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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만력(萬曆) 24년(1596, 선조29),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호서에서 군사를 일으켜 여섯 고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두 고을의 수령을 사로잡으니 악명이 원근을 뒤흔들었다. 당시 홍주 목사(洪州牧使) 만전(晩全) 홍공(洪公)은 문관으로 외로운 성을 맡고 있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반란을 평정하였다.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께서 가상히 여기고 글을 내려 품계를 더해주었으며, 또 책에 쓰게 하셨다. 얼마 후 또 청난 공신(淸難功臣)의 칭호와 2품의 품계 및 영원군(寧原君)의 벼슬을 내리셨다. 그러자 우리 동방의 사대부로부터 농부와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공의 이름을 익숙히 들어 알고서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길에서 굶주린 호랑이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직접 공의 도움을 받고서 자리 위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진 홍주의 백성들은 어떠하겠는가. 공에게 감사하는 마음 끝이 없을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초상을 모시고 제사를 짓거나 그리워하고 고마워하는 노래를 지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 채 40여 년 동안 적막하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가정(嘉靖) 연간에 복건 안찰사(福建按察使) 종신(宗臣) 자상(子相)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복청(福淸) 지역이 침략을 당하자 성문을 활짝 열고 안에서 오랑캐를 몰아내어 많은 사람을 살렸다. 복건 사람들이 오석산(烏石山)에 사당을 세우고 비석을 새겨 덕을 칭송함이 그치지 않았다. 지금 홍공이 홍주 사람들을 살린 일을 자상과 비교하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은 없다. 난리를 평정한 열행은 자상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홍주에만 유독 오석산과 같은 한 발짝 땅과 비석을 세울 돌 하나가 없겠는가. 풍속이 어리석다 해도 마땅하다.
올해 봄에 완산(完山) 이후(李侯)가 승정원에 승지로 있다가 이 고을에 부임하였는데, 마침내 홍공의 일을 개탄한 나머지 고을 노인들과 의논하여 사당 세울 자리를 살피고 비석감을 준비하여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그대가 글 한 편을 써서 만전공(晩全公)의 충과 덕을 영원히 알렸으면 하네.”
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다고 사양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 말한다.
홍양(洪陽)은 거대한 관방(關防)이다. 홍양을 잃으면 호서를 잃는 것이니, 호서를 잃으면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 만전공이 홍양을 지킨 것이 어찌 한갓 일시적인 공로이겠는가. 처음에 적이 뜻밖에 갑자기 일어난 것은 공격하는 것을 유리하게 여겨서이지 심원한 계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진년(1592, 선조25)과 계사년(1593)에 전쟁으로 기근이 일어난 뒤 의지할 데 없는 백성들을 꼬드겨 고을을 탐낸 지 오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자들이 백성 속에 섞여 엿보고 있었으니, 이는 다른 도적에 비해 평정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병신년(1596) 7월 7일, 정산현(定山縣)에서 공에게 급보를 전하자 공은 관리와 백성을 격려하여 죽을 각오로 지키도록 효유하고, 인근 고을의 장사들에게 두루 격문을 보내어 모두 오게 하였다. 하지만 성 안에 있는 병사는 수백 명도 되지 않고 성곽 또한 약하고 낮았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성을 버리고 근왕(勤王)하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라를 지키는 신하는 성곽이나 강토에서 죽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나는 강토를 맡은 신하가 아닌가.”
하였다. 또 처자를 내보내 피신시키라고 권하자 공이 또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위해 죽고 처자는 나를 위해 죽는 것이 의리에 해가 되는가.”
하고, 밖에 있는 자제들을 모두 성 안에 불러 모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굳게 안정되어 부담스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음을 놓고 안일하게 있던 사람은 분개하여 수하에 있는 아전들이 모두 공을 잘 따르는 군사가 되었다.
