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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휘는 익(瀷), 자는 자신(子新), 성은 이씨이다. 광주(廣州)의 첨성리(瞻星里)에서 은거하며 수도하였으니,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은 태어난 지 이태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모부인께서 그 체질이 허약하여 병치레가 잦은 것을 근심하여 일찍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도록 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둘째 형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에게 배웠는데 전심하여 학업에 힘썼고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영특하여 군서(群書)를 두루 열람하였다. 둘째 형이 세상의 앙화를 입게 되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셋째 형 옥동공(玉洞公 이서(李漵)), 종부형(從父兄) 소은공(素隱公 이진(李𤂪)) 두 분을 따라 배웠다. 개연히 도(道)를 구하는 뜻이 있어 방에 바르게 앉아서 경전 및 송(宋)나라 정주(程朱), 우리나라 퇴계(退溪)의 글을 펴 놓고 되풀이하여 읽고 사색하니 마치 엉킨 실타래가 예리한 칼날에 한 올 한 올 풀리듯 은미한 뜻이 해석되었다.
선생의 도(道)에 들어가는 문로(門路)는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니, 일찍이 말씀하기를, “발(發)하기 전에는 정(靜)할 때의 경(敬)이 있고, 이미 발한 뒤에는 동(動)할 때의 경이 있다. 그러나 동할 때의 경 또한 다만 정할 때의 공부에서 근본하니, 만약 정할 때 경을 주장하지 못하면 동할 때에 어떻게 경을 지켜 바르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경재잠설(敬齋箴說)〉을 지었는데, 〈경재잠〉의 “동하고 정함에 어긋남이 없고 안과 밖이 서로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動靜不違 表裏交正〕”라는 구절을 법도로 삼았다.
선생이 학문을 진보시킨 방법으로 말하면, 행(行)은 반드시 지(知)를 우선으로 하므로 치지(致知)를 역행(力行)의 근본으로 삼았고, 아는 것은 장차 행하기 위해서이므로 역행을 치지의 실제로 삼았다. 후대의 학자들이 혹 장구(章句)의 지엽적인 뜻에만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실제적인 공부에는 착수하려 하지 않는 이가 많은 것을 근심하여 항상 말씀하기를, “그 말을 배웠어도 반드시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며 마음으로는 비록 깨달았어도 반드시 몸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자신에게 체득해야 하니, 그런 뒤에라야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행할 수 있다.” 하였으니, 정(靜)할 때에 보존하고 동(動)할 때에 살피며,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하여 공부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조정에서 그 이름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매우 연로해진 뒤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었다. 아, 선생의 수(壽)는 맹자의 부동심(不動心)한 나이보다 두 배를 누리고도 몇 해를 더 사셨다.
선생은 무릇 성품에 본디 지니고 있는 것에 있어서는 한 가지라도 궁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고, 직분에 있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에 있어서는 한 가지라도 갖추지 않은 일이 없었다. 행(行)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하였는데 그 근원은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서 나왔고 도(道)는 천인(天人)을 관통할 만하였는데 그 기틀은 한 치, 한 푼씩 쌓은 공력으로 다져진 것이다.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강물을 포용하듯 그 범위가 광대하고 누에에서 뽑은 실과 소의 가는 털처럼 그 분석이 치밀하였으니, 이를 세상에 펴게 하였더라면 임금은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되었을 것이고 백성은 요순의 백성이 되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선생께서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참되고 올바른 포부를 한두 가지도 펴지 못하였다. 후생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법에 엄격한 가행(家行)뿐이고, 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지면에 기록된 지론(至論)뿐이다.
