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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비뽑은 땅 제비뽑기로 살자>의 줄거리 :
제비뽑기로 얻은 땅은 할례받은 땅입니다. 내 의도를 양피 베어내듯이 베어낸 상태에서 얻은 땅이기에 할례받은 땅입니다. 이렇게 제비뽑아 얻은 땅에서는 사는 방식도 제비뽑기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살기 역시 내 의도를 베어버린 할례받은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의도가 아예 들어있지 않은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내 삶을 책임지고 이끄십니다. 제비뽑기로 얻은 땅에서 제비뽑기로 사는 법을 알아봅니다.
제비뽑은 땅 제비뽑기로 살자
(여호수아 14:1~15)
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2.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3.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본문 중심으로 <제비뽑은 땅 제비뽑기로 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편 땅의 중부, 남부, 북부의 주요 거점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합니다. 제비뽑은 땅은 내가 살아야 할 땅이고 내 자손들이 계속 살아야 할 땅입니다. 그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의도가 당연히 반영되어야 합니다. 내 판단과 평가에 따라서 마음에 맞는 땅을 고르는 것이 합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하게 하십니다. 지역의 이름을 쓴 돌들을 놓고 각 지파의 대표들이 나와서 뽑는 식으로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제비뽑기의 의미는 가나안 복지라는 약속의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에서 내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의 의도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나의 의도대로만 땅을 분배받아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예를 들어 베냐민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의 갓난아기까지 다 알고 계시면서 그 땅을 의도적으로 베냐민 지파에 분배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대로만 분배받아서 삶을 시작하는 것은 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의 상처가 낫지 않았을 때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할례의 표식이 평생 가는 것처럼 제비뽑기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내 의도 없이 땅을 받았음이란 그 땅에서 살고 있는 한 하나님의 의도로 땅을 주셨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땅을 밟을 때 ‘이 땅은 하나님의 의도로 주신 것이다. 내 의도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에 내 의도가 들어가면 안 된다.’라고 여기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고정적인 관계, 일시적인 관계, 영원한 관계, 기본적인 관계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우리에게는 약속의 땅입니다. 이 관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만을 위해 특별히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준비하신 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내가 원해서 생김새를 선택할 수 없고, 내가 원해서 태어날 나라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의도가 제거된 채로 삶의 터전을 할당받는 것은 사실 모두에게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도 없이 땅을 할당받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살면서 계속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의도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울을 볼 때 이 얼굴은 내가 의도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얼굴을 갖고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살아갈 때는 내 의도가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 의도가 제거된 상태에서 받은 내 몫의 땅은 내가 그 땅을 밟고 사는 동안에는 내 의도를 배제하는 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저주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의도로만 매일을 살아야 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로 주어진 땅이고 나로서는 우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내 의도가 배제된 땅에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땅에서 살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배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있기도 전에 당신의 의도를 가지고 나를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이런 부모 밑에서, 이런 가정 형편에서 살게 하시는 것은 의도에서 이어지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와 저주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닌 내 의도로 살게 되었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의도는 있는데 그 의도를 전부 배제하며 내 의도로만 살려고 하기에 삶은 힘들고 괴롭습니다. 기차가 레일 바깥으로 탈선하여 흙바닥을 달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제비뽑기한다는 것은 제비뽑기로만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살고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선한 사람도 있지만 자기의 목적을 위해 악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뒤돌아서는 욕을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기 의도를 가지고 살면서 자기 의도로 나를 대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 혼자 내 의도가 제거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나를 향한 의도를 가지실 때는 내 주변에서 자기 의도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까지 다 계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변에서 자기 의도로 사는 사람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의도를 갖고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비뽑기의 의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기분, 그 사람의 표정, 그 사람이 하는 말, 그 사람의 의도가 있습니다. 다만 나에게는 이 모든 요소가 제비뽑기처럼 내 의도가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비를 뽑았는데 그 사람의 기분이 지금 그렇고, 지금 표정이 그렇고, 지금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지만, 결국 그 사람 위에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가 개입되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다음 순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져 나갑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지금 순간에 확인해야 그 의도가 다음 순간에 하나님의 의도를 부르고 또 그다음 순간에 하나님의 의도를 부릅니다. 예를 들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입을 맞출 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룟 유다의 행동에 당신을 팔려고 하는 악한 의도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황에 대해 당신의 의도를 개입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가룟 유다와의 관계를 제비뽑기로 얻은 마땅히 수용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당신께 접근하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의도임을 믿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믿음을 보이셨기에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신 후의 단계에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린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에서 준비시키시기 위해 형들의 악함이 필요했음을 믿었습니다. 