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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소유 재앙, 육체 매임 재앙>의 줄거리 :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내리시는 재앙들은 선민 이스라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는 별명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완악함과 목이 곧음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내려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재앙 역시 선민에게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완악함의 성분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로부터 만물이 있게 되는 이 우주적인 방향성에 저항하는 완악함 속에서 그 대가로 모든 인간은 세상 소유 재앙과 육체 매임 재앙을 날마다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세상 소유 재앙, 육체 매임 재앙
(출애굽기 9:1~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2.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3.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돌림병이 있을 것이며
4.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가축과 애굽의 가축을 구별하리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고
5. 여호와께서 기한을 정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가 내일 이 땅에서 이 일을 행하리라 하시더니
6.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9.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
10. 그들이 화덕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악성 종기가 생기고
11. 요술사들도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모세 앞에 서지 못하니 악성 종기가 요술사들로부터 애굽 모든 사람에게 생겼음이라
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본문에는 다섯 번째 돌림병 재앙과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 자체가 재앙입니다. 또 우리 의식이 육체에 매이게 되는 것이 재앙입니다. 이것은 모두 완악함이 유지되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완악함의 성분입니다. 만물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있게 된 자로 살지 않고 스스로 있게 하려는 자로 산다면 우주적 방향성을 등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완악하게 되는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러한 완악함 속에서는 세상을 소유하는 것이 재앙이 되고, 육체에 매이는 것이 재앙이 됩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심한 돌림병은 가축에 임한 악성 전염병입니다. 가축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미크네’는 재산, 소유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당시 가축은 가장 대표적인 재산이었습니다. 요새는 재산이라 하면 부동산, 현금, 주식 등을 비롯한 다양한 항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소유나 재산이라고 하면 가축이 대표적 항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축들에게 심한 돌림병이 생겨서 애굽 사람들이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하십니다. 돌림병은 결국 소유에 대한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림병 재앙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영적인 관점에서 소유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 떠돌고 있는 어설픈 소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러 있습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삶의 양태를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으로 구분했습니다. 쉽게 말해 소유 양식이란 길거리를 가다가 아름다운 꽃을 보면 꺾어서 갖고 싶어 하는 성향입니다. 그리고 존재 양식이란 그 아름다운 꽃을 가지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을 즐기려는 성향입니다. 존재 양식으로 살면 온 세상과 하나가 되는 풍성함을 누릴 수 있으며 더 자발적이고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소유 양식으로 살면 마음이 특정 대상에 매이게 됩니다. 여기에는 풍성함과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작은 난초 하나에도 매여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유는 마음을 매이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유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소유는 내 마음을 묶을 수 있고 내 마음을 매이게 하는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소유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가 소유보다 우월함을 주장했고, 법정 스님은 무소유가 자유를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어설픈 존재와 소유에 관한 이해의 문제점은 참으로 소유해야 될 대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유하면 안 될 것들을 문제시합니다. 그러나 소유는 인간의 특권입니다. 소유함으로써 마음이 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소유의 대상이 올바를 때 마음이 매이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소유와 존재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존재가 결정됩니다. 내 마음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소유하는 것에 마음이 매이게 됩니다. 인류의 스승이라는 분들은 이러한 소유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매인다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 마음이 소유한 것에 가서 닿고, 소유한 것의 기운에 취하고, 소유한 것의 기운을 즐기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보물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유하되 땅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늘에 쌓을 수 있는 것을 소유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소유는 내 마음의 운명과 팔자를 결정합니다. 사람은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대상에게 마음을 붙입니다. 그 소유는 내 마음에 기운을 집어넣습니다. 그 기운에 취하게 하고, 그 기운에 사로잡혀 즐기게 합니다. 이로부터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소유의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있게 된 것들은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있게 된 것들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없어질 것들이 나를 규정한다면 나도 없어질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해야 하는 대상은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진짜 좋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아무리 좋아해서 가져도 마음을 채우지 못하는 가짜 소유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소유해야 하는 대상은 영원하고 불변해야 합니다. 