그 가행으로 말하면, 매양 선고의 얼굴과 풍모를 알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겨 말이 선고에 미치면 주르륵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는데 늙어서까지도 그러하였다. 뒤에 선고가 돌아가신 지 갑년(甲年)이 되는 해에 추복(追服)을 입으려고 했다가 이윽고 말씀하기를, “퇴옹(退翁)께서도 나처럼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추복을 행하지 않으셨다. 퇴옹은 나의 스승이니 어찌 감히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고 여생을 마치도록 재계하고 소식(素食)하며 지냈는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상중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평소의 생활은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고 물러 나와서는 서실(書室)에 계셨으며, 의대(衣帶)는 반드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우(士友)를 만나면 반드시 공손하게 절하였으니 말씀하기를, “절은 예(禮)의 시작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문인과 제자 중에 사차(私次)에서 묵는 자들은 들어올 때도 반드시 절하고 뵈었고 나갈 때도 반드시 절하고 하직하였다.
규문(閨門) 안은 정숙하였다. 비록 자손과 친족이라도 까닭 없이 내당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항상 《주역》 〈가인(家人) 구삼(九三) 상(象)〉의 “가인(家人)이 원망함은 심한 잘못이 아니요,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함은 집안의 절도를 잃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형제와 자질(子姪)에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교육하였다. 비록 촌수가 먼 자라도 굶주리면 구휼하고 병이 나면 약을 지어 주었으며 상사가 나면 부조하였고 때를 놓쳐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자에게는 혼수를 마련해 주어 윤상(倫常)이 폐기되지 않도록 하였다.
선영(先塋)에 대수(代數)가 멀어 제사를 못 지내는 분묘가 있었는데 각기 묘전(墓田)을 두어서 그 재원으로 매해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개조(開祖)인 8세조 경헌공(敬憲公)의 사당을 종자(宗子)의 집에 새로 세우고 해마다 종인들을 이끌고 한 차례 제사하였다. 글을 지어 그 의리를 밝히기를, “국조(國朝)의 경우, 공자(公子)나 훈신(勳臣) 이외에는 입종(立宗)에 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므로 서성(庶姓)의 대족(大族)이 흩어진 채 하나로 단합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기》 〈왕제〉에 의거하면, ‘별자(別子)가 조(祖)가 되고 별자의 적통을 계승한 이는 종(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이르기를, ‘비록 별자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작위를 받은 자 또한 그렇다.’ 하였고, 그 소(疏)에 이르기를, ‘이성(異姓)으로서 대부(大夫)가 된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서성이 입종한 증거이다.” 하였다.
그 지론(至論)으로 말하면, 대부분 깊이 탐구하고 스스로 터득하여 전에는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밝힌 것들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하도의 수(數)는 그 기우(奇偶)로써 선천도(先天圖)를 삼고, 그 배합(配合)하는 것으로써 후천도(後天圖)를 삼고, 그 생성(生成)하는 것으로써 낙서를 삼는다. 낙서가 부연(敷衍)되어 〈홍범(洪範)〉이 지어졌다. 그 두 번째 오사(五事)의 숙(肅)ㆍ예(乂)ㆍ철(哲)ㆍ모(謀)ㆍ성(聖)이 여덟 번째 서징(庶徵)에도 호응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낙서 가운데 2와 8은 서로 자리가 바뀌었으니, 기자(箕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하였다.
삼대(三代)의 정전(井田)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50묘(畝)에서 변하여 70묘가 되고 70묘에서 변하여 100묘가 되었다는 것은 그 경계(經界)를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선유가 이를 의심하였지만 이는 변석(辨析)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고, 1정(井)은 9전(田)이 되고, 1전은 4구(區)가 되고, 1구는 사방 50보(步)가 되는 제도를 변석하여 하(夏)나라 때는 1부(夫)가 1구를 받고, 은(殷)나라 때는 늘어나서 1부가 2구를 받고, 주(周)나라 때는 늘어나서 1부가 4구를 받았음을 밝히면서, “그러므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전이 50묘에서 바뀌어 70묘가 되고 100묘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맹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하였다.
