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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014년 2월 양산가의 유래가 깃든 영동으로의 여행>
2011년 월류봉
2014년 영동 하대도리
◉ 옥천이지당 : 옥천군 군북면 이백6길 126
이지당은 조선중기 성리학자로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헌이 세운 서당으로 1977년 12월 옥천군 시도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조헌은 호가 중봉, 본관은 白川이다. 명종 22년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전투에 참여하여 700의병과 함께 순절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열이다. 율곡의 제자이기도 한 조선 중기 성리학자 중봉 조헌선생이 낙향하여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지당은 앞의 강과 뒤의 산이 어우러진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장소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본채와 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채는 앞면 7칸, 옆면 1칸의 강당건물로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양쪽 2칸은 거실이다. 누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높은 단위에 누마루를 두고 주변에 난간을 둘렀다. 집의 양쪽에 붙어있는 누각은 오른쪽 누각보다 왼쪽의 누각은 높이가 높았으며 한개의 방이 딸려있으나 오른쪽의 누각은 약간 낮은듯하게 방이 없는 대청으로 형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각신동 마을 앞에 있어서 '각신서당'이라 하였으나 그후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이 고장의 영재를 모아 교육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송시열 선생의 시전(時傳)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문구 끝의 '止'를 따서 이지당(二止堂)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친필로 쓰신 “二止堂”이라는 편액과 중봉 조헌선생이 친필로 쓰신 “覺新書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그 후 퇴락한 것을 1901년 옥천읍 옥각리의 금씨, 이씨, 조씨, 안씨 등 네 문중에서 재건한 것이라 한다. 이지당은 송시열은 조헌보다 60여년 늦게 조헌이 죽고 난 후에 태어나 두 사람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지당은 옥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문화재 여행지이기도 하다.
산 속에 있으면서 산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소박하지만 은은한 멋을 자아내는 이지당, 앞 개울물 소리가 조잘조잘 글 읽는 소리처럼 들리는 꾸미지 않는 모습이 언제 보아도 좋은 곳 이지당,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비록 문짝조차 제 자리에 붙어있기 어려워 안타까움을 자아내도 이지당이 지니고 있는 멋만큼은 현대문명에 밀리지 않고 그대로의 본모습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7호로 관리되고 있는 옥주사마소는 조선시대 지방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으로 옥천지방에 속한 사마소이다. 이 건물은 조선 효종 5년에 세워진 것으로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하여 곡식을 저장해 두기 위해 국가가 설치한 창고 건물이었던 것을 고쳐서 사마소로 사용하였다. 사마소란 조선 중기 지방 생원·진사들의 협의 기구로 대개 사마시에 합격한 자가 50인 이상 되는 곳에 설치하였으며 이들의 친목도모와 정치 토론 및 교육 활동을 하는 유림 집합소이다. 1658년 효종 9년 9월에 우암 송시열선생께서 친필로 기록한 사마안과 1891년 고종 28년 입재 송근수 선생의 관성사마안과 향약절목 등 모든 기록으로 보아 백촌 김문기 선생을 비롯하여 급제한 165명이 등재되어 사마소를 중심으로 상당히 활발하게 활약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구조는 서쪽으로 부엌을 두고 동쪽으로 2개의 방과 2칸의 마루방을 두었으며 부엌을 제외한 전면의 4칸은 마루를 설치하였다. 건물의 기단은 대리석을 치석하여 가지런히 쌓아 올렸는데 석재 중에는 사찰에 세워지는 석탑의 부재들이 끼어 있어 인근의 폐사지에서 옮겨와 이를 축조한 듯하다. 마루방의 전면에는 띠살문양의 사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들어열개로 되어 있어 문을 모두 열면 개방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의 앞쪽 처마 밑에는 「沃州司馬所」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옥주사마소라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충선왕 때부터 조선 태종 13년까지 지금의 옥천이 옥주로 불러왔기 때문이다. 옥주사마소는 송시열의 중수기를 통하여 현종 15년 11월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후 고종 30년 2월에 중수한 사실을 송근수의 중수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지금의 옥주사마소는 후손들과 유림에 의하여 잘 보존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는 사마계가 조직 운영되고 있다.
