로서 찬양하여야 할 문제인 동시에 사탄에게 대한 복수적(復讐的)인 하나님 뜻을 성사(成事)하는 터의 행동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기본 뜻을 아브라함으로부터 본격적 출발을 보고자 함이었다. 사탄은 아브라함을 빼앗기고는 아브라함에 대한 반복(反復) 공작(工作)을 시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 성사를 파괴하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하여 축복하려 할 때 아브라함 자체에 대한 축복보다도 뜻을 중심하고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뜻이었다.
아브라함이 복(福)의 기관(機関)이 될 축복을 하여 주며 이로 하여금 큰 족속(族属)을 이루리라고 축복하여 주마하신 뜻을 받들어서 고향산천(故鄕山川)을 출발하는 아브라함 자체에는 하늘의 작업 시작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대신 뜻을 이루는 기본행동(基本行動)의 시작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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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빼앗아 낸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전체의 목적을 두고 축복과 약속에 대한 새로운 결정적 언약(言約)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결정적 언약을 세우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족속(族属)에게 잡혀간 롯을 다시 찾아와 승리한 후의 시작이었다.
이와 같이 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민족과 대립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뜻을 세울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세울 수 있는 동시에 벌써 하나님이 미워하는 나라가 원수적 입장에서 하나님 편 쪽에 섰기에 결정적 언약 성사를 시작함이 있었다.
이 언약(言約)이라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민족건설(民族建設)의 시작이며 이를 확대해서 국가건설로, 그리하여 세계복귀의 근본의의(根本意義) 뜻을 두고 하는 언약의 전부의 시작이, 즉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는 포함되는 근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15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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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창세기 15장 2~13절) |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얻어 기업(基業) 삼을 것을 무엇으로 아리이까?
하니 네가 나를 위하여 나에게 삼 년 된 암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산양 한 마리와 삼 년 된 면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수를 바치라 하니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 취하여 그에 쪼개서(割) 우(右) 좌(左)에 놓고 그 비둘기는 쪼개지 아니하여 제단 위에다 놓고 제사를 드리니 그 제물 위에는 독수리가 날아와서 앉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는 정녕(丁寧) 알라. 네 자손이 객(客)이 되어 사백 년 동안 고역(苦役)하리라 한 노여움(怒)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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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물(祭物)은 무슨 제물이었는가 하면 그 후손에 대한 전부(全部)에 제물(祭物)의 표시물(表示物)이었다. 바로 그 제물이 전(全) 하나님의 뜻이 되는 백성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며 전인류를 찾아야 할 하나님의 근본목적(根本目的)을 표시한 대신적(代身的) 제물이었다.
이 제물 위에 독수리가 내렸다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벌써 사탄의 침입을 증거하는 사실이다. 즉 아브라함 하나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할 때 사탄은 뜻을 깨뜨리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자신에게 결과적 행동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제물(言約祭物)을, 즉 전(全) 하나님의 목적을 두고 예약적(予約的) 제물(祭物)임에 틀림없다. 이 제물 실패하면 다시금 사탄한테 침입노정(侵入路程)을 양보하는 행동인데 아브라함의 전(全) 뜻을 합당한 뜻에 맞게 제물을 헌제(献祭)하지 못함은 하나님의 계획의 뜻은 벌써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을 표시하는 중대한 것이 이 제물(祭物) 헌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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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브라함 자신은 이 중대한 제물을 드리는 자신(自身)으로서 제물을 전부 쪼개지 못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제물을 쪼개는 것은 사탄편 사람과 하늘편 사람이 있다는 전인류의 표시였다.
그런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소유된 자손과 사탄 소유된 사람과 갈라서 섭리(攝理)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전의의(全意義)였는데 쪼개지 않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 자손될 약속과 언약의 성립(成立)을 보는 제물에 완성한 성립을 보지 못하고 마는 사실이니 다시금 그 자손까지 사탄이 침입할 수 있는 터를 지은 것이 시작을 보게 되어 사탄은 자기편(自己便)쪽 표시로 가르지 않는 제물 비둘기를 취(取)하려고 하여 제단(祭壇) 위에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뜻한 전체 목적은 사탄이 다시금 차지하는 뜻으로써 제물헌제(祭物献祭)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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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대 제물은 무슨 표시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진리(眞理) 목적(目的) 중심(中心)은 소생(蘇生)에서 장성(長成)으로 장성(長成)에서 완성(完成)으로써 한 제물(祭物)을 통하여 표시한 바이었다. 즉 비둘기를 드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 소생(蘇生)을 표시함이고 양을 드리라 하심은 장성(長成)을 표시함이고 소를 드리라 하심은 완성(完成)을 표시하는 중대제물(重大祭物)이었다.
