⑹ 양 난의 극복과 대청 관계
1) 왜군의 침략
① 임진왜란 전의 정세
국내 정세 : 3포 왜란(1510), 을묘왜변(1555) 등 왜구 소란 빈발, 비변사 설치 - 군사 문제 전담. 국론 분열
일본의 정세 :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시대 통일
② 임진왜란의 발발(1592.4.13) 왜군의진로
침략(약 20만명) → 부산진(1592.4.14. 정발)·동래성(1592.4.15.송상현) 함락 →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중로: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 (좌로: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에서 만나 충주), (우로: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 이일·신립(1592.4.26.충주) 패배 → 선조 평양피난(1592.4.30. 광해군 분조이끔. 임해군, 순화군 모병역할 부여) →한양점령(1592.5.2)→ 옥포 전투(1592.5.4. 이순신 첫 승리)→선조 의주피난(1592.6.11)→ 평양(1592.6.14)·함경도(1592.6.17-왕자 임해군, 순화군 포로가 됨) 점령→한산도대첩(1592.7.8)→명군의 참전(征明假道)(1592.12)→조·명(이여송, 송응창)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1593.1.8)→벽제관전투 패배(1593.1.27)→ 행주대첩 승리(1593.2.권율) → 휴전 제의 (1593.8)→ 휴전회담결렬(1597.1)→ 정유재란발발(1597.1)→ 칠천량 전투 패배(원균 , 1597.7)→남원성 함락(1597.8.16)→ 직산(소사)전투(1597.8.25)→명량해전(1597.9.16)→노량해전(1598.11.19)
2) 수군과 의병의 승리(일본작전-수륙병진작전)
※ 이순신(1545~1598)-식년무과 병과급제(1576년)→함경도 동구비보(함경도 삼수) 권관(종9품)→훈련원 봉사(종8품.1579년)→좌천→충청도절도사 군관(종8품.1579년)→발포(전남 고흥) 수군만호(종5품.1580년)→좌천→훈련원 봉사(종8품. 1581년)→함경도 건원보(함북 경원군) 권관(1583년)→훈련원 참군(정7품. 1583년)→부친 3년상→사복시 주부(종6품.1585년)→조산보 만호(함경북도 경흥) (1585년)→녹둔도 둔전관 겸임(1587년)→패전→백의종군→여진 보복전 참가→ 1588년 아산으로 낙향→1589년 전라도 순찰사 군관→선전관→정읍현감(1589년)→1590년 평안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추천→무산됨→1591년 진도군수 부임전 가리포(완도)의 수군첨절제사(종3품)임명→전라좌도 수군절도사(정3품)임명, 거북선 제작→임진왜란발발(1592.4.13)→옥포해전(1592.5.7, 이순신 왜란 첫승리,왜선40여척 격침)→적진포해전(1592.5.8. 왜선 10척격침)→종2품 가선대부 승진→사천전투(1592년5월29일. 거북선 처음사용, 왜선13척 격침)→당포해전(1592년 6월 2일.왜선21척 격침)→1차당항포해전(1592년 6월25일. 왜선 26척 격침)→정2품 자헌대부→한산도대첩(1592년 7월8일. 왜선 100여척 격침) →부산포전투(1592년 9월1일. 왜선 100척 격침) →정2품 정헌대부→1593년8월 삼도수군통제사→제2차당항포 해전(1593년3월 4일. 왜선 30척 격침)→ 장문포해전(1593년9월29일. 곽재우,김덕령과 연합작전전개)→왜군 방어 명령 불이행→ 1597년 1월 파직→→정유재란 발발(1597년 1월)→1597년 4월 권율휘하 백의종군→1597년 4월 13일 모친사망→1597년 7월 칠천량 전투 패배(삼도수군통제사 원균)→1597년 8월3일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일본군 남원점령(1597년8월16일)→일본군 전주점령(1597년 8월25일)→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승리(13척의 배로 왜선 130여척 격침)→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전사(왜선 200여척 격침. 명나라 제독 진린+이순신)→우의정 추증→1604년 선무1등공신 덕풍부원군, 좌의정 추증→1643년 충무 시호 받음→1793년 영의정 추증→아산현충사, 여수충민사, 통영충렬사 등 배향
① 수군의 활약 한산도대첩
의의 : 남해의 제해권 장악, 전라도 방어 ,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 좌절
② 의병의 항쟁