◉ 난계사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21-1(국악로 5)
난계사는 난계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 1973년에 세웠다. 난계사는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다. 하나는 입구에서 외삼문까지 약 70m에 이르는 바깥공간이다. 입구에서 외삼문까지의 거리를 깊게 조성한 것은 엄숙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공간배치일 것이다. 그다음은 외삼문과 내삼문 상이에 잘 조성된 정원 공간이 있고, 마지막으로 정원 공간 뒤 한단 높은 대지에 사당을 배치한 영당공간이다. 입구 좌측에 난계의 동상과 비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입구부터 사당의 외삼문까지의 길 양옆은 조경이 잘 되어 있어 넉넉한 나무그늘아래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좋을 법하다. 난계사의 외삼문은 영당의 정문으로 정면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태이다. 맞배지붕은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이며, 지붕면이 책을 엎어 놓은 八자형으로 된 지붕이며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형의 지붕면이 보인다. 측면에서는 가구(架構)가 노출되므로 조선시대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풍판을 사용했는데 난계사의 외삼문은 풍판이 없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훌쩍 높아진 사당자리를 내삼문이 막아서고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의 사이의 공간에는 잔디밭과 배롱나무, 향나무, 전나무 등의 조경수를 심어 놓아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제 막 들어선 외삼문과는 달리 내삼문은 솟을삼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난계사(蘭溪祠)' 현판이 걸려 있다. 솟을삼문은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대문을 말하며 가운데 문을 '정문'이라하고 양쪽 문을 협문이라 한다. 보통 때는 양쪽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지낼 때 세 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 난계생가
난계박연선생은 고려 우왕4년(1378년)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세조2년(1456)에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4년(1458)3월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 했다. 난계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삼남 계우가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서이고, 난계 또한 화를 당할 뻔 했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벼슬만 파면되어 낙향한 것에서 연유된다. 난계가 낙향할 때 필마(匹馬)에 하인 한 사람을 거느린 쓸쓸한 행장에 피리 하나가 전부였다. 이때 난계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며 피리를 불었다 한다. “박연의 피리 소리에 가던 배도 멈추고 그 피리소리를 듣는 이가 모두 쓸쓸한 느낌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는 일화는 한 시대를 풍미 했던 걸출한 인물의 비애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이야기일 것이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음악과 함께한 국악의 거성 난계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말년에 닥친 불운 속에서 비피하고 바람막이할 집 한 채면 그만인 것을” 낙심천만이었을 난계의 심정을 그의 생가는 전하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 구경을 하다 멈춰선 발길. 장독대 앞이다. 올망졸망한 장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집의
규모와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난계생가의 장독대만이 이곳이 고위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국악의 거성 난계의 생가임을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 1경 달도 머물다 가는 월류봉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111
높이 약 400m의 봉우리로 동서로 뻗은 능선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달이 머무르는 봉우리’라는 뜻의 이름처럼 직립한 절벽에 걸려 있는 달의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산 아래로 금강 상류의 줄기인 초강천이 흐르고 깨끗한 백사장, 강변에 비친 달빛이 아름다워 양산팔경에 비할 만하다. 작은 봉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5봉을 이루고 밤이면 달마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봉우리 사이에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 백화산을 굽이굽이 돌아 나오는 석천과 초강천이 만나 휘돌아 나가며 아름다운 내를 이루고 한반도의 지형이 전설을 만드는 강가에 우뚝 솟은 월류정은 한 폭의 그림이며 시한 수가 저절로 나오는 곳이다. 깎아 세운 듯한 월류봉의 여덟 경승지를 한천팔경이라 부르는데 우암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땄다.
• 2경 산양벽(山羊壁) : 병풍같이 깎아지른 첫째와 두 번째 봉으로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 새들의 보금자리이며 수목이 척박한 돌 틈으로 뿌리를 내리는 자연미가 빼어나다.
• 3경 청학굴(靑鶴窟) : 월류봉 중턱에 있는 자연동굴로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고 청학(靑鶴)이 깃든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 4경 용연대(龍淵臺) : 월류봉 앞에 있는 절벽으로 산줄기가 평지에 우뚝 솟아나와 용연(龍淵)에 이르러 형성된 돌머리 모양의 대(臺)이다.
• 5경 냉천정(冷泉亭) : 법존암 앞 모래밭에서 솟은 샘줄기가 여덟 팔(八)자로 급하게 쏟아 붓듯이 흘러나와 팔연(八淵)에 이르는데 한여름에도 무척 차다.
