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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산을 오르며
안 기 호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올 여름은 짜증이 날 정도로 덥고 길었다. 9월에 접어들었는데도 햇볕은 여전히 강렬한 열기를 토해낸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아침나절 우암산을 오르다가 발에 밟힌 낙엽들 사이로 맨 흙이 드러난 완만한 경사로에서 뜻밖에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면을 목격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몸집이 가느댕댕한 지렁이 한 마리가 작은 개미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은 볼품없었지만 처절하고 참혹했다. 등산로는 좁고 꾸불꾸불한데다 길가엔 잡풀과 키 작은 나무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고, 가끔씩 소나무 뿌리가 흙 위로 드러난 길 위엔 다양한 종류의 나뭇잎 잔해들이 흩어져 있어서 하마터면 이놈들을 무참히 짓밟을 뻔했는데, 우연히 눈에 띄어 화를 면했으니 다행이었다.
개미는 아주 작은 종(種)이어서 몸피는 지렁이의 수백분의 일도 안될 만큼 보잘 것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개미는 포식자이고 지렁이는 먹잇감이었다. 지렁이는 위기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며 도망치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점점 불리해져갔다. 몸뚱어리를 뒤틀며 움직일수록 길바닥의 미세한 마른 흙가루가 지렁이의 촉촉하고 끈끈한 표피에 달라붙었다. 마치 인절미에 떡고물을 묻히듯 자꾸만 제 몸통에 스스로 흙가루를 처바르고 있다.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결국 치명적으로 위기를 불러왔다. 지렁이는 이내 온통 흙가루 범벅이 되었고, 꿈틀거림은 점점 무디어졌다. 그러나 개미들은 페로몬을 분비하여 동족들을 불러 모으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개미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승패는 물론 개미들의 것이었다. 선홍색의 윤기가 흐르던 지렁이는 어느새 거무죽죽하게 변색되었다. 개미가 물어뜯으며 독성물질로 지렁이를 마비시켰는지, 아니면 온몸에 처발라진 흙고물 때문인지 지렁이의 몸부림은 이미 맥없이 멎어 버렸다.
땅속에 서식하는 지렁이가 왜 지표면에 나와서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맥을 못 추고 개미의 먹이가 된 걸까? 땅속에서만 살다보니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왔다가 ‘하루살이 비 오는 날 태어나듯’ 유별나게 재수가 없어서 살인강도 같은 흉악범을 맞닥뜨린 것인가? 아니면 지표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2007년에 명예퇴임을 한 나는 이삼일이 멀다하고 우암산엘 오른다. 늘 목적지는 정상이지만 꼭대기까지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있어 이리저리 바꿔가며 길을 잡는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즐겨 오르는 길은 말탄재에서 오르는 길이다. 안터벌을 지나 청주대학교 예술대 위의 우암산 도로 삼거리에서 박물관 쪽으로 삼백여 미터 쯤 가면 말탄재다. 도로변에 안내판이 서있고 친절하게 말탄재 유래까지 적어놓았다. 아마도 청주시에서 우암산 걷기 길을 조성하면서 새로 세운 듯하다. 여기서 차도를 건너면 우암산 정상까지 1·2㎞를 알리는 화살표 등산 안내 표지가 길가에 서서 등산객을 반긴다.
내가 이 코스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등산로의 대부분이 오롯이 사람들이 오랫동안 밟고 오가는 것만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단이 없으니 보폭 조절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한결 걷기 편하다. 게다가 이 길은 제법 긴 경사가 완만한 소나무 숲길을 품고 있어 더 마음에 든다. 사람의 심리란 엇비슷한 것이어서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애용한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던 길이었으나 이제는 잘 다듬어진 등산로보다 더욱 사랑받는 코스가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두를 것도 없이 쉬엄쉬엄 오른다. 자주 산을 오르다 보면 어제의 풍경이 오늘도 그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거나, 일주일 정도 시차를 두고 비교해 보면 숲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쉼 없이 바뀌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또 이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동식물들의 생태에서 이따금 흥미로운 광경들을 목격하곤 한다.