삼대의 정삭(正朔)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계절〔時〕을 바꾸고 달〔月〕을 바꾼 것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절충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시경》, 《서경》, 《주역》을 살펴보면 계절과 달을 바꾸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춘추》, 《맹자》 및 맹헌자(孟獻子)의 말을 살펴보면 계절과 달을 바꾸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계절과 달을 바꾼 것은 주나라가 동천(東遷)하여 쇠미해진 뒤의 일이다. 동천하기 이전에 계절과 달을 바꾸었다는 글을 찾아낼 수 있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왕풍(王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정현(鄭玄)을 비롯한 제유(諸儒)들은 모두 ‘동천한 이후에 왕실이 미약해져 제후와 동등해졌기 때문에 아(雅)가 되지 못하고 풍(風)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풍과 아는 원래 나름의 체재가 있고 흥쇠와는 관계가 없다. 주나라 왕실이 한창 흥륭했을 때에도 풍이 있었으니 이남(二南)이 그것이고, 제후가 미약했어도 아(雅)가 있었으니 〈억(抑)〉 시(詩)가 그것이다. 그리고 왕택(王澤)이 다했어도 변아(變雅)가 지어졌으니, 평왕(平王)이 비록 미약했지만 어찌 변아의 끝에 낄 수 없었겠는가. 계찰(季札)이 주나라의 음악 연주를 구경하였을 때 왕(王) 지역은 위(衛)나라 언저리에 있었으니, 패(邶), 용(鄘), 위(衛), 왕(王)은 모두 동도(東都)였다. 동도는 왕성(王城)이니, 천자가 제후에게 조회를 받는 곳으로 후에 옮겨와 거주하였던 것이다. 무릇 큰 도회지에는 모두 시(詩)가 있어서 민풍(民風)을 살필 수 있었다. 앞서서는 빈(豳)과 주(周)에 풍이 있었고 뒤에는 왕성에 풍이 있었으니, 왕풍이라는 것은 왕성의 풍을 일컫는 것이지 동천한 평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하였다.
삼경(三經)과 사서(四書) 및 《소학》, 《근사록》, 《심경》에 있어서는 글자마다 그 훈고를 탐구하고 구절마다 그 뜻을 탐색해서 모두 질서(疾書)를 지었으니, 장횡거(張橫渠)의 ‘터득한 바가 있으면 얼른 기록하였다.〔妙契疾書〕’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순서는 《맹자》부터 시작하였는데, 말씀하기를, “시간적으로는 후대가 되고, 내용상으로는 의미가 상세하다. 후대이면 가깝고 상밀하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인의 뜻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맹자》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예(禮)에 있어서는 삼례(三禮)를 근본으로 하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및 역대 제유들의 설을 두루 통섭(通涉)하되 《가례》에서 절충하였다. 그래서 또 저술한 《가례질서(家禮疾書)》가 있다. 《관의(冠儀)》, 《가취의(嫁娶儀)》, 《상위록(喪威錄)》, 《묘묘향사의(廟墓享祀儀)》의 제편(諸編)을 산절(刪節)한 데에 이르러서는 드러내어 일가(一家)의 법으로 삼았다.
퇴계를 존모한 것이 주자(朱子)를 존모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유집(遺集)》 및 문인의 기록에 보이는 퇴계의 언행을 《근사록》의 체례대로 편집하여 《도동록(道東錄)》이라 이름 짓고, 또 예를 논한 퇴계의 글들을 분류하고 편집하여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이라 이름 지었다.
퇴옹(退翁) 이후에 사칠이기(四七理氣)에 대한 설이, 주자가 해석한 “도심(道心)은 의리(義理)에서 발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발한다.”라는 말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린,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는 말과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을 근심하여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주자의 뜻을 발명하고 퇴도(退陶)의 설을 뒷받침하였다.