• 6경 법존암(法尊菴) :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암자의 위치는 현재 황간면 원촌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 7경 사군봉(使君峯) : 황간면 뒤편 북쪽에 있는 명산으로 ‘나라의 사신(使臣)이 되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설경으로 이름이 나 있다.
• 8경 화헌악(花軒嶽) : 한천정 뒤쪽의 산봉우리. 꽃과 나무가 무더기로 있는 까닭에 ‘화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처럼 봄이면 진달래, 철쭉꽃이 피어 만산홍을 이룬다.
• 월류봉을 읊은 시로는 조선 후기의 선비 일석 박유동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는 이 시에서 월류봉에 살았던 선계(仙禽)의 학과 한천에 사는 신룡(神龍)을 노래했다. 박유동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중봉 조헌의 생질이다. 그는 충주 박씨로 이곳 황간에 태어났으며 참봉을 지냈다.
월류봉은 끊어진 듯 다시 이어지고 月留峰形斷復連
화헌악 아래 흐르는 물 반석을 휘감았네. 花軒水勢更盤旋
푸른 산양벽은 마치 비혈처럼 보이는데 山羊綠壁如飛穴
고을 원님은 묏부리 올라 두견새 되려하네. 縣主登岑學化鵑
옛터에 암자는 사라져 법만 남았고 菴廢法存餘古址
옛사람의 글과 글씨는 한천을 생각나게 하네. 書編思錄憶寒泉
선학은 날아갔으나 오히려 구름은 남고 仙禽一去雲猶在
어찌된 일인지 신룡은 못 속에 잠겨있네. 何事神龍久蟄淵
▶ 한천정사(寒泉精舍)
한천가든 바로 오른쪽에 한천정사가 있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머물며 작은 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한 곳이다. 후세에 우암 선생의 제사를 모시고 글을 가르치는 한천서원을 세웠다가 고종 초에 철폐되었다. 이후 후학들이 다시 유림회를 결성하고 1910년에 한천정사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1칸반)의 목조한식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으로 방이 설치되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은 자연석 주초위에 4모기둥을 세우고 도리집으로 하였다. 주변에 막돌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일각문이 있다. 관리가 되지 않고 오래 방치된 듯, 마치 시골 동네의 허름한 제실처럼 보인다. 마루 중앙에 한천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주련)에는 한천팔경 이름이 차례로 적혀있는데, 가운데 오른쪽 기둥에 월유봉(月留峰), 왼쪽 기둥에 사군봉(使君峯)이라는 글씨도 써있다.
▶ 송우암유허비
한천정사에서 곧바로 길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충북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된 송우암유허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가르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정조3년(1779)에 세운 것이다.
◉ 반야사와 문수전 :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번지
반야사는 영동의 백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백화산은 포성봉(捕城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충청북도의 영동과 경상북도의 상주의 경계가 되는 빼어난 절경의 산이다. 백화산(白華山)이란 이름은 ‘티 없이 맑고 밝은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사시사철 그 풍경을 다양하게 변화하며 그때마다 찾는 이를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봄에는 능선마다 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푸르른 계곡의 물이 시원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온 산하를 물들이고, 겨울에는 기암괴석이 몸을 드러내 그 웅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백화산의 산봉우리 사이를 따라 석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있다. 멀리 상주방면에서 발원해 백화산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흐르는 개울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석천의 모습이 마치 연꽃의 모양과 같으며 이 연꽃 모양으로 흐르는 개울의 한 중심에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고, 이 포근한 대지에 반야사가 위치하고 있다. 사찰의 명칭을 반야(般若)라고 한 것으로 이곳이 문수도량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개울을 따라 잠시만 상류로 올라간다면 백화산과 석천이 어울린 절경이 눈앞에 나타나고 오른편으로 높은 절벽이 위치하고 있는 꼭대기에는 문수전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이다. 반야사의 스님이 어느 날 아침 해가 오를 무렵 우연히 이곳에 왔는데 마침 앞 못에서 문수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못은 용소(龍沼)라고 불리며 아주 깊은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수동자는 목욕을 하고 나서 그 옆에 솟아있는 절벽위에 별안간 올라앉아 멀리 사방을 바라보고 아침 해돋이를 예배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후 이곳을 망경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망경대에 올라 문수전 앞에 서면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이토록 힘차고 아름다운 전경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마치 눈앞에 병풍을 펼쳐놓은 듯 꿈틀대는 산들이 서로 다투어 참배자에게 달려드는 모습이다. 영동인이면서 농서 촬요신서를 쓴 박흥생(朴興生)이 반야사를 찾아 시 한 수를 남겼는데 시비를 세워도 될 만큼의 명시로 알려져 있다.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 집 생각이 전혀 안 나네 / 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 /
대 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 / 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 /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 스님은 이미 공부를 끝냈는데 / 읽던 책이 상 위에 남았구나.'