만일 이 제물의 뜻에 합당하게 헌제(献祭)하였으면 애급 사백 년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없었을 것이었는데 사백 년 고역이라는 것은 이 헌제물(献祭物)의 중대한 실패를 고(告)하는 바의 사실이다. 사백 년 연대의의(年対意義)는 나중에 논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약 제물의 실패를 보니 그것은 자손을 사탄한테 빼앗기는 표시로 되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자손 중에도 사탄이 침입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근본목적(根本目的)은 다시금 이루지 못하게 된 원인으로 기인(基因)이 되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라함 자손에게 사탄 침입의 길을 막으려니 대신(代身) 제물(祭物)은 사탄한테 빼앗기게 되었기에 그것은 즉 아브라함 자손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뜻 성사(成事)를 본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니 사탄한테 제물 드린 것과 같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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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아브라함도 사탄 소유의 근거점(根據点)이 되어 전체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니 다시금 하나님은 약속제물(約束祭物)은 빼앗겼지만 아직 실체 자손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려니 하나님은 부득이 또 다른 입장을 취하여 아브라함에 따르려는 자손에 대한 사탄 침입을 막으려 함에 하나님은 그 자손의 시작인 한 자체가 사탄과 하나님과의 직접 통할 수 있는 문제의 요구물(要求物)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식 이삭을 취하여야 하겠고, 사탄은 벌써 이삭에 대하여서 취할 수 있는 예약제물(予約祭物) 대신제물(代身祭物)을 자기가 소유하였던 것이기에 사탄 역시 그 제물 대신 되는 실체인 이삭도 요구물(要求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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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순종(順從)을 세워 하나님 편으로 전체 자손을 돌리려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실체 자식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문제를 제기(提起)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의 즉 아브라함으로 모리야 산상(山上)에서 제물로 이삭을 드리려는 근본의의(根本意義)는 여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뜻 중심하고 순종하면 사탄은 떨어지고 하나님 편으로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대신(代身) 제물(祭物)을 잃어버린 것을 실체로써 찾는 모양으로 헌제(献祭)의 명령에 순종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런 원리적 문제는 알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에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나 예약(予約) 대신 제물 헌제 때의 실패가 전 자손에게 4백 년 동안 이방에서 고역(苦役)의 뜻을 알고 나니 이번에 또 실패하면 말할 수 없는 큰 곤란한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을 아는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게 되어 뜻대로 번제(燔祭)로써 자식을 드리는 확고한 그 입장에서 사탄은 목적상대(目的相対)인 이삭에게서 물러가게 되는 바의 시작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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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사실의 근본 뜻을 오늘날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이나 성경에도 아브라함의 실패한 구절을 알게 하는 구절이 있으니, 즉 창세기 22장 12절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 그 자손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말라. 이가 이 독자(独子)를 나에게 바치기를 망설이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 아노라 하심이다.
이 성경 구절(句節) 중에 이제야 하는 그 구절이 즉 전번 실패를 경고하는 동시에 뜻 계승(継承)이 이루어짐을 고(告)함이었다. 이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노정(路程)을 찾아 나가는 그 도중에는 예약(予約) 대신 제물(祭物)로 실수한 현물로 받은 아브라함 자손에게는 4백 년 동안 원수 앞에 고역(苦役)해야만 본래의 노정에 들어설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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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애급 4백 년 고역은 필연적 과정이었다. 진리(眞理)를 찾으려니 진리에는 소생(蘇生)의 단계가 있고 장성(長成)의 단계가 있고 완성(完成)의 단계가 있는 것이니 하나님도 이 찾고자 하는 뜻을 한 진리노정(眞理路程)이니 이와 같은 3대 제물이 요구되었다.