비록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이 세상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어 《곽우록(藿憂錄)》, 《사설(僿說)》 등의 책을 지었다.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백세토록 훌륭한 정치가 없었던 것은 세 가지 재앙에서 연유한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폐단은 영정(嬴政 진 시황(秦始皇))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漢)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문벌을 숭상하는 폐해는 위만(魏瞞 조조(曹操))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진(晉)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문사(文辭)로 과시(科試)하는 폐단은 양광(楊廣 수 양제(隋煬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唐)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으니, 세 가지 재앙을 없애지 않는다면 다스림을 논할 수 없다. 세 가지 중에 과거(科擧)의 폐해가 가장 크니, 차선의 것을 말한다면 당나라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가 근접하고 국조(國朝)의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현량과(賢良科)가 또 그다음이다. 정암이 이미 성묘(聖廟)에 배향되었는데 들어서 시행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동국(東國)의 사서(史書)가 소략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을 근심해서 문인 안정복(安鼎福)에게 부탁하여 의리(義理)와 체례(體例)를 정해 주고 마침내 믿을 만한 사서 1질(帙)을 완성하게 하였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여러 편서(編書)까지 아울러 도합 수백여 권이다. 요약하면 학문은 문식(文飾)을 제거하고 실제에 힘썼으며, 예를 논한 것은 사치를 버리고 절검을 따랐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논한 것은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이다. 모두 본원을 탐구하고 요점을 제시하였으므로 각기 조리가 있어 들어서 시행할 만한 것들이니, 아 성대하다.
이씨(李氏)의 본은 황려(黃驪 여주(驪州)의 고호(古號))에서 나왔으니, 비조(鼻祖)는 고려(高麗)의 인용교위(仁勇校尉) 인덕(仁德)이다. 8세조 휘(諱) 계손(繼孫)은 병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경헌(敬憲)이니, 일찍이 북로(北路)의 관찰사가 되어 유교의 교화가 크게 드러났으므로 북도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선사(先師)의 예로 제사하였다. 증조 휘 상의(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니, 실로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명신이었다. 조부 휘 지안(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미수(眉叟) 허 문정(許文正 허목(許穆))과 정총산(鄭蔥山 정언옹(鄭彦𧦱))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도의(道義)로써 서로 추중하였다. 부친 휘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숙종조(肅宗朝)에 힘써 청의(淸議)를 부지(扶持)하여 사류(士流)들의 추중을 받았다. 전비(前妣) 증(贈) 정부인(貞夫人)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유수(留守) 후산(後山)의 따님이고, 후비(後妣)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대후(大後)의 따님이니, 선생은 권 부인 소생이다.
선생은 숙종 신유년(1681, 숙종7)에 태어나 영종(英宗) 계미년(1763, 영조39)에 졸하였으니, 향년 83세이다. 속광(屬纊)하자마자 즉시 찬장에 있는 음식으로 전(奠)을 올리고 성빈(成殯)하기 전까지 조석으로 올리는 궤전(饋奠)을 폐하지 않았다. 염(斂)할 때는 지금(紙衾)을 쓰고, 종이에다 명정(銘旌)을 썼으며, 관은 옻칠하지 않고 송진을 발랐으니, 모두 선생께서 평소 정해 둔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은 모두 1년 동안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였고, 단문친(袒免親)을 넘어서는 족인(族人)들도 포건(布巾)과 포대(布帶)를 하여 장례가 끝난 뒤에 벗었다. 집 북쪽에 있는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의 초취(初娶)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언(正言) 필청(必淸)의 딸인데 자식이 없다. 재취(再娶)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천건(天健)의 딸이다. 두 부인은 선생의 묘에 합장되었다. 1남 맹휴(孟休)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였고 벼슬은 정랑에 이르렀다. 