형들이 팔았을 때 형들의 악한 마음을 제비뽑기로 얻게 된 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편안하게 잘 살고 싶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면 자신을 노예로 판 형들을 원망하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어떡하든지 도망쳐 나오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이 악한 의도를 갖고 자기를 판 상황을 제비뽑기로 얻은 땅으로 여기고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때도 요셉은 이러한 일들을 제비뽑기로 받은 것으로 수용합니다. 제비뽑기로 보디발의 집에 갔고, 제비뽑기로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썼고, 제비뽑기로 감옥에 갇혔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환경을 하나님의 의도로 주어진 땅으로 수용하자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지면서 애굽의 총리 자리로 갔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삶에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도 배우자를 마주할 것입니다. 배우자의 현재 기분, 배우자의 현재 표정, 배우자의 현재 말투 같은 것들은 모두 거부할 수 없이 제비뽑기로 내가 얻은 땅입니다. 제비뽑기로 얻었다는 것은 나의 의도가 개입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배우자의 상태를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그 상태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의도가 나타납니다. 이처럼 내 의도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우리가 복지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내 의도를 갖고 있다면 복지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에게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이라면 아내의 얼굴이 불편해 보이면 화가 납니다. 내가 위로받기를 기대하는데, 내가 아내를 위로해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내 의도가 들어가고 관계가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내 삶에 울타리를 든든하게 세우고, 위로를 받고, 동반자로서 나를 즐겁게 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내 모든 말과 행동에 의도가 들어가기에 복지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돈을 못 버는 남편의 아내가 있습니다. 이러한 남편 또한 제비뽑기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것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의도를 불러오려면 지금 이 상태를 제비뽑기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용해야만 합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이고, 회사에서 주어지는 상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도로 출발한 삶에서 내 의도를 배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의도가 배제된 일을 우연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전부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일들입니다. 백합화가 피고 지는 것도, 새가 날거나 떨어지는 것도, 머리털이 나고 빠지는 것도 우연이 아닌 모두 다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에 둘러싸인 삶의 현장에서 내 의도를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인생의 목적의식, 내 삶의 목표, 내 생각, 내 의지를 발동하는 이유는 죄와 저주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할례받은 것이어야 합니다. 태어난 지 팔 일 된 아기의 양피를 잘라버리듯이, 내 의도를 잘라버리는 할례받은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삶이 가능할까요?
앞서 8장에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 말씀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곧 우리 인생의 시간을 쌓아 나갈 때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듬지 않은 돌이란 인위적인 의도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의도를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곧 가룟 유다 같은 존재, 요셉을 판 형들 같은 존재, 빌라도 같은 존재라도 나로서는 제비뽑기로 얻은 땅으로 여기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다음 단계로 하나님의 의도가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너무너무 좋습니다. 그냥 주시는 대로만 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제비뽑기로 얻은 땅이란 아무 의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도가 배제된 것이지 하나님의 의도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갈렙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6절을 보면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라고 했습니다. 이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거인족들이 살던 헤브론 산지의 할당을 요청합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긴장하며 제비뽑기를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갈렙이 불쑥 나와서 과거에 맹세한 일을 꺼냅니다. 7~9절을 보면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하며 거인족들이 사는 헤브론 산지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제비뽑기의 의도에서 너무나 벗어난 모습처럼 보입니다. 갈렙의 개인적 의지가 강렬하게 들어간 요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제비뽑기와 갈렙의 요청을 병행하여 언급합니다. 그리고 갈렙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따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의도로 살아감이란 내 의도가 완전히 배제된 것입니다. 의도가 없으니까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져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45년 전의 일을 언급하는 갈렙은 지금 85살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할 때 40세이었던 갈렙은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유다 지파의 대표였습니다. 헤브론 산지에 살고 있는 거인족을 갈렙만 아니라 정탐꾼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정탐꾼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절망적인 보고를 내놓았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이러한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나왔느냐며 통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8~9절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외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라는 호소에는 본문의 제비뽑기와 관련된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풀어 보자면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따른 것이지, 우리의 의도로 가나안 땅을 좋게 여겨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왜 거역하느냐?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한 아무리 거인족이 있더라도 그들은 우리의 먹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에 올라타라.’라고 말했던 셈입니다.