이 제물적 사명에 소생(蘇生)부분은 즉 구약시대를 나타내는 표징(表徵)이다. 소생(蘇生)하면 장성(長成) 완성(完成)으로 진행하려 하던 것이, 인간이 절대 순종하지 못함으로 분립(分立)을 자아내는 것으로 전개할 것이 나타나는 증거로 되어 있다. 한 제단(祭壇) 위에 3제물(三祭物)은 한꺼번에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 근본 뜻이었다.
여기에 소생역사(蘇生役事)는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担) 시작 기초를 잡는 것이고 장성(長成)은 예수 오셔서 근본복귀(根本復帰)의 복수(復讐)의 예로 해와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고 완성(完成)은 예수를 중심하고 전인류와 합(合)하며 또 하나님과 합하여서 전체 근본창조목적(根本創造目的) 달성을 보고자 함이 드러난 제물(祭物)의 의의(意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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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중에 비둘기는 소생(蘇生) 단계를 표시함이니 구약시기(旧約時期)를 말함이고 양은 장성(長成) 단계이니 신약시기(新約時期)를 표시함이고 암소는 완성(完成)이니 재림(再臨)을 말함이다.
장성(長成)과 완성(完成)과 함께 하려는 뜻은 사람 불순종(不順從)과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니 재림(再臨)이라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암소는 완성(完成)의 표시이었는데 왜 암소였던가? 즉 완성하려면 해와 한 존재가 문제되는 중심점이니 암소는 해와를 표시하는 뜻이다.
사사기 14장 18절 이하에 만일 너희가 나의 암소로 밭을 갈지 아니하였더라면 능히 나의 수수께끼(謎語)를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처(妻)를 암소로 표시하여 말함도 예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암소는 해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해와가 즉 완성할 수 있는 목적상대(目的相対)였다. 간단한 제물 내용을 소개하였지만 다시금 본론으로 들어가서 보면 사탄은 이삭이 실체(實体)에서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금 그 자손에 대하여 대립적(対立的) 태도는 물론이며 실체자손(實体子孫)의 침입(侵入)의 길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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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한 존재가 예약(予約) 상징제물의 침입을 보였기에 그 이삭도 실체헌제(實体献祭))에 순종하지 않을 것은 벌써 시작할 가능성이 잘못하면 생길 것을 사탄은 바라보고 따르게 되었다.
그것은 제물을 자기 것으로 하였던 사실이 있으므로 사탄은 여전하게 그 후손에 대하여 대립성(対立性)을 갖고 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삭이 자식을 낳으니 쌍둥이인지라 즉 에서와 야곱이었다.
이 쌍둥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실패로 인한 제물에 원치 않은 존재의 침입이 있었던 것이므로 이 실체자식(實体子息) 이삭이 문제되어 또다시 찾았으나 이삭의 자식한테 대해서는 사탄 역시 사탄이 찾고자 하는 한 터를 양보하고 말았던 실수가 있었으니 그 자식되는 쌍둥이는 원수적 표시의 소유자(所有者)와 하나님적 표시인 소유자가 한 복중(腹中)에 있음을 표시함이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은 뱃속에서부터 싸웠음은 이와 같은 근본적 배치(背馳)의 존재니 뱃속에서부터 싸운 것이다. 자식을 낳으니 에서와 야곱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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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원수 사탄의 대표요, 야곱은 하나님 편적 대표이었다. 즉 에서는 아브라함이 지난번 제물 실패의 씨요, 다음 야곱은 잃어버린 이삭을 실체로써 찾아서 제물까지 찾아 세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제2차적 존재인 야곱을 통하여서 뜻을 세우고자 함은 근본(根本)을 그와 같이 되었기에 빼앗아서 이루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니 하나님은 에서의 축복을 야곱에게로 돌리는 근본적 뜻은 여기에 있음이다.
그래서 제물 실패가 었었으면 이삭 자식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에서와 같은 존재는 없었어야 할 존재가 생기게 된 것은 다시금 사탄을 분립(分立)하게 하여 하늘 편과 사탄 편을 분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과 다시는 아브라함의 자손한테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므로 이와 같은 표시적(表示的) 사실로써 야곱이 에서의 장자(長子)의 직분(職分)을 빼앗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다시금 예수가 와서 원수 피를 받은 전인류를 빼앗아 넘길 것을 예고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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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기 때문에 이 한 사실이 근본을 밝혀주는 것인 동시에 뜻을 이루는 한 표징(表徵)으로 되는 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言約)은 전체 목적의 표시인 약속(約束)이었기에 이런 의미에 한 분기(分岐) 존재(存在)가 이삭이니(이삭부터이니) 그 자손 에서와 야곱의 사이에 되어진 실상(實狀)이었다.