▶ 반야사에 얽힌 전설
- 문수동자의 출현과 세조이야기
반야사는 1464년(세조 10년)에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의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세조 10년 2월에 복천사(법주사 복천암)에서 법회를 마치고 이곳에 들렀다가 이 절을 중창하라 명하고 회향법회를 열어 여러 보살님께 공양드렸다고 한다. 이 때 문수보살이 나무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더니 세조를 반야사 뒤쪽 계곡인 망경대(望景臺) 영천(靈泉)으로 인도해 목욕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문수보살은 '왕이 불심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자비가 따를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뒤 나무사자를 타고 명경대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세조는 문수보살이 시키는데로 영천에 목욕을 하였더니 지금까지 세조를 괴롭히던 피부병이 말끔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세조가 어필(御筆)을 하사하여 지금까지 이 절에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확인할 바는 없다. 절 이름이 반야사인 것은 문수보살의 반야, 곧 지혜를 상징한 것으로서 반야사가 문수보살 신앙과 관계있음을 뜻한다. 세조가 피부병으로 말년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 바, 전국의 수많은 온천을 찾아다니고 절집들 또한 두루 찾아다니며 치성공양을 드린 불심 깊은 왕이었다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 황도령과 처녀귀신
고려 충숙왕 때에 글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18세의 황도령이 황간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석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백일장에서는 물‘水’자와 뫼‘山’자를 몰라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크게 상심한 황도령은 그 길로 황간 반야사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학식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우스님께 학문을 배우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우스님이 가만히 보니 황도령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황도령이 한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었다. 이에 일우스님은 황도령 전신에 금강경 5,149자를 빽빽이 써넣고 옷을 입혔는데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이 그 금강경의 힘에 눌려 괴로워하다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도망쳤다. 그만 일우스님이 금강경을 쓸 때 황도령의 귀부분만 빼먹은 것이다. 그러나 황도령은 금강경 덕분에 살아났고 그 인연으로 출가했는데, 귀가 없다하여 ‘무이법사(無耳法師)’ 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 무학대사 주장자와 배롱나무
반야사 경내 극락전 앞에 있는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가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송계서원 유허비각 :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산 21-2
두시언해(杜詩諺解)는 두보의 시를 한글로 처음으로 번역한 작품을 말한다. 이를 번역한 사람은 유윤겸, 유휴복, 조위 등 3인이다. 세종 때 시작해 성종 12년에 완성됐다.
조위는 1454(단종 2)~1503(연산군 9)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며 김종직의 문인이다. 1475년(성종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정자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를 한 뒤, 1479년 영안도경차관이 되었다. 여러 차례 시제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고, 유호인과 함께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검토관·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다. 그 후 지평·문학·응교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표리·녹피 등을 상으로 받았다. 1491년 검상·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도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하여 올리자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게 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직했다.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서 체포·투옥되었다. 이극균의 극간으로 죽음을 면하고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죽었다.
김굉필·정여창과 더불어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저서로〈매계집〉이 있다. 후일 황간 송계서원, 금산 경렴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조위는 영동과 연고를 맺고 있으며 그의 위패가 봉안된 송계서원은 고종 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어 훼철되었으나 광무 2년(1898)에 지방 유림들이 유계를 창설하여 매년 음력 3월 보름날 육선생의 위패를 묻은 단소에서 배향제를 받들어 오고 있으며, 1956년 4월 송계서원 유허비각을 건립하였다.
조위가 순천으로 유배됐었을 당시 국문학사상 제 1호 유배가사로 평가받고 있는 만분가(萬憤歌)를 썼는데 귀양살이에 대한 원통함과 주군 성종에 대한 하소연을 담고 있다.