갈렙은 이미 45년 전에 하나님의 의도대로만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부터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고 있었기에 정탐 때도 열 명의 정탐꾼과는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 정탐 사건을 시발점으로 보더라도 45년간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의도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의도를 배제하는 제비뽑기가 새삼스럽게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제비뽑기의 본래 정신은 내 의도를 배제하고 하나님의 의도로만 사는 것입니다. 갈렙은 이미 정탐 때 하나님의 의도를 거역하지 말자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낙 자손 거인족과 성이 견고한 것을 보니 나도 무섭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로 이 땅을 들어가는 것이지 내가 의도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갈렙의 왕성한 기력과, 충만한 의욕과, 과감한 행동의 이유였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모든 이스라엘의 간담이 녹아내렸습니다. 이들이 아낙 자손 거인족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이유는 자기 의도로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내 의도로 살려고 하는 삶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들만이 출애굽 1세대 중에 살아남았습니다.
본문에서 갈렙은 85세가 된 시점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동의할 만한 가장 비옥한 땅을 달라고 주장해도 반대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살아남은 출애굽 1세대로서 그만한 공로가 있었습니다. 85세라고 해서 뒤떨어지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갈렙은 젊은이들보다 기력과 의욕과 행동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갈렙을 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갈렙의 기력이 되고, 하나님의 의도가 갈렙의 의욕이 되며, 하나님의 의도가 갈렙의 행동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지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로 인한 기력이 없고, 하나님의 의도로 인한 의욕이 없고, 하나님의 의도로 인한 행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갈렙처럼 하나님의 의도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실 수 있을까요? 앞서 하나님의 의도가 하나님의 의도를 부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갖고 계시는 원초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그 원초적인 의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내 마음이 부활하여 예수님의 몸을 옷 입고 승천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원초적인 하나님의 의도를 올라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매사에 적용합니다. 배우자를 만날 때, 자녀를 만날 때, 사건과 문제를 만날 때, 할례받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서 꼼짝 못 하는 사람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습니다. 움직일 수 있는 길이라고는 위로 뚫려 있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 봅니다. 이 하나님의 원초적인 의도를 우리가 이루어 내야 합니다. 그럴 때 몸이 남아 있는 이 땅에 대해서는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의도가 세세한 부분까지 정복하실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의도를 이끌어 오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기를 지속하는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십자가에 담겨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갈렙처럼 올라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내 의도가 배제되고, 내 의욕이 배제되고, 나의 행동이 배제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삶을 살면서 힘들고 지친 이유는 바로 내 의도, 내 의욕, 내 행동으로만 살았기 때문인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고, 내 의욕으로 살고, 내 기운으로 살기에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내몸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몸이 아파 누워 있더라도 그 상태는 제비뽑기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가 나의 의욕을 붙잡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친구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의욕이 된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이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다 전달되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들이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사는 것은 은퇴가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의도는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대로 제비뽑기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태든, 어떤 문제든, 제비뽑기로 받아들이고 내 의도를 배제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사건, 그 문제, 그 사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다음 의도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의도로 주어진 사건에 대해서 제비뽑기의 마음으로 수용하여 그다음에 이어지는 의도, 그다음에 이어지는 의도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의도대로만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렙이 45년 동안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기 위해서는 원초적 의도인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의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의도를 올라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올라와라! 천국으로 올라와서 나를 마주하라!’라는 바람을 갖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도가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하나님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쉬지 않고 하나님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범사에 주권자 하나님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을 때 제비뽑은 땅은 제비뽑기로 살자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매일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 모든 대상, 내몸의 상황까지도 내 의도가 배제된 채 제비뽑기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도의 산물임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내 의도가 발생하려 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가 의도를 불러내게 하시고, 의도가 의도로 이어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