그런 결과의 영향을 받고 낫기에 맏이 자식은 하나님 앞에 사랑받지 못한 사실의 원인이니 창세기(創世記) 전면(全面)에서 보여주는 사실이다. 예를 찾으면 이삭, 야곱, 요셉, 에브라임, 아벨 등의 사실은 이와 같은 사탄 피를 받고 태어났기에 맏이 자식은 미움의 상대(相対)였다.
여기서 뜻 성사(成事) 출발의 후손은 야곱을 중심하고 택한 백성 12형제요 12지파로 시작의 출발은 야곱부터 시작하게 한 것은 근본의의(根本意義)를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과 사탄이 바라는 존재입장(存在立場)이 아담과 같은 두 상대 격 입장이었기에 근본출발(根本出発)을 못했다. 133
즉 이삭부터 애급 출발이 아니고 야곱에부터 되는 것은 이상(以上) 해설 중 원리로써 명백한 사실이다. 이리하여 택(択)한 하늘 백성이 되어야 할 그 근본은 애급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은 뜻 성사(成事)의 첫 출발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부터 하나님과 사탄이 분립되어 복귀의 출발은 시작된다. 이것이 즉 하나님적 분담(分担) 책임성사(責任成事)의 출발의 시작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근본이 되어 즉 표본(標本)이 되어서 장성(長成)과 완성적(完成的) 사명(使命) 분담책임자(分担責任者)의 본(本)이 되어야 하는 제1차 하늘적으로 하나님 직접 사명(使命)하고자 하는 기초(基礎)는 시작되는 것인 동시에 제물(祭物) 표시(表示) 소생(蘇生) 과정의 발로(發露)였다.
그러므로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귀(復帰)까지는 예수님 오셔서 할 기본 표시 공작(工作)과 같은 모양(貌樣)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한 목적을 한 완성으로 볼 수 없는 한 터의 작업이니 애급서부터 솔로몬 왕까지는 제2차 완성하여야 할 존재가 나타나서 이루어야 할 한 예고적(予告的) 표시(表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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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예수 오셔서 애급서부터 가나안 복지(復地)로 가는 모양으로 우리 인간 이상(理想) 복귀의 땅으로 찾아 들어가는 한 사명적(使命的) 기초(基礎) 표시(表示)로 전개하고자 함의 의의(意義)를 알아야 한다.
애급서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예수의 노정을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근본 뜻이다.
그리하여 타락시킨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担)에 대하여 시작하는 것이 즉 모세를 세우심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신(代身)하고 바로는 사탄을 대신하고 나오게 되었다.
모세가 택(択)함을 받은 원인은 원수가 이스라엘 백성을 극도(極度)로 학대하는 동시에 강제(强制)로라도 전멸(全滅)시키고자 하는 행동으로 나가게 되어 고역(苦役) 중 원수의 사람과 즉 애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것을 죽이는 모세는 본래 애급 궁중(宮中)에서 장성(長成)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원수시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변하지 않는 지조(志操)는 과연 하나님이 택하시는 귀(貴)여운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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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급 궁중(宮中)에서 자라났으나 애급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백성으로 변함없는 그 자체였다. 이 자체는 애급 원수의 모든 제일 미워하는 자체인 동시에 사랑받고 자라난 존재였다.