소유는 내 존재의 성격을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서 본 6장 7절에서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씀을 풀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가지실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가질 수 있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소유의 대상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을 가지면 하나님의 속성이 나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나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기에 나도 하나님의 있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원히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기에 나도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이처럼 참 소유인 하나님은 가지는 자의 마음을 규정하시기에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완악함 속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처럼 행동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있게 하려 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없게 하려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완악함 속에서 이 세상 것들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 것을 소유하는 방식은 꼭 내 주머니 안에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의 형태로 마음에서 어떤 대상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갖지 못했더라도 소망할 때 마음은 이미 그 대상에 의해 규정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지만 마음으로 돈을 간절히 소망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돈에 의해 규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악함 속에서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나를 통째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고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유가 무엇이며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섯 번째 돌림병 재앙의 의미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가축에 심한 돌림병으로 다 죽게 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소유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규정합니다. 내 소유에 의해 나의 존재가 규정되고 나의 운명과 팔자가 규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완악함 속에서 일어난 다섯 번째 재앙에 의해 소유를 대표하는 가축이 돌림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소유한 세상 것들은 돌림병으로 죽은 가축의 사체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세상 것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하나님과 천사들은 돌림병에 걸려 죽은 가축의 사체처럼 보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돌림병에 의해 죽은 가축들로 말, 나귀, 낙타, 소, 양이 언급됩니다. 우리에게 대표적인 가축은 소나 돼지이기에 나귀나 낙타나 양은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돈이라고 생각해 보면 가치라는 측면에서 확실히 와닿으실 것입니다. 내가 완악함 속에서 돈을 소유한다면 마음은 돈에 닿아서 돈의 기운에 취하게 됩니다. 나의 마음은 곧 영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을 보실 때 느끼시는 가치는 구제역에 걸려 죽은 소나 돼지의 사체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돌림병 재앙의 의미는 무시무시합니다. 사람은 완악함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스스로 있는 자처럼 행동합니다. 원하는 것은 있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없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악함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은 하나님을 등졌기에 당연히 세상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소유는 인간의 특권이자 본성이기에 소유 자체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소유하느냐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에 의해 인간은 규정되기 때문입니다. 돌림병 재앙은 세상 것을 소유할 경우 하나님은 나를 어떤 존재로 보시는지를 비유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여 소유합니다. 세상 것에 마음이 닿고 세상 것의 기운에 취합니다. ‘나는 이것을 가졌다.’는 의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제역에 걸려 죽은 가축의 사체처럼 보십니다.
이러한 돌림병 재앙의 의미를 염두에 둘 때 아주 무서운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특권 의식입니다. 특권 의식은 이 세상에서 탁월하거나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많이 가질 때 생겨납니다. 실제로 뉴스에 나왔던 사건입니다. 강남의 고급 주택 단지에 목욕탕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우미 아주머니가 목욕탕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노발대발했다고 합니다. 고급 주택 단지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목욕탕에 어떻게 감히 도우미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주민은 엄청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것을 가졌기 때문에 갖는 특권 의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권 의식에 사로잡힌 고급 주택 단지의 주민들을 구제역에 걸려 죽은 가축의 사체처럼 보십니다.
이러한 특권 의식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30년이 지난 AD. 70년 경에는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세상에서 없어지고 유대 종교 또한 멸절됩니다. 이스라엘은 AD. 70년에 망하기 전까지 여호와 하나님 신앙으로 인한 이 세상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들은 돌림병으로 죽은 가축들의 사체였습니다. 물론 특권 의식은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도 가축의 사체 같은 자기규정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특권 의식은 완악함의 무서움을 잘 보여줍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세상 것을 가지게 되면 세상 것을 즐기려 하고, 세상 것에 취하는 동안 사람의 존재는 세상 것에 의해 규정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보실 때 어느 정도 가치 있고 존엄성 있게 보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식량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돌림병에 죽은 가축의 사체처럼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을 살펴봅니다. 그런데 악성 종기가 생겨나는 과정이 특이합니다.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필이면 왜 화덕의 재를 두 움큼을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하신 것일까요? 악성 종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쉐힌’은 불에 탄다, 뜨거워진다, 끓는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솨한’에서 유래했습니다. 악성 종기는 고열, 극심한 가려움, 물집과 화농성 고름을 유발하는 무서운 피부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화덕에서 나온 재도 마찬가지로 뜨거움을 연상시킵니다.
악성 종기는 완악함의 여섯 번째 성분으로써 몸에 대한 관심이 과열 상태가 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떨기나무 불꽃을 생각해 봅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서 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완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만물이 있게 된 우주적 방향성을 올라타고 살아갈 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몸은 떨기나무가 되고,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몸에 대한 관심이 과열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서도 재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몸에 대한 일로 정신이 과열될 때는 몸에도 과열 현상이 나타납니다.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은 꼭 질병에 걸리는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성 종기 재앙은 출애굽 때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만 악성 종기 재앙의 의미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세로부터 3,500년이 지나는 동안 출애굽기를 읽은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섯 번째 재앙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있었던 완악함의 성분들을 정리해 보면 좋습니다.