가끔 여러 색깔로 몸치장을 한 이름 모르는 새들과 조우하기도 하고, 여태 들어보지 못한 별스런 새소리를 듣기도 한다. 새들의 지저귐은 혼잡한 도시 소음에 찌든 귀를 청량하게 씻어준다. ‘작은 몸피에서 어찌 저리 높은 고음이 나오는 걸까?’ 또 소리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휘감기는 리드미컬한 소리의 높낮이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쾌하고 오묘한 음색은 정말 경이롭다. 가히 뭇사람들이 ‘꾀꼬리가 노래한다,’ 고 표현할 만하다.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아서 미처 여물지도 않은 잣 꼬투리를 어떤 놈이 물어뜯었는지, 짓씹어서 길바닥에 수북이 떨어뜨려놓았다. 나는 솔방울의 잔해를 보고서야 이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수없이 이 나무 곁을 지나쳤지만 잣나무인지 몰랐다. 게다가 이놈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잣나무는 소나무와 쉽게 구별되지 않아서, 군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들 중 하나인 그저 그런 소나무려니 하고 늘 관심 없이 지나칠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위를 잘 살펴보니 청설모가 나무를 부둥켜안고 숨어 있다. 인기척을 느끼면 잽싸게 요리조리 위치를 바꾸면서 제 몸을 숨기려한다. 다른 나무로 달아나기도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주위를 맴돌며 결코 제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놈도 이미 사람들의 시달림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도시에서 사는 지혜를 터득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암수, 아니면 수컷 두 마리인지 알 수는 없지만, 서로 희롱하는 것인지 먹이경쟁을 하는 것인지 나뭇가지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의기양양하게 나무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꼬리를 물듯 줄달음질친다.
그런가 하면 큰 나무들이 제법 많은 정상에 이르는 기슭에선 가끔씩 딱따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는 새가 조그만 부리로 나무를 찍을 때 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서 골짜기를 건너고 등성을 넘는다. 인기척을 느끼면 금세 하던 일을 멈추고 경계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가끔 놈을 온전히 볼 때도 있다. 숨죽이고 살펴보면 딱따구리는 두 발을 나무에 밀착시키고 날카로운 발톱을 죽은 나무껍질에 박고 수직으로 매달려서 자신이 목표로 하는 곳을 열심히 찍어댄다. 그 때마다 떨어져 나온 나무 부스러기들이 날리기도 하고 제법 큰 조각들은 아래로 떨어져 내려 나무 아래엔 제법 많은 부스러기가 톱밥 같이 쌓이기도 한다. 내겐 ‘다다다닥 다다닥’ 경쾌하게 메아리치는 숲속의 울림을 마음껏 듣는 것이니 산을 오르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두 번은 어김없이 길섶으로 나온 뱀과 맞닥뜨리곤 한다. 독이 있든 없든 뱀은 언제 보아도 겁나고 아무리 작아도 징그럽다. 하물며 무심결에 맞닥뜨리게 되니 쌍방이 같이 놀라서 허둥대곤 한다. 이놈의 활동 범위가 출몰했던 좁은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세월이 한동안 흐른 이후라도 이곳을 지나려면 늘 긴장된다.
인간에 비하면 작고 볼품없는 놈인데 왜 이렇게 혼비백산하는 걸까? 근거 없이 떠도는 우스갯소리로는 ‘뱀이 이브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 한 이후로 인간은 뱀을 증오하게 되었다’ 고 하지만,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을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집단적 무의식은 과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잠재적 기억 흔적의 저장소인데, 이는 인간의 진화 발달의 정신적 잔재이며 많은 세대를 거쳐 반복된 경험들의 결과가 축적된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어둠을 무서워하는 것은 원시인들이 어둠속에서 겪었던 위험과 공포가 집단적 무의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며, 중생대 이전부터 지구를 지배했던 파충류들에 대한 끔찍했던 경험이 우리의 까마득한 조상인 원시인 때부터 우리의 무의식 속에 전해져 뱀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뱀을 무서워한다.’ 고 설명한다.
