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작품상
빛과 볕
윤 월 로
산 너머 저 하늘이 그리운 것은, 멀고 먼 고향이 그립기 때문, 멀고 먼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향의 어머니가 그립기 때문…
한국 가곡 <그리움>이란 곡에서 시인 이종택은 산 너머 저 하늘이 그리운 것은 멀고 먼 고향이 그립기 때문이라고 그리움의 서두를 열고 있다. 어머니의 고향 충남 부여군 홍산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오랜 근무지였던 강경에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나는 고향이라면 단연코 강경이 떠오른다.
초등학교를 입학해서 두 해 동안이나 넘어 다니던 아카시아숲의 채운산이라거나 길쭉길쭉한 소나무들이 울창하던 송림을 품은 산양초등학교, 우람한 플라타나스 그늘과 사철 푸른 나무들 사이로 청초한 빛깔의 붓꽃이 여기저기 그윽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중·고등학교 정원도 고향의 추억 속에서 빛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선명히 간직되고 있는 것은 지명인 강경江景이 말해주듯이 금강의 마지막 물길이 지나가는 그곳은 마음속에서 지금까지도 늘상 흐르는 강의 경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던 그곳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까지만 해도 나룻배는 부여군 세도면과 강경을 잇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적지 않은 세도면의 학생들이 유서 깊은 강경상고며 강경여중고를 나룻배로 통학을 했다.(그 후로 1988년 황산대교가 생겼다는 뉴스를 들었으니 아마도 학생들의 그 통학배도 운행을 중지했을 것이다.)
우거진 갈대숲이 바람 따라 일렁이고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늙은 가지를 휘어 세월을 얘기하던 옥녀봉 발치를 휘감아 나오는 아득한 물길. 넘실대던 그 강물은 백마강의 이름으로 부여를 달려오다가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강경으로 들어서면 옥녀봉 앞을 지나 서쪽 방향의 익산 나바위성당 둥그런 솔숲으로 그리고는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마지막 금강줄기이다. 바로 이런 아름다운 강의 풍경으로 인하여 ‘강경’이란 이름이 생겼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바로 그 둑길, 나바위성당으로부터 옥녀봉으로 이어지는 둑길은 여고생이었던 나를 자주 불러내던 길이다. 언제 봐도 금실굼실 넉넉하게 흘러가는 그 강물들은 뭔가 모를 허기와 애틋함으로 목마른 내 사춘기를 적셔주었다. 어느 초겨울, 가까운 옥녀봉의 느티나무들조차 흩날리는 눈발에 가려 그 모습이 희미하고 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갈대숲의 춤 속에 아득하던 둑길은 언제라도 소환되는 나의 고향 강경, 강의 경치이다.
강 강江, 볕 경景. 글자 그대로라면 ‘볕이 드는 강’혹은 ‘강과 볕’을 이르는 말이 된다. 뜻이 비슷한 보통명사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경치景致는 볕이 이르는 것을 말하고, 풍경風景은 바람과 볕을 아우르는 말이 된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풍광風光이 있다. 이 또한 바람과 빛을 의미하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적으로야 빛과 볕이 엄연히 그 역할이 다르지만 언어소통의 도구로서 단어의 의미를 보면 바람과 (햇)볕이 있어 나타나는 혹은 그려지는 자연의 상태가 경치, 풍경 혹은 풍광이라는 말로 환치되는 셈이다.
부여와 익산의 사이를 흐르는 볕이 드는 강, 혹은 강의 경치 그곳의 풍경은 곧 ‘강경’이 되고 그 유려한 경치는 청춘의 나를 만들어 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빛은 물과 함께 자연의 기본적인 자양분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기른다. 볕 또한 그러하나 볕은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면서 계절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19세기 유럽의 화가들은 빛에 의하여 달라지는 물체나 자연에 주목하여 인상주의 화풍을 탄생시켜 지금까지도 예술의 높은 경지를 차지하고 있다.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그리고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인 반고흐, 고갱, 쇠라, 세잔, 로트레크 등이 그들이다. 서양미술사는 한 미디로 그들을 ‘빛을 그린 사람들’이라고 대변되기도 한다,
사실 빛은 생명의 원천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조물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빛과 어둠을 나누었고, 그 빛은 그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의 요한은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조물주는 생명들을 위하여 보시기에 좋은 빛을 가장 먼저 창조했고, 요한 또한 이러한 빛과 생명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빛은 밝다. 따라서 생명도 밝다. 어떤 빛이든 빛이 있어 밝을 때 우리가 물체를 구별할 수 있듯이 생명이 있을 때 우리는 많은 생명들과 어울려 삶을 누리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시인이 그랬던가.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바람과 빛이 만나 자연을 이루고 그 자연 속에서 어떤 생명이든 삶을 이어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은 에디슨 이래 빛도 볕도 자유자재로 만들고 사용하며 시의적절하게 누리고 있다. 아니 사람이 모이는 도시일수록 밤조차 잃어버리고 빛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기도 하다. 빛을 바탕으로 문명의 발전을 도모하며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홍수 속에서 내 고향 강경은 상대적으로 발전을 잊은 퇴락해가는 작은 시골로 머물러 있다. 모교인 강경여고도 남녀공학의 강경고등학교로 바뀌었고 품격 있게 아름답던 정원도 이젠 추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의 고향 강경은 다르다. 그 강의 경치는 곧 물들의 빛이고 볕이다. 그 물들의 빛 속에서 내 생명이 자랐으며 그 볕이 내 안에 있어 지금도 영혼을 따스히 감싸고 있다. 마음속에 또 하나의 빛이며 볕으로 머물러 있는 내 고향 강경, 손에 닿을 듯한 옥녀봉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걷던 금강의 둑길, 흰눈 흩날리고 달리는 말들의 갈기처럼 기분 좋게 일렁거리던 갈대숲의 춤, 그 강경의 둑길을 지금도 나는 사랑한다.
잊을 수 없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