완악함을 유지하면서 내가 주체가 되면 피가 누출된 상태에서 가짜 생명을 따라갑니다. 가짜 생명을 따라가면 개구리로 상징되는 거짓 영의 토대 위에서 살게 됩니다. 그럴 때 모기 재앙이 상징하는 대로 끊임없이 모기에 물리듯 마음이 세상의 자극을 받으며 쫓기듯이 살게 됩니다. 또한 파리 재앙이 상징하는 대로 하나님 뜻에 없는 시체와 같은 일에 손대고 관계함으로써 생각의 구더기와 말과 행동에 파리 떼가 뒤덮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돌림병 재앙이 의미하는 바가 나타납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 보실 때 사람의 가치와 존엄이 가축의 사체와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살 때 나타나는 일이 과열 현상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재앙인 악성 종기를 통해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전신에 알레르기나 극심한 가려움증을 겪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피부 전체가 부풀어 극심한 가려움이 생기면 의식이 온몸에 집중됩니다. 누워도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모든 의식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몸에 집중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악성 종기 재앙은 단순히 몸의 질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악함 속에 나타나는 증상으로써 우리의 의식이 100% 몸에 몰입되는 과열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2장 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완악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매여서 평생을 육체에 종노릇 하며 삽니다. 한평생 육체를 걱정하고, 육체를 가꾸고, 육체를 보존하는 일에 소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으면 의식이 육체에 몰입되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됩니다. 지금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의식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를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불의 에너지에 의해서 필요한 일을 다 했다면 떨기나무에는 어떤 미련도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악함의 특징은 떨기나무 같은 육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 전반에 깔려 있습니다. 의식이 육체에 예속되는 무서운 재앙입니다.
우리는 몸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대한 의식의 과열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이란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 의식의 대부분은 천국을 향해 켜있게 됩니다. 의식이 천국을 향해 집중되고 있기에 몸에 대한 과열 현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세수하고, 거울 보고, 로션을 바르는 정도이고, 배고프면 밥 먹는 정도입니다. 추우면 옷을 두껍게 입고, 더우면 가볍게 입습니다. 몸에 대한 의식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대신 의식의 대부분은 하늘을 향하여 천국을 켜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악함으로 인해 천국을 향하고 있어야 할 의식의 80~90%를 육체를 향해 다 쏟습니다. 마치 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견딜 수 없을 때처럼 의식이 육체에 전부 몰입됩니다. 그리고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에만 관심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해 의식은 점점 꺼지고 흑암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가 내 마음이 느끼는 모든 있음의 근거입니다.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음이 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의식을 빼앗길수록 진짜 소유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의 기운에 취할 가능성이 차단되기에 오직 이 세상 것들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러한 상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마치 돌림병으로 죽은 가축의 사체처럼 취급하실 것입니다.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을 원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마치 악성 종기가 난 것처럼 의식이 육체에 과도하게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의식이 어느 정도 육체에 몰입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악성 종기가 온몸을 뒤덮으면 가려움 때문에 오직 몸만 의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나는 그 정도로 몸을 의식하지는 않는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꼭 몸이 아니더라도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을 의식합니다. 몸으로 만나는 사람, 몸으로 하는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몸으로 가져야 하는 돈이나 물건들에 집중합니다. 몸으로 접하는 뉴스나 소식들에 집중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만나는 이런 저런 대상들에 대해서 의식을 빼앗기고 있다면 악성 종기 재앙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내 육체에 극심한 가려움증과 고름을 동반하는 종기가 생겨서 긁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상번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상번제의 의미를 따라서 내 의식은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내 의식이 많은 부분 죽지 못한 채 육체에 집중하여 화덕의 불같이 과열되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재앙입니다. 몸에 대한 관심은 몸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해서 몸이 만나는 세상 것들로 뻗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등지는 완악함 속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평생 몸을 돌보고, 가꾸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는 일에 엄청난 시간을 들입니다. 또한 몸을 통해 만나는 세상 것들에 모든 의식을 다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에 대해 죽으면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의식의 대부분을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쓰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의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이 진행됩니다. 내 몸에 대해서는 의식의 과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의식이 뻗어나가기 위한 본거지는 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몸이 의식의 본거지가 된다면 몸을 가꾸고 유지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몸으로 만나는 것들에 의식이 깊이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은 이 상태가 무서운 재앙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다섯 번째 돌림병 재앙은 세상 소유의 재앙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악성 종기 재앙은 육체 매임의 재앙입니다. 완악함에서 비롯된 이러한 재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도 활성화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이 곧음과 바로의 완악함은 같은 뜻입니다. 바로의 완악함에 대해 내려진 재앙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작용하는 세상 소유의 재앙과 육체 매임의 재앙을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근절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의 기쁨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서 활발하게 살아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더라면 죄와 저주 속에 빠져 완악함을 당연한 것으로 부리며 살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면 열 가지 재앙은 지금 당장 경험할 수 있는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완악함의 독소 성분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늘도 우리의 심장 곁에 꽂고 살아갈 수 있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