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이씨는 본관(本貫)이 연안(延安)이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종실(宗室)인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가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에 쳐들어왔을 때에 따라 들어왔다가 그대로 남아서 신라에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연안을 그 채읍(采邑)으로 삼아서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의 태자첨사(太子詹事) 습홍(襲洪)으로부터 대대로 가문이 현달하게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지낸 속(續)이 왕실과의 연인(連姻)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금고(禁錮)를 당하게 되었으며, 그 뒤 손자 인문(仁文)이 비로소 문과에 발탁되어 벼슬이 병조 참지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부사 말(抹)을 낳았다. 말은 군수 휘 경종(慶宗)을 낳았으니, 경종은 바로 부인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정언 휘 주(澻)인데 권병(權柄)을 잡은 신하를 배척하다가 가산군(嘉山郡)으로 밀려나서 세상을 떠났으며, 할아버지는 휘가 창정(昌庭)인데 광해군 때에 서궁(西宮)에 문안을 여쭌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아버지는 휘가 심(
)인데 병자년(1636, 인조14)의 호변(胡變)을 부끄럽게 여겨서 은둔하여 나오지 않았으나 천거를 받아 대군 사부(大君師傅)가 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참판 이민환(李民寏)의 딸이다.
부인은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 1월 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여러 사내 형제들이 글을 읽을 때에 옆에서 듣고 이를 외웠다. 아버지 찬성공이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소학(小學)》을 가르쳐 주었다. 계례(筓禮)를 하고 이씨 가문에 출가하였는데, 의령 현감(宜寧縣監)을 지낸 휘 운근(雲根)이 부군(夫君)이다.
부인이 시집을 와서 보니 시할머니 이 부인(李夫人)이 높은 연세로 안방에 계셨고, 시어머니 신 부인(申夫人)은 일찍이 과부가 되어서 3년 동안을 여묘(廬墓)하였는데, 거적을 겹쳐 깔지 않아 여름이면 습기가 올라와 풀싹이 자랐으며 겨울에는 서리가 엉겨붙어서 얼음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만 고질병을 얻어서 증세가 매우 위독하였는데도 자신의 병은 잊어버리고 열성으로 이 부인을 봉양해서 효부로 세상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부인은 신 부인이 이 부인을 섬기던 방법으로 이 부인을 섬겼으며, 신 부인을 섬기는 일 또한 마치 신 부인이 이 부인을 섬기는 것처럼 섬겼다. 그래서 이 부인은 부인을 ‘효손부(孝孫婦)’라고 했으며, 신 부인은 부인을 ‘효부(孝婦)’라고 하였다. 부인은 타고난 자성(姿性)이 본래 총명(聰明)하고 현숙(賢淑)하였다. 그런데다 아버지 찬성공이 또한 평소에 이를 잘 가르치고 훈계해서 그 올바름을 얻었던 것이며, 게다가 신 부인의 효성스러움에서 새로 보고 느껴 얻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부인은 연로한데도 여전히 제사 도구들을 몸소 챙겼다. 언젠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계집종이 처벌이 두려워서 잘못을 부인에게 떠넘겼으므로 이 부인이 부인을 불러서 꾸중을 하였다. 부인은 그저 공수(拱手)하고 서서 감히 변명하지 않았으며 그럴수록 안색이 더욱 공손하였다. 물러나와 방으로 돌아오자 부인의 맏딸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부인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우느냐? 할머니께서 네 어미를 꾸짖었다 하여 우느냐? 만약 네가 할머니께서 네 어미를 꾸짖었다 하여 감히 운다면, 이는 더욱 네 어미의 허물을 무겁게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나중에 그 계집종이 와서 잘못했다고 사죄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다행히 노부인께서 너의 잘못을 모르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아시기라도 하였더라면 너는 종아리를 맞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조심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랬더니 그 종이 크게 감동하여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시할머니와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그 예(禮)를 한결같이 현감공의 장례 때와 같이 하였다.
갑인년(1674, 현종15) 2월 19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단양(丹陽) 구담(龜潭)의 갑자원(甲子原)에 부장(祔葬)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서 계집종을 단양에 보내어서 선묘(先墓)를 수호하고 세시(歲時)에 따라 제사를 모시도록 했는데, 그 계집종이 출발에 임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부인이 말하기를, “너는 나와 떨어지는 것이 싫으냐? 내년이면 나도 갈 것이다.” 하였다. 이 때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다들 의아하게 생각하였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 보니 과연 그 말이 그대로 들어맞고 말았다.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 덕운(德運)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을 지냈으며, 복운(復運)은 생원이다. 사위 권호(權頀)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을 지냈고, 박이문(朴履文)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덕운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성(宬)이다. 복운의 세 아들은 맏이는 최(㝡)이고 다음 헌(憲)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다음은 채(寀)이고, 세 사위는 신창제(申昌濟), 신흡(申洽), 윤희일(尹喜一)이다. 권호의 두 아들은 건(楗)과 병(柄)이며, 두 사위 중 신광제(申光濟)는 효도로 인해서 지평에 추증되었고, 다음은 이정희(李鼎熙)이다. 박이문의 아들 하나는 사정(思正)이고 세 사위는 이덕주(李德胄), 이재망(李載望), 조서(趙恕)인데 조서는 현감을 지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