가학(家學)을 능히 전할 만하였는데 일찍 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1녀는 위솔(衛率)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참판 채팽윤(蔡彭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구환(九煥)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이다. 위솔의 계자(系子)는 윤하(潤夏)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기보(畿輔)의 관찰사가 되어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 길을 우회하여 첨성리(瞻星里) 집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은 당시 81세였다. 선생은 처마가 낮은 폐옥(弊屋) 아래에 단정히 앉아 계셨는데 안광이 형형하여 쏘는 듯하였고, 성긴 수염은 아래로 띠〔帶〕에까지 드리워 있었다. 절을 하기도 전에 벌써 공경하는 마음이 숙연히 일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뵈니 화락하고 너그러우셨으며 경전(經傳)을 담론하실 때는 고금을 넘나들며 말씀하시어 전에 듣지 못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한스럽게도 세상사에 쫓기다 보니 가시는 적막한 길에 정성스레 향화(香花)도 한 번 올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선생의 종손 처사군(處士君) 삼환(森煥)이 소매에 가장(家狀)을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저 늙은이일 뿐이니 어찌 도(道)가 있는 기상을 잘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오도(吾道)는 원래 통서(統緖)가 있으니, 퇴계는 우리 동국의 부자(夫子)이다. 그 도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전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전했고, 선생은 미수를 사숙(私淑)한 분이다. 미수를 배워 퇴계의 도통을 접맥하였으니, 후대의 학자는 사문(斯文)이 대대로 도통을 계승하여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안 연후에 지향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선생의 명을 지어도 되겠느냐고 하자, 처사군이 말하기를, “그 말이 요체를 얻어 번다하지 않으니, 선생을 잘 아십니다.” 하였다. 마침내 옷깃을 여미고 명을 지었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도를 품고도 혜택을 베풀지 못한 것은 / 抱道而莫能致澤
한 시대의 불행이지만 / 一世之不幸
글을 지어 또한 은택을 베풀 수 있으니 / 著書而亦足嘉惠
백세의 다행이로다 / 百世之幸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 天之意無乃在是歟
일세는 짧고 백세는 긴 법이다 / 一世短而百世永
선생의 명을 지어 오당을 권면하노니 / 銘先生而勉吾黨
어찌하여 함께 선생의 글을 읽지 않는가 / 盍與讀先生書
도통의 전수가 나에게 말미암지 남에게 말미암겠는가 / 傳統由己而由人乎
[주-D001] 둘째 …… 되자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자 이윤(李昀)의 후원 세력인 남인(南人)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몰락하면서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성호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상소하여 “전후좌우에서 춘궁(春宮)에게 칼날을 들이댄다.”라고 하며 세자 보호를 역설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악역(惡逆)으로 지목하였다가 국문받던 도중에 죽었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2, 78~85쪽》[주-D002] 경재잠 : 주희(朱熹)가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여 지은 잠으로, 경재(敬齋)의 벽에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한 글이다. 《晦庵集 卷85》[주-D003] 맹자의 부동심(不動心)한 나이 : 40세를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는 40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我四十不動心〕”라는 말이 보인다.[주-D004] 예기 …… 하였으니 : 별자(別子)는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에서 제후(諸侯)의 적장자(嫡長子) 이외의 아들, 즉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다만 여기에서 “별자가 조(祖)가 되고 별자의 적통을 계승한 이는 종(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는 구절은 《예기》 〈왕제〉가 아니라,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와 〈대전(大傳)〉에 보이는 말이고, 성호가 인용한 주와 소는 《예기》 〈왕제〉의 “대부는 3묘(廟)이니, 1소(昭), 1목(穆)에 태조(太祖)의 묘까지 셋이 된다.〔大夫三廟 一昭一穆 與太祖之廟而三〕”라는 구절에 대한 주와 소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주-D005] 그 …… 나타난다. : 《서경》의 〈홍범〉은 홍범구주(洪範九疇), 즉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요체를 말한 것으로, 본래 우(禹)가 만들었는데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질문에 부연(敷衍)하여 답하였다고 한다. 