수사(水使) 최호(崔湖)가 공에게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수영(水營)에 모이라고 하였으나 공은 명령을 받지 않고 말하기를,
“호서의 목구멍으로 이 고을보다 중요한 곳이 없다. 내가 한 걸음이라도 떠나면 적은 필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쳐들어 올 것이다.”
하고, 도리어 함께 주성(州城)을 지키자고 하였다. 최호가 공의 말을 옳다고 여겨 남포(藍浦)와 보령(保寧) 두 고을의 현감을 거느리고 오자 군사가 조금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선봉의 임무는 반드시 무예와 용력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니, 파총(把摠) 임득의(林得義)가 말하기를,
“우후(虞侯) 박명현(朴名賢)은 고을 출신으로 여러 사람 가운데 뛰어난 사람입니다. 지금 집에 있으니 공이 편지를 보내 불러 와서 싸움을 맡기십시오.”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내가 성을 지킬 도구를 완전히 준비하지 못했는데 누가 적을 며칠 동안 잡아둘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내가 성을 지킬 준비를 완벽하게 할 것이다.”
하니, 고을 아전 이원명(李元命)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공이 이원명을 등용하고 드나드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한현(韓絢)이 적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염탐해 내고 적 25인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동문에 머리를 매달았는데, 대부분 이원명의 공이었다고 한다.
공이 또 몰래 염탐하는 자를 잡아 죽이고, 또 수사와 성을 나누어 지키는데, 튼튼한 곳은 수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허술한 곳을 맡았다. 지키는 곳을 직접 걸어 다니며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심지어 직접 손으로 음식을 건네며 격려하였다. 말할 적마다 강개하여 하늘을 가리키면서 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며칠이 지나자 적이 대흥(大興)에서부터 대거 성 아래로 몰려와 세 곳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한편으로는 성을 포위한 실상을 과장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는데, 백마를 탄 장수가 성을 세 바퀴 내달리며 극도로 요망한 말을 하여 성안을 동요시켰다. 공은 성안의 군사들로 하여금 대응하지 말고 굳게 지키도록 하며 성루를 정비하고 대오를 채워 침범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일 따름이었다. 적은 그제야 계책이 궁하여 머뭇거렸다. 마침 해가 지고 비가 내리자 적이 벌떼나 개미떼처럼 여염 간에 뒤섞이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대오를 갖추지 않고 소란스러우니 격파하기를 도모할 만하다.”
하고, 관청의 울타리를 거두고 무기고의 대나무를 가져다 횃불을 만들고는 성벽을 지키는 사람에게 사람마다 횃불 세 개를 태우게 하였다. 그리고 궁수 수십 명을 선발하여 밤에 줄을 타고 성을 나가 화곡(禾谷)에 숨어 있다가 성안에서 불을 피우는 것을 보면 적을 향해 마구 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 위에서 다시 불화살을 쏘아 적들이 머무는 거처를 불태웠다. 불이 맹렬해지고 바람이 거세지자 성안의 병사를 데리고 일시에 북과 조두 소리를 크게 내자 적이 몹시 놀라 마침내 이리저리 달아났다. 박명현 등은 추격하여 적도를 섬멸하고, 임억명(林憶明)은 이몽학을 참수하여 왔다. 이튿날 계책을 써서 또 한현을 붙잡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보내니, 공을 제일로 책훈하였으며 박명현 이하를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공은 유학(儒學)으로 입신하였으니 병략이나 군율은 평소 익숙하지 않았다. 오로지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는 의리가 마음속에 분명하여 살기만 바라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큰 난리를 당하자 다른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하였으나 공만은 편안하였다. 계책을 결정하고 기회에 대응하는 것이 신출귀몰하여 걸핏하면 적의 약점을 찌르고 속셈을 꺾었다. 더구나 성품이 사람을 잘 알아보았기에 못난 사람을 인재로 만들고 겁 많은 사람을 용기 있게 하여 모두 적임을 맡겼기에 군사들이 그에게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여 이로 말미암아 공을 이루었다고 한다.