이 자체가 애급 궁중에서 나왔으니 애급과는 다시 결탁(結託) 안 하는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위에 애급 사람에 대하여 증오심(憎悪心)을 가지고 있는 확고한 존재이니 하나님 택한 택한 바가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애급 왕(王) 바로를 대하여 작업을 하게 하기 위한 시작(始作)을 명령하게 되었다. 그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는 모세는 자기 자신이 애급 백성 앞에 믿게 할 수 있는 증거(証據)를 요구(要求)하니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는 첫 이적(異蹟)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하여 조상에 나타났던 하나님을 알게 하여 뜻에 순종(順從)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손을 품에 넣어라 하심에 손을 품에 넣으니 문둥병이 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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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다시금 품에 넣었다가 꺼내라 하심에 꺼내니 나은지라. 그다음에는 듣지 않거든 강물을 가져다 부으라. 그리하면 피가 된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다음에는 모세는 말 잘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려 할 때 이런 특이한 기적을 보여주었냐 하면 하나님이 장차 하시고자 하는 사실의 터가 되는 행사이니 그 표시되는 모든 뜻은 전부 예수 오셔서 할 목적성사(目的成事)의 한 상징(像徵)인 것을 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할 원리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지팡이라는 것은 대신(代身) 의지자(依支者)를 표시함이었다. 즉 나를 대신해서 보호할 것을 말함이고 모든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합당치 않은 것을 쳐서 뜻대로 이루게 하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즉 예수가 우리의 모든 생명에 대하여 보호(保護)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뱀을 보여주심은 뱀으로 유혹(誘引)한 표시적(表示的) 존재로 해와에게 역사(役事)한 것을 보여주었으니 예수님이 오셔서 뱀과 같은 역사로 사탄 수중(手中)에서 빼앗는 역사를 하여야 할 하늘 뱀적 표시를 예고(予告)하기 위하여서 착수(着手)할 것을 의미(意味)하심이었다.
사탄 네가 뱀 가지고 했으니 나도 뱀을 가지고 예수로 역사(役事)한다는 것이 근본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모세 뱀은 예수는 사탄 뱀을 잡아먹어 승리할 것의 예고적(予告的)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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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손을 가슴에 넣은 것은 첫째 번은 사탄의 유혹 받아 사탄 품에 안긴 해와의 행동은 인간을 죽이는 역사(役事)였으나 다시금 손을 품에 넣으심은 예수 오셔서 해와를 품는 사실은 나병과 같은 죽음(死) 중에 소생(蘇生)하여 산다는 표시로 손의 병(病)이 나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제1차 품은 것은 사망(死亡)이나 예수 제2차 품으심은 생명(生命)이라는 영생(永生)의 시작을 예증(例證)한다.
강물로 피가 된다는 것은 물은 생명세상(生命世上)을 표시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 중에 처한 존재들이 예수 오셔서 피로 되는 생명(生命) 주입(注入)을 시작한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었다.
말 잘하기 요구(要求)는 상대(相対) 목적(目的)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책임중개체(責任仲介体)이니 말 잘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창조물(創造物) 전부(全部)를 말씀으로 지은 것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의 상대(相対)의 이상적(理想的) 실체(實体)를 다시금 성사(成事)한다는 뜻을 표시(表示)하는 것이었다.
즉 말씀은 창조목적(創造目的) 만물의 실체를 말하심이다. 아담 해와를 찾는다는 것과 전인류(全人類)와 만물(萬物)을 찾는다는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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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세가 요구하는 전부를 허락하시고 애급으로 돌아가라 하심에 모세는 자기의 처자(妻子)를 데리고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애급으로 돌아가 바로에게 요청하기를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 장자(長子)라 하라.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 그래도 바로가 놓아 보내지 않으면 장자(長子)를 죽게 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돌아오는 도중 한 숙소(宿所)에서 여호와가 모세에게 나타나 모세를 죽이고자 할 때 모세의 처(妻)는 아들 고추의 양피를 베여 던져서 죽음을 면하게 하면서 처(妻)가 말하되 당신은 피 흘리는 남편이다 한지라 그것은 할례(割礼)를 한 연고(緣故)더라.