그 아홉 가지 항목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인데 그중에 두 번째인 오사와 여덟 번째인 서징이 서로 관통함을 말한다. 오사는 모양〔貌〕, 말〔言〕, 보는 것〔視〕, 듣는 것〔聽〕, 생각함〔思〕으로 이 오사는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德), 즉 공손함〔恭〕, 순종함〔從〕, 밝음〔明〕, 귀밝음〔聰〕, 지혜로움〔睿〕이 호응하고, 이 다섯 가지 덕은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의 용(用), 즉 엄숙함〔肅〕, 다스림〔乂〕, 지혜〔哲〕, 헤아림〔謀〕, 성스러움〔聖〕이 호응하는데, 이것이 여러 가지로 징험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징이다. 서징은 비 옴〔雨〕, 볕 남〔暘〕, 더움〔燠〕, 추움〔寒〕, 바람〔風〕이 때에 따라 이르는 것〔時〕으로, 엄숙하매 제때에 비가 내리며〔肅時雨若〕, 조리(條理)가 있으매 제때에 날이 개며〔乂時暘若〕, 지혜로우매 제때에 날이 따뜻하며〔哲時燠若〕, 헤아리매 제때에 날이 추우며〔謀時寒若〕, 성스러우매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聖時風若〕이 아름다운 징조(徵兆)이다. 《尙書正義 洪範》[주-D006] 50묘(畝)에서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殷)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周)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돕는다는 뜻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徹也 助者藉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주-D007] 맹헌자(孟獻子)의 말 : 맹헌자는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중손멸(仲孫蔑)이다. 《예기》 〈잡기(雜記)〉에 “맹헌자가 말하기를, ‘1월 일지(日至)에 상제(上帝)에게 제사하고, 7월 일지에 시조(始祖)에게 제사할 수 있다.’ 하였으니, 7월의 체(禘) 제사는 맹헌자가 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체 제사는 본래 건사지월(建巳之月), 즉 음력 6월을 썼는데, 헌자로 인하여 건오지월(建午之月), 즉 음력 7월을 썼다는 말이다.[주-D008] 왕풍(王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동도(東都)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이후 그 지방에서 채집한 시로, 〈서리(黍離)〉부터 〈구중유마(丘中有麻)〉까지 10편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주(周)나라 왕실의 존엄함이 실추되어 제후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하여 그 시 또한 왕국(王國)의 변풍(變風)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주-D009] 아(雅)가 …… 되었다 : 《시경》은 그 내용과 성격에 따라 크게 풍(風), 아, 송(頌)으로 분류되는데, 풍은 국풍으로 주나라 때 각 지방의 민요이고,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로 주나라 때 조정(朝廷)의 아악(雅樂)이고, 송은 주송(周頌), 상송(商頌), 노송(魯頌)으로 선조(先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종묘악(宗廟樂)이다.[주-D010] 이남(二南) :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병칭하는 말로,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의 채읍(采邑)에서 수집한 시(詩)이다. 《詩經集傳 卷1 國風》[주-D011] 변아(變雅) : 《시경》 소아, 대아를 일컫는 정아(正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개 주나라가 쇠퇴하여 정치가 문란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소아는 〈녹명(鹿鳴)〉부터 〈청청자아(菁菁者莪)〉까지를 정소아(正小雅), 〈유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를 변소아(變小雅)라고 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부터 〈권아(卷阿)〉까지를 정대아(正大雅),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를 변대아(變大雅)라고 한다. 《詩經集傳 詩經集傳序》[주-D012] 빈(豳)과 …… 있었고 : 빈풍(豳風)과 주남(周南)을 가리킨다.[주-D013] 왕성에 풍이 있었으니 : 왕풍을 가리킨다.[주-D014] 장횡거(張橫渠)의 …… 것이다 : 횡거(橫渠)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장재는 밤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의리에 대해 새로 깨달은 것이 있으면 바로 일어나서 붓으로 얼른 기록해 두곤 했다는데, 주희(朱熹)가 지은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에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껏 실천하며, 묘하게 계합할 때마다 얼른 기록하였네.〔精思力踐 妙契疾書〕”라는 구절이 있다. 《晦庵集 卷85 六先生畫像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