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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몸과 인간의 몸, 10신(十身)의 모습
言自在者 歎其色用 謂五根互用 十身相作等 故言色自在 五根互用者 如涅槃經 八自在中說 十身相作者 如華嚴經十地品說 歎色德竟
자재(自在)라고 말하는 것은 색신(色身)의 작용을 찬탄하는 말로써 5근(根)의 상호작용과 열 가지 몸의 모습(十身相)을 만드는 것 등을 말한다. 그래서 색신이 자재하다고 말한 것이다. 5근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열반경>의 8자재(八自在) 가운데서 설한 것과 같으며, 열 가지 몸의 모습(十身相)을 나타낸다는 것은 <화엄경>의 10지품에서 말한 것과 같다. 색덕(色德)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부처님의 몸과 인간의 몸
색신(色身)은 부처님 몸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색신은 우리 범부들과는 다른 자유자재한 몸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부처님 덕성 가운데 몸의 작용에 대해서 찬탄하는 부분이다. 몸은 물질에 속하기 때문에 색(色)이라는 말을 쓴다. 색(色)이라는 말은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거친 면과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미세한 부드러운 면이 있다. 그것을 상(相)과 성(性)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볼 수 있다. 범부들의 몸은 번뇌가 있는 거친 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장애가 많지만 부처님의 몸은 번뇌가 없는 업(無漏業)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장애가 없다.
부처님 몸은 물질적인 장애(質礙)는 없지만, 모습(方所)이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뜻도 있다. 부처님은 몸의 형체(色身)가 있지만 무애자재 하다. 우리는 번뇌가 많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둘 다 자재하지 못하지만 부처님은 번뇌가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자재하다. 부처님의 몸은 5근이 상호 작용하여 자재하게 사물을 관찰한다. 5근은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을 말한다. 5근은 우리 몸의 인식기관이지만, 또한 마음의 의지처가 된다. 근(根)이라는 말은 마음이 의지해서 활동할 수 있는 일종의 장소와 같은 것이다.
마음은 몸에 의지해서 활동한다. 마음이 몸에 의지하는 쪽이기 때문에 능의(能依)라고 말하고, 몸은 의지되어지는 쪽이기 때문에 소의(所依)라고 말한다. 마음만 몸에 의지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에 의지해서 활동한다. 이때는 몸이 의지하는 쪽이 되어 능의가 되고, 마음은 의지되어지는 쪽이 되기 때문에 소의가 된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함께 생명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만약에 능의와 소의의 인연이 끊어지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5근(根)이라는 말은 부처님도 육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부처님의 5근과 인간의 5근은 표현상으로는 같지만 작용에 있어서는 다르다. 부처님의 5근이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한 가지 근(根)으로 한 가지 작용만을 하지만, 부처님은 한 가지 근(根)으로도 5근의 작용을 다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호용이라는 말은 보살이나 부처의 경지에 가면 근이 따로따로 일정한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근(根)이 모든 역할을 한꺼번에 하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일순간에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경지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내세에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더 먼저 현세에서도 부처님과 같이 몸과 마음으로 자유자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몸이 자재하다는 말은 부처님도 몸을 지니고 있지만 번뇌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오근(五根)이 상호작용을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재라는 말은 물질에 대한 집착이 없는 무색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자유자재한 물질이 공기인 것 같다. 공기는 벽이 있어도 장애를 받지 않으며 어디든지 걸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물질이다. 공기와 같은 물질을 연상해보면 불보살의 색신(色身)이 무애자재하다는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0신(十身)의 모습
10신은 부처님이 중생들을 교화할 때 근기에 맞게 몸을 나타내 보이면서 교화를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의 경지에 가면 모든 생활이 이타적 자비행으로 실현된다. 부처님이 열 가지 모습을 나타내시는 것은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다.
①중생신(衆生身)
3계6도(三界六道)에 윤회하는 중생들을 위해서 중생의 몸을 나툰다. 우리가 흔히 6도(道)라고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계, 천상계를 말한다. 중생신은 6도(六道)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나투는 몸을 말한다.
②국토신
우주에 펼쳐진 삼라만상은 모두 여래의 몸에 해당한다. 특히 비로자나불은 우주 법계를 모두 몸으로 한다. 우주 법계를 몸으로 한다는 말은 법신을 뜻한다. 우주에 있는 사물 하나하나가 법신이 아님이 없다. 여기서 국토라는 말은 중생들이 거기에 의지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터전이 된다는 면에서 국토라고 한 것이다. 국토는 본래 법성토이다. 삼라만상은 모두 불성이 있다. 삼라만상이 모두 진여의 체이기 때문에 열반성을 지니고 있다. 열반은 안락을 의미한다.
삼라만상은 모두 열반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우리 마음이 받아들일 때 좋고 나쁘고를 가려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대할 때에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할 수 있으면 그곳이 열반세계가 된다. 국토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열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국토는 중생들이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루어진 법성의 세계인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을 기세간(器世間)이라고 한다. 기세간은 인간이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된다.