여기에 야곱의 어머니가 야곱과 합하여 모의하여서 뜻 성사한 것과 같이 모세의 처자 즉 모자가 협조하여 모세를 살리는 행례(行礼)의 일을 한 것이었다. 그 근본의미(根本意味)가 무슨 뜻인가 하면 모세는 즉 할례(割礼)를 성사(成事) 못하면 죽는 것이고 성사하면 산다는 중대의미(重大意味)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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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심은 무슨 목적이냐 하면 할례(割礼)의 근본 뜻을 완성하는 실체인데 그것은 그 모친(母親)과 힘을 합쳐 협조하여서만 성립되는 근본의의(根本意義)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아내와 자식이 힘을 합하는 일이 없으면 뜻 성사(成事) 못 하고 예수는 죽는 십자가(十字架)가 있다는 예고적(予告的) 사실을 표시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맏이인 장자(長子)로 뜻을 이루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모세가 살아야만 될 것이었는데 모세 한 생명은 전체 이스라엘의 대신생명(代身生命)이고 전체 이스라엘의 대신존재(代身存在)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모세에게 있어서 할례(割礼)가 없으면 모세는 물론이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도 전부 사망하는 표시적(表示的) 행사 치레였다.
그러므로 모세 처자(妻子)가 할례(割礼)가 있었기에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생사(生死)의 중요문제(重要問題)를 결정짓는, 즉 우좌(右左)하는 근본 문제 해결의 성사(成事) 책임을 표시한 것이다. 이 입장에서 모세 아내와 자식의 힘을 합한 큰 승리적 조건이 성립(成立)을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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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뜻을 세우지 못하였으면 모두 실패(失敗)할 수 있는 곤란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 한 모세의 아내와 자식의 한 할례(割礼)가 전체 택한 백성에게 대한 맏아들 장자의 명분(名分)을 완성하게 하는 근본자체(根本自體)가 즉 할례(割礼)였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모친(母親)과 힘을 합해 협력하여 할례성사(割礼成事)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었으나 예수님은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적(失敗的) 근본(根本)이 있었음은 누구에게나 미지(未知)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친(母親)이 뜻을 받들지 못하였기에 예수는 모친에 대하여 갈릴리의 가나에서 이적(異蹟)을 볼 때 여인이여! 하신 말씀의 근본의의(根本意義)가 있음이라. 그 외 모친에 대하여서 여인이여 너와 나와 무슨 상관(相観)이 있는가! 한 말씀 등의 시작은 예수는 뜻을 이루는 제1차 시작의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십자가상(十字架上)의 죽음의 시작의 연관성(聯關性)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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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세가 하나님 앞에 뜻을 이룰 수 없는, 자기 삶을 가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사실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하시는 노정(路程)에 숨어 있는 원리목적(原理目的)은 누가 알 수 있으랴!
여기에 할례(割礼)에 대하여 말해 보기로 하자
본래 성경에 할례(割礼)라는 명사가 생기게 된 것은 타락(墮落)에 기인(基因)된 것이 사실인데 본래 해와가 사탄 피를 받고 아담까지 타락되었기 때문에 할례를 해야 하는 중심문제(重心問題)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주관하여야 할 해와를 주관하였다면 타락조차 방지하였을 터인데 해와한테 주관받고 나니 타락된 것이었다.
즉 아담 양부(陽部)를 통하여 전체 타락은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책임은 아담인 남자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남자되는 아담이 지배받고 나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로 됨에 타락의 시작의 성립을 보게 한 실체는 즉 남자의 양부(陽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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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두움에 피를 받아들인 그 자체이니 어두움에 피를 다시금 빼는 사실을 표징(表徵)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자손은 할례를 해야만, 즉 어두움의 피를 먼저 받아서 죽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써 살려면 그 자체로써 사망의 피를 빼야만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 시작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규례(規礼)로 세움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주관성을 다시금 복귀(復帰)하는 남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할례에는 마음의 할례가 있고(신10/16), 육신할례가 있고(창17/10), 만물할례가 있다(레19/23).
할례는
1. 죽음의 피를 빼는 표시
2. 주관성을 다시 찾는 표시
3. 근본 뜻에 자녀의 길을 찾는 약속의 표시
이상과 같은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 즉 아브라함에 하나님의 명령하시던 근본의미(根本意味)라는 것을 인간은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미지(未知)의 것이다. 또 몰라야 하는 것이 한 원리(原理)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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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세의 이 행해진 할례(행례·行禮)는 모든 이스라엘에 대하여 짊어진 전목적성사(全目的成事)를 표시함을 다시금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모세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는 예수가 오셔서 할 사명적행로(使命的行路)의 전형(前形) 표시(表示)로 그의 모든 일은 모두가 따라 해야 함을 나타내는 표징(表徵) 된 바라는 것이 원리(原理)로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사명분담책임(使命分担責任)의 과정은 예수의 길의 기초(基礎)가 되겠으니 같은 뜻의 목표표시(目標表示)로 만사(萬事)는 드러내어 나가는 것이 근본의의(根本意義)였다.