'천상백옥경 / 십이루 어디멘고 /
오색운 깊은 곳에 / 자청전이 가렸으니 /
구만 리 먼 하늘을 / 꿈이라도 갈동말동 /
차라리 죽어져서 / 억만 번 변화하여 /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 /
이화 가지 위에 밤낮으로 못 울거든 / -<만분가>중 일부
조위는 끝내 유배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49살 나이에 그곳에서 죽었다. 사망 원인은 자세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그가 죽은 후
얼 마 안 있어 갑자사화(1504)가 일어났는데 그의 시신은 다시 부관 참시되었다.
◉ 김홍숙씨 자택 1박 2일 :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 495번지
** 아쉽게도 적상산은 동절기에는 개방을 않는 관계로 사고와 안국사 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룹니다.
오는날
** 영동 양산팔경
영동의 양산팔경은 말 그대로 여덟 가지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여덟 개의 보물이다. 천년고찰 영국사, 비봉산, 강선대, 용암, 봉황대, 함벽정, 여의정, 자풍당이다. 양산팔경은 계절별로 보는 맛과 품는 느낌이 다르다고했다. 숲과 강물, 산새와 바람, 한들거리는 들꽃, 숨 쉬는 장독, 흐르는 물살, 풍경소리 모두가 가슴을 뜨겁게 하며 절로 시심이 우러나오게 하는 곳이다.
◉ 1경 영국사와 은행나무 : 영동군 양산면 영국동길 225-35(누교리 1397번지)
영국사(寧國寺)는 신라 때의 고찰이다. 고려문종 때 대각국사가 국청사라 했던 것을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안정된 삶을 기원함으로서 국난을 극복했다 하여 영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국사에는 5가지 보물과 1개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보물 제532호인 영국사부도(浮屠), 보물 제533호인 영국사삼층석탑, 보물 제534호인 영국사원각국사비, 보물 제535호인 영국사망탑봉 3층석탑과 천연기념물 제223호인 영국사의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이들 보물과 천연기념물 중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영국사의 은행나무이다. 나무의 둘레를 치자면 어른 서넛이 손을 맞잡고 둘러서야 나무를 제대로 안을 만큼 거대하다. 공식적인 나무의 나이는 1000살로 알려져 있으며 실측 자료에 의하면 높이 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의 거목이다. 특히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은행나무로 자라고 있는 신기한 광경도 이 은행나무의 유명한 볼거리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상륜부가 잘 보존된 완전한 형태이다. 탑신을 받히고 있는 2층의 기단 중 위의 기단 네 면에 새겨진 안상(眼象)이 매우 크고 넓은 것이 이채롭다. 기단 맨 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치켜 올림이 있고,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 올려진 상태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각 4단씩인 것이 특징인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하여, 조형미술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 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2경 강선대. 8경 용암 : 양산면 봉곡리 산 43번지
강선대는 선녀가 목욕하기 위해 내려오던 곳이라 하는데 보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강변에 솟은 바위를 포위하듯 빼곡한 소나무, 아담한 정자, 정자를 품고 있는 숲과 강물과 맑은 햇살과 바람…. 어디선가 선녀의 옷 벗는 소리와 두레박으로 하얀 속살에 물 뿌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하니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아니하겠는가! 양산8경 중 2경과 8경이 송호국민관광지 금강 가에 발을 적시고 강물에 몸을 적시며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두 가지 명물이 가까운 곳에서 서로 마주보게 된 사연은 설화로 전해지는데 이름 하여 제2경인 강선대(降仙臺)와 제8경인 용암(龍岩)에 얽힌 설화이다. 이 두 명물에 얽힌 설화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용암이 전하는 설화가 강선대를 제 설화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재미있다. 강선대는 양강(양산면 지역에서 금강을 일컫는 이름)의 맑은 물이 하도 좋아서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선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양강의 바위로 떨어졌는데 수면 위로 불쑥 솟은 바위가 바로 용암이다. 이 바위는 송호국민관광지 강변 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강선대를 동북쪽으로 마주보고 있다. 용암의 설화를 방증 하는 증거의 절묘한 배치이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강선대에서 바라다 본 양강은 주변의 연능과 잘 어우러져 아름답고 가곡리 강가 모래톱을 적시고, 그 건너 송호국민관광지도 함께 적시며 흐르는 금강의 유장함과 강선대의 소나무 가지가 그 풍경에 걸쳐져 더욱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다한다.
◉ 3경 비봉산 6경 여의정 :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비봉산은 양산면 수두리에 우뚝 솟아 있는 산으로 높이가 460m이다. 낮은 구릉지에 속하지만 양산면에서는 비교적 높다. 산세보다 정상에서의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산책 삼아 정상에 오르면 금강과 양산면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비단 강 숲 마을의 강변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아름다우며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고층산 또는 남산이라 불리다 훗날 봉이 난나고 해서 비봉산이라 불렀다한다.