적이 한참 쳐들어올 적에 한현의 심복 이익남(李益南)이라는 자가 2백여 명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몰래 우리 군사인양 성안으로 들어와 적과 내응하려 하였는데, 공은 일이 터지기 전에 실정을 알아내고 그의 손발을 묶어 간계를 부리지 못하게 하였다. 적이 계획을 망치고 간담이 서늘해진 것은 실로 여기서 말미암았다고 하니, 공은 싸우지도 않고 남의 군사를 굴복시켰다고 하겠다.
아! 지금은 병신년으로부터 40여 년이 흘렀다. 나라의 여러 성이 견고하기가 홍양보다 만 배나 더하고 군사가 많기가 홍양보다 만 배나 되며, 계략을 세우는 신하와 용맹한 군사로서 씩씩하고 기세등등한 자들이 만전공의 공업을 내려다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난 병자년(1636, 인조14) 난리 때 성 하나 장수 한 명조차도 적에게 대항하며 지킨 경우가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쳐들어 온 것은 오합지졸의 반란군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장수된 자가 만전공이 그랬던 것처럼 의리를 지키다 죽을 마음을 품는다면 필시 볼만한 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전공이 지금과 같은 때를 만났다면 비록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재주처럼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13만의 강적을 막을 수는 없었겠지만, 불행히 죽게 되었더라도 필시 장순과 허원의 절개보다는 못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이후가 만전공의 비석을 새기는 데 급급해하는 깊은 뜻이다. 어찌 홍주 백성을 깨우치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앞으로 홍주의 성지(城池)를 지나는 자가 강토를 맡은 신하라면 지킬 것을 생각하고, 갑옷을 입은 군사라면 몸을 버려 나라를 보호할 것을 생각하며, 선비의 의관을 입거나 처음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지모를 내어 난리를 평정하는 것이 눈을 부라리고 말을 더듬는 데서 말미암지 않고 시서와 예악의 마당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을 크게 깨달아야 한다. 비슷한 부류를 보고 감발하는 것이 이 비석에 있지 않겠는가, 이 비석에 있지 않겠는가.
만전공은 휘가 가신(可臣), 자가 흥도(興道)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과 허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의 문하에서 배워 학문에 연원이 있다. 선묘(宣廟) 초기에 부름을 받고 지평과 장령이 되어 정사를 논하니 옛적 간쟁하던 신하의 풍모가 있었다. 훗날 관직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오로지 공훈 때문은 아니었다.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치사하고 10년 뒤에 돌아가셨다. 만전은 호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은 / 鷹鸇逐雀
그저 부리와 발톱 때문이 아니라 / 匪止觜距
그 성품이 강직해서라네 / 其性卽剛
신하가 반란을 정벌함도 / 人臣伐叛
강약에 달린 것이 아니라 / 不在強弱
큰 기강이 분명해서라네 / 在晳大綱
훌륭하다, 홍공이여 / 於赫洪公
이 때 이 관직을 맡아 / 嬰此嬰帶
저 미친 도적에 맞섰네 / 抗彼猖狂
의리 지켜 제 몸을 잊은 채 / 義以忘身
처자에게까지 미쳤고 / 以及其孥
군사들의 마음 격려하였네 / 以激士腸
흉악한 자도 마음을 바꾸어 / 盭夫易慮
분발하여 돕고자 생각하여 / 劻勷思奮
모두 한번 싸우고자 했네 / 咸願一當
공이 계책을 세워 / 公迺算成
장수들에게 지시하니 / 指授諸將
참으로 좋은 꾀였다네 / 維謀之臧
너는 속히 북을 치고 / 于儳汝鼓
너는 밤에 재갈을 물며 / 于宵汝枚
너는 활을 갖고 숨어라 / 汝弩伏張