또 지팡이라는 것은 대신 의지자(依支者)를 표시함이었다. 즉 나를 대신 보호할 것을 말함이고 모든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합당(合當)치 않은 것을 쳐서 뜻대로 성사(成事)하게 하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즉 예수가 우리의 전생명(全生命)에 대하여 보호(保護)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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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에게 아론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속죄적(贖罪的) 행례(行例)의 대표자로 세우심은 모세를 협조하여 한 목적 뜻을 이루시고자 하는 시종(侍從)이었다.
즉 백성에 대신속죄책임(代身贖罪責任) 역할을 하시는 해와 자체로 될 성신(聖神)과 함께 예수의 뜻을 받들어 모시고 따르게 하여 인간에 대하여 직접 속죄책임(贖罪責任)을 할 것을 표징(表徵)함이었다.
모세에게 한 대신(代身) 협조자(協助者)가 없다 하여 아론을 준 것은 아니지만 말씀(言)의 대신을 요구할 때 아론을 세우심은 아론은 말씀 대신자(代身者)임을 표시하니 말씀의 최고 문제자(問題者)는 해와의 한 존재이었다.
즉 말씀 성사는 해와를 완전하게 찾을 목적으로 기인(基因)이 되니 즉 아론을 세워 대신속죄(代身贖罪)하심은 예수도 해와와 합하여서 인간 속죄(贖罪)의 직접 문제를 하여야 할 자기 자신의 사명분담(使命分擔) 역할이었다. 145
즉 해와로 죄를 지었으니 해와로서 대신 씻을 역할을 해야 할 책임분담(責任分擔)이 되어 있으니 아론은 모세의 한 상대격자(相対格者)로서 백성을 대하여 모세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을 성사(成事)하게 협조한 바는 예수 오셔서 말씀 상대를 찾아 뜻 성사를 잡을 것을 미리 보여주고 예시하여 표징(表徵)하는 의의(意義)이다.
모세에 이상과 같은 여러 조건이 성립(成立)되어 바로를 대하여 대립(対立)을 취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는 모세의 요구에 대하여 순종(順從)하지 않은 반면 도리어 모세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 증오심(憎惡心)을 갖게끔 하나님은 바로를 강퍅(剛爆)하게 할 것을 말하면서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줘 광야(拡野)에 나아가 삼일쯤 여호와께 제사 지내기를 청하라 하시었다.
여기 삼일노정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체 생명이 놓이느냐 안놓이느냐 하는 문제는 이 삼일노정이라는 문제를 걸어 놓고 시작하게 되는 기본요구조건(基本要求條件)이었다.
이 삼일간(三日間)이 허락되지 못하면 이스라엘 전폭적(全幅的) 목적은 전부 시작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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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일노정이라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성사(成事)하게 하는 작업이 기본 되는 요구조건(要求條件)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오셨을 때도 사탄에 대하여 삼일기간(三日期間)에 대한 과정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이 과정을 성사하려면 모세에게 속한 구비조건(具備條件) 같은 여러 조건의 구비를 보여야 할 것이었는데 이 구비조건은 광야시험(拡野試験)을 통하여 그 터는 사탄에게 승리함으로 성립(成立)되었으나 그의 대신역자(代身役者) 아론과 같은 해와의 존재의 구비성사(具備成事)를 보지 못하여서 삼일노정의 시작 노정을 자유롭게 넘어서지 못한 원인으로 십자가(十字架) 삼일간의 기본적인 근본은 시작되었다.
이때 예수 앞에 어머니와 합(合)하는 뜻 성사를 중심하고 해와 한 존재와 인간들이 하늘편 쪽으로 순종(順從)하였으면 예수의 십자가 노정(路程)은 다른 방향으로 효과적 노정을 보아 사탄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책의 성립을 시작하였을 것인데, 그 대책을 어떻게 해서라도 성사(成事)할 책임이 예수의 책임이니 죽어서라도 삼일 기간을 해치우는 사명적(使命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성해야 할 의무가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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