여의정은 송호국민관광지 솔밭 바위 위에 세워놓은 정자로 만취당 박응종 선생이 풍류를 즐겼던 곳이며 방문객에게 양산면 일대와 그곳을 휘도는 금강의 장관을 선사한다. 3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소나무 수백그루가 주변에 빽빽이 들어서 소나무 숲의 장관이 함께하는 곳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을 한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의 규모를 갖는 이 정자는 울퉁불퉁한 바위 위와 바위와 바위 사이의 틈새를 메워 편평히 기초를 다진 후 그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지은 정자이다. 여의정은 주변이 평지여서 마냥 올려다 봐야했던 시선을 정자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는 여유로움을 주어 한결 시원하고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한다.
◉ 4경 봉황대◉ 5경 함벽정 :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비단강 숲마을 강변
봉황대는 양산면 수두리 들머리 양강 위에 있으며 8경 중 으뜸가는 경치로 꼽힌다. 처사 이정인이 놀던 곳으로 누각은 없어지고 바위만 남아있다. 양산면 수두리, 양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봉황대는 옛날 봉황이 깃들던 곳이라 전해진다. 처사 이정인이 소일하던 곳이었으나 누각은 오래 전에 없어지고 대(臺)만 남아 있다. 조망이 매우 아름다워 강선대와 비교되곤 한다.
송호리에서 금강을 따라 약 500m 올라가면 강가, 커다란 나무에 보일 듯 말 듯 수줍게 서 있는 정자가 함벽정이다. 함벽정은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이 강변 백사장에는 물새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봉산 낙조를 볼 수 있는 위치가 하도 좋아 옛날부터 시 읊고 글 쓰는 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강론했다하며, 함벽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경치를 ‘함벽정팔경’ 이라 해 따로 즐겼을 정도로 풍치가 탁월하다.
◉ 7경 영동자풍서당 : 충북 영동군 양강면 두평리 561
조선 중기의 유학자 동천 이충범(1520∼1598)이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조선 초기에 양강 강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하는데, 인조 4년(1626) 이후 숙종 46년(1720)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풍곡당이라고 부르다가 광해군 6년(1614)에 한강 정구 선생이 이곳에 머무르며 자법정풍(資法正風)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는 뜻으로 자풍당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으로 18세기경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건물이다. 현재 매년 10월 19일 제사를 지내며, 이곳의 책 읽는 소리는 양산 8경의 하나이다.
◉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원골폭포
인위적인 구조물 없이 자연암반을 배경으로 삼아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원골폭포의 특징이다. 폭포가 조성된 원골지역은 맑은 금강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를 주재료로 이용한 어죽, 매운탕, 도리뱅뱅이 등 금산만의 특별한 민물고기 요리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인삼의 고장답게 인삼을 곁들인 이 고장 토속음식인 ‘인삼어죽’은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다가 어느 날 방송을 타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천내리 일대에 인삼어죽을 주 메뉴로 취급하는 식당이 늘어나다보니 인삼어죽마을이라는 닉네임을 달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 칠백의총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1만 5천의 왜군과 싸우다가 수적 열세였지만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장렬히 전사한 700 의승병들의 유해를 모신 호국영령의 성지이다. 사적 제10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이곳은 조선 선조 36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만행에 의해 의총은 허물어지고 순의비는 폭파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고 일부 복원 되었다가 1963년 국가에서 묘역 확장과 함께 순의비를 완전하게 복원하고 1970년에 기념관과· 칠백의사순의탑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순의탑은 칠백의총 사역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전적지인 연곤평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는 이 탑에는 한글로 ‘칠백의사순의탑’이라, 13.8m의 탑신 전면에 새겨 넣었다. 글자가 새겨진 전면 상단부는 동으로 제작된 창과 방패를, 하단의 귀부는 화강암에 용을 새겨 놓아, 칠백의사의 의로운 죽음을 장엄하고 있다.
임진왜란당시 호국의 일념으로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 조헌선생은 율곡 이이, 토정 이지함과 같은 역사적 인물로부터 수학하고 학문을 교류 했을 만큼 학식이 뛰어난 선비이면서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견하고 수차 상소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