불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쏘고 / 火矢蝟發
함성을 질러 위세를 도우니 / 喊聲助威
적이 마침내 놀라 달아났네 / 賊遂犇亡
박명현을 앞에 풀어놓으니 / 名賢先縱
임득의가 뒤를 이어서 / 得義爲承
역적의 목을 칼로 베었네 / 亂領齒鋩
숨겨둔 계책을 써서 / 寵頭囊緘
살 길을 열어 사로잡고는 / 闢生就禽
대궐에 급히 알렸네 / 馳奏明光
역적의 기세는 구름처럼 걷히고 / 逆氣雲銷
산하가 즉시 바로잡히니 / 河岱卽序
공이 공훈을 높이 드날렸네 / 公功上颺
이에 명하는 글을 내리고 / 爰降命書
이어서 철권을 내려 / 繼以鐵券
맹부에 보관하였네 / 盟府是藏
공은 죽은 지 오래인데 / 公歿旣久
세상이 어려움 겪으니 / 世歷屯艱
공의 충성 더욱 빛나네 / 公忠益彰
홍주 사람들 그 덕을 사모하여 / 洪人戀德
사당 짓고 제사 지내니 / 廟而祀之
월산의 남쪽이라네 / 月山之陽
소나무 잣나무로 집을 지어 / 松楹柏板
혼령을 모시고 제기를 놓고 / 妥靈晉豆
여단과 초황을 올리네 / 荔丹蕉黃
여기 양을 묶는 곳에 / 維此繫羊
내가 위대한 행적 새겨 / 我銘韙迹
먼 훗날에 보이리라 / 庸示茫茫
[주-D001] 홍주 청난 비명 : 이 글은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홍주 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의 공적을 기려 세운 비명이다. 본문에 “지금은 병신년(1596)으로부터 40여 년이 흘렀다.” 하였으며, “지난 병자년(1636) 난리 때”라는 언급도 보이므로, 1636년 이후의 작은 분명하나 정확한 작성 시기는 알 수 없다.[주-D002] 가정(嘉靖) …… 살렸다 : 종신(宗臣, 1525~1560)은 명(明)나라 문인으로 자는 자상(子相), 호는 방성산인(方城山人)이며 흥화(興化) 사람이다. 후칠자(後七子)의 한 사람이다. 복건 참의(福建參議), 복건 제학 부사(福建提學副使)를 역임하였다. 1558년(가정37) 왜구가 쳐들어오자 그는 복건성의 서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성 밖에 사는 백성 수십만이 성으로 들어오려 하였다. 어떤 이가 간첩이 들어올 수 있다며 걱정하자 종신은 개의치 않고 백성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결국 백성들이 살던 집을 불태우고 식량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성을 지킬 수 있었다. 《宗子相集 卷13 西門記》[주-D003]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 당(唐)나라 때 장수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수양(睢陽)을 지켰는데,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 성이 함락되자 죽임을 당하였다.[주-D004] 눈을 …… 데서 : 힘을 믿고 만용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조 문왕(趙文王)이 검을 좋아하였는데, 장자(莊子)가 천자의 검, 제후의 검, 서인의 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조 문왕의 검사(劍士)들은 쑥대머리로 관을 늘어뜨리고 장식 없는 갓끈에 소매 좁은 옷을 입은 채 눈을 부라리고 말을 더듬는 서인의 검이라고 하였다. 《莊子 說劍》[주-D005] 월산 : 홍주 서쪽 3리에 있는 홍주의 진산(鎭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홍주목》[주-D006] 여단과 초황을 올리네 : 여단은 여지(荔枝), 초황은 바나나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찬란하게 붉은 여지와 누런 바나나를 올린다.〔於粲荔丹與蕉黃〕”는 구절이 있다. 특산물로 제물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주-D007] 여기 …… 곳에 : 비석을 말한다. 옛날에는 종묘의 대문 안에 희생을 매어두는 바위를 세웠는데, 이것이 비석의 유래라고도 한다. 《禮記 祭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