뱀은 그렇다 치고 소리 없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놈은 따로 있으니, 그 놈은 바로 멧돼지다. 며칠 전엔 어둑새벽에 우암 산을 오르다 가까운 거리에서‘쉭쉭’ 콧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멧돼지를 직접 보았다는 지인의 얘기를 들은 후부터는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요즘엔 어느 산을 가 보아도 멧돼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십만 인구가 사는 대도시까지 이놈들이 서식하고 있다니, 1970년대 초반의 헐벗은 우암 산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만큼이나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멧돼지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나 모래 목욕을 하기 위해 튼튼한 코와 주둥이로 땅을 파헤친다. 나무 열매는 물론이고 벌레나 곤충의 애벌레까지 못 먹는 것 없이 먹이가 있을만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파헤친다. 흙을 판 흔적은 한 두 곳이 아니다. 양지바른 산기슭은 물론, 무덤 봉분을 민망하리만큼 파헤쳐 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등산객들이 수없이 오가는 길섶도 밤이면 벌집처럼 헤집어 놓아 다음날 산을 오르는 이들이 파헤쳐진 흙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적나라한 광경을 보고 너나없이 놀라곤 한다.
아무튼 생존 경쟁은 도시 근교의 작은 숲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하니 주위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생존을 위한 역동적인 다툼이 모든 생명체들의 사위(四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 피부로 감지된다. 그러나 그것이 생태계의 얼개요, 우주의 질서가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야생 동물들을 하찮게 여겨 남획하고 멸종시켜 왔으며, 지금도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동식물들의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경험론적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은 그의 4대 우상론에서 현상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선입견과 편견을 갖게 되어 모든 사물을 인간 본위로 해석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며,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 이런 오류와 편견을 ‘종족의 우상’ 이라 하였듯이, 산새소리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아니라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에서 필사적으로 제 짝을 찾는 것이든지, 아니면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라는 침입자를 경계하는 외침일 것이다. 지렁이를 공격하는 개미들의 행위도 자연의 섭리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것은 죽은 나무속에 사는 곤충의 애벌레를 잡아먹으려는 몸짓이니, 이 또한 그가 체득한 생존방식이다. 뱀도 살아남으려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등산로를 건너야만 할 것이며, 물론 청설모나 멧돼지의 행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하나같이 생존을 위한 숨 막히는 몸부림이며, 크고 작은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숲은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場)이다.
산은 동식물들에게 있어 삶의 터전이다.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그곳에 서식하는 동식물들이다. 결국 인간은 가해자요, 동식물들은 피해자다. 인간들이 수시로 오르내리는 등산로는 동물들의 입장에선 항상 위험이 도사린 경계 지역일 것이고, 약수터는 그들이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오가야만 하는 곳이리라. 인간들이 인간의 입장에서만 동식물을 바라보면 그들은 설 땅이 없다. 그렇다고 천적이 없는 멧돼지로 인한 농작물 피해를 방치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해 멸종되어 가는 동식물 보호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지경에 처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다양한 생물들이 다 같이 공존하는 지혜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최재천 교수는 ‘우리 모두는 자연으로부터 공생하는 법을 배운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나야 한다.’ 고 역설한다.
나는 오늘도 우암산에 올랐다. 추석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갑다.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나무들이 빼곡한 숲은 여전히 짙푸르고 간간이 솔바람에 흔들리는 갈잎이 희끗희끗 보일 뿐, 그저 무심하기만 하다. 숲속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알 바 아니라는 듯 여전히 율량동 택지개발지구에서 건설 장비들이 뱉어내는 굉음이 어지러이 바람에 뒤섞여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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