※호남의병 항쟁사-임진왜란발발(1592.4.13)→동래성 함락(4.14)→ 최초의병 항쟁(4.20. 순창 유팽로)→곽재우의병(4.22. 의령)→선조평양피난(4.30)→한성함락(5.2)→1차 전라도근왕군 해산(5월초)→김천일 의병기병(5.16. 나주. 1차호남의병)→고경명 의병기병(5.29.담양. 2차호남의병)→김천일 의병 수원에서 관군에 합류(6.3)→2차 전라도 근왕군 용인 전투패배(6월초)→ 고경명 의병부대 북상(6.11)→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 금산성전투에서 순절(7.10)→임계영 의병기병(7.10. 보성. 전라좌의병)→ 김경수, 기효간 등 장성 남문의병 [1차(1620여명):1592.7.18~1593.2.17. 직산전투. 진위전투 승리). 2차(826명): 1593.5.29~6.29). 3차(620여명) 1597.8.16~9.10)]→ 최경회 의병기병(7.26. 화순. 전라우의병)→ 명군의 참전(征明假道)(1592.12), 조·명(이여송, 송응창)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1593.1.8)→벽제관전투 패배(1593.1.27)→ 행주대첩 승리(1593.2.권율) → 2차 장성남문의병 기병(1593.5.29~6.29)→2차 진주성 전투( 1593.6.29.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논개, 김극후, 김극순 등 순절)→ 휴전 제의 (1593.8)→ 휴전회담결렬(1597.1)→ 정유재란발발(1597.7)→ 남원성 함락(1597.8.16)→ 3차 장성 남문의병 기병[1597.8.16~9.10. 소사전투(김홍우, 김신남) 승리(8.25), 김성진 순절]
구성 : 지도층은 전직 관리·유학자·승려, 주력층은 농민
전술 : 게릴라전 실시
활동 : 곽재우, 조헌(1592.8.18-금산전투), 고경명, 정문부, 김덕령 등의 활약, 후에 의병 부대는 관군에 편입→관군 전투 능력 강화 곽재우활약상
※ 임란3대첩-한산도대첩(1592.7. 이순신), 진주성대첩[1차승리-1592.10(김시민+최경회+곽재우), 2차패배-1593.6(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논개, 김극후, 김극순 등 순절), 행주대첩(1593.2. 권율, 화차의 활약) ]
3) 전란의 극복과 영향
① 전세의 전환
조선의 전쟁 주도권 장악, 명군의 참전(征明假道)(1592.12), 조·명(이여송, 송응창)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1593.1.8), 벽제관전투 패배(1593.1.27) 행주대첩 승리(1593.2.권율), 휴전 제의 (1593.8) 휴전 회담 결렬(1597.1)
② 정유재란순천왜성
왜군의 재침(약 14만1500명) → 직산 전투, 소사전투(1597.9.7-육군)와 명량 전투(1597.9.16. 수군)에서 승리 → 토요토미 사망(1598.8.18) →노량 대첩(1598.11.18. 이순신사망. 200여척 대파. ) → 종전(1598.11)
※ 승리요인-전국민 차원 국방능력 우세,문화적 우월감,무기의 우세 조선무기
③ 왜란의 영향
국내 : 토지 대장과 호적 소실, 민란 발생(이몽학의 난.1596. 등), 문화재 소실(경복궁, 불국사, 사고), 담배,조총,고추,호박 전래, 국가 재정 궁핍, 식량 부족 → 공명첩(空名帖) 발급 → 신분제 동요 초래
국외 : 일본의 문화적 발전 초래(활자,서적,도자기,성리학), 명의 쇠퇴와 여진 급성장(후금의 건국, 1616)
4) 광해군(1609~1623)의 중립 외교(북인등용)
① 배경 : 국제 정세의 변화 - 여진의 후금 건국(1616), 명과 대립
② 부국 강병 정책 실시 : 양안과 호적 작성, 국방 강화(화기도감 설치-화약무기 제작), 사고 정비
(춘추관,오대산(일본보관중 소실),태백산(현존),마니산(현존),묘향산(북한)),동의보감(허준)편찬
③ 중립 외교 :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로 대처(강홍립의 항복)
- 기타:영창대군, 김제남(광해군장인) 사사, 인목대비 폐비
④ 결과 :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의 반발 초래 → 인조 반정(1623)
5) 호란의 발발과 전개
① 배경 : 인조와 서인 정권의 친명 배금 정책에 의해 후금과 단교
② 정묘호란 : 명의 가도주둔(1622)→ 이괄의 난(1624)→ 침입(인조5년,1627) → 정봉수·이립의 항쟁 → 청과의 화의(형제 관계, 명과 후금의 중립, 중강,회령개시 등)
③ 병자호란 : 청의 군신 관계 요구 → 주전론과 주화론의 대립 → 주전론 득세 → 청의 침입(인조14년.1636) → 청과 화의(청에 조공, 명과의 국교 단절, 왕세자 인질)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3번 절하고 9번 고개를 숙이는 예 삼전도비
④ 결과 : 정신적 충격 -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비적 우월감으로 인한 북벌론 제기
6) 북벌 운동의 전개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 효종 때 고조(송시열, 송준길, 이완), 실천 못함, → 북학 운동으로 전환
※ 나선정벌- 러시아 세력의 침략에 위협을 느낀 청이 원병을 요청하여 파견[변급1654(효종), 신유1658(효종)]
형성평가 참고자료
3-3-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