③업보신
중생의 몸과 같이 업보로 형성된 몸을 나타낸다. 때로는 지옥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지옥 중생의 몸을 나툰다. 소승불교에서는 업은 업대로 받기 때문에 부처님이 업보신을 받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보살도를 닦을 때 방편을 사용하기 때문에 보살이나 부처님은 업보신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④성문신
성문은 4제(諦)의 법문을 듣고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승을 말한다. 4제는 고집멸도의 네 가지 성스러운 이치를 말한다. 성문승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성문의 몸을 나타내는 것을 성문신이라고 한다.
⑤독각신
독각은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연각승은 12연기를 관찰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승을 말한다. 인연법의 원리를 깨달아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행승들을 일깨우고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독각신을 나툰다.
⑥보살신
우리에게는 보살만 되어도 선망의 대상이 된다. 보살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수행인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에 비해서는 아직 낮은 단계의 수행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보살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부처님은 보살신을 나툰다.
⑦여래신
여래의 몸을 의미한다. 진여의 묘체(妙體)로써 형성된 몸을 말한다. 여래신은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다. 여래라는 말은 본래 오고 감이 없다는 뜻에서 여래여거(如來如去)라고 한다. 또는 불거불래(不去不來)라고도 한다. 부처님은 도솔천에서 사시다가 인도의 마야부인을 통해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업보에 의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나되 태어남이 없는 상태가 된다. 본래 그대로의 생명체를 가지고 내려오셨기 때문에 죽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이불생(生而不生)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여래신은 그러한 이치를 실현하는 몸이다. 여래신은 진여 또는 법성의 이치를 몸에 지니기 때문에 항상 영원한 몸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여래신은 인과가 원만하게 구족된 묘체를 뜻한다.
⑧지신(智身)
부처님은 지혜로써 몸을 삼는다. 부처님은 지(智)와 법(法)이 둘이 아니다. 지(智)와 법(法)을 달리 표현하면 진여의 체를 말한다. 지혜는 진여의 체에서 나타난다. 본래의 진여성은 지혜가 없는 진여성이 있을 수 없다. 진여의 체 안에 지혜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 때가 되면 지혜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미 우리 몸 안에 지체(智體)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몸 안에 들어있는 지혜의 체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서 번뇌를 제거하면 지혜는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지금도 우리는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일부만 사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번뇌심은 우리의 지혜의 작용을 장애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지신(智身)은 진리를 능히 깨닫고 진리와 화합하여 지혜롭게 행동하는 몸을 말한다. 부처님이 성불할 때 이미 있는 것을 구현한 것뿐이지 없는 것을 만든 것이 아니다. 사실은 불교의 특징이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⑨법신
법신은 진여의 체를 의미한다. 법신은 본래 본바탕이 깨끗하고 청정한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물질과 정신을 통틀어서 법(法)이라고 한다. 법신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법신은 진여의 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모든 모습의 세계를 다 포함해서 법신(法身)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모습의 세계는 깨끗함과 부정함이 함께 뒤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습의 세계 그 자체는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청정함을 찬탄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여의 체로서의 법신을 의미한다. 지신(智身)은 능히 깨닫는 쪽(能證)이고, 법신은 깨달아지는 쪽(所證)이다. 수행은 우리가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의 관계다. 우리가 이치를 깨달으면 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되고, 깨닫지 못하면 번뇌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대상이 법신(法身)이다.
⑩허공신
불신(佛身)이 허공처럼 우주 만법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불교에서 허공을 비유할 때 만법이 허공 안에 다 들어있음을 의미한다. 하늘에 수없이 많은 천체들도 모두 허공 안에 다 포함된다. 불교에서는 이미 3천대천세계가 이 허공 안에 다 들어있다고 설해 놓은 바 있다. 천체물리학자들은 천체가 하나 생겨나고 사멸해 가는데 수십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천체 하나가 생겨나는 성겁(成劫)만 해도 20겁이 걸린다.
천체가 생겨나서 완성이 되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주겁(住劫)만 해도 20겁이 걸리고, 또 천체가 파괴되어 가는 괴겁(壞劫)의 기간만 해도 20겁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완전히 없어져서 형상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공겁(空劫)의 상태도 20겁이 걸린다고 한다. 이렇게 천체 하나가 생겨나서 사라지는 데까지 80겁이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와 같은 것들이 모두 허공 안에 들어있다. 천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질서 정연하게 진행하도록 하는 원리가 허공신이다. 이것을 불신(佛身)이라고 한다. 불신은 개체의 몸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우주 전체의 몸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불신은 하나이면서 전체이고, 전체이면서 하나(一卽多 多卽一)인 개념이다. 진리는 개체에서 끝나지 않고, 전체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는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허공신은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허공 안에는 부정한 것(染) 뿐만 아니라 깨끗한 것(淨)까지도 다 들어간다. 허공신은 만물의 의지처이면서 염정(染淨)을 초월한 몸을 말한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몸을 나타내는 것을 10신상작(十身相作)이라고 한다.
救世大悲者者 是第三句擧人結歎 佛猶大長者 以衆生爲子 入三界火宅 救諸焚燒苦 故言救世 救世之德 正是大悲 離自他悲 無緣之悲 諸悲中勝 故言大悲 佛地所有萬德之中 如來唯用大悲爲力 故偏擧之 以顯佛人
세상을 구제하는 대비하신 분이라는 것은 이는 세 번째 구절에서 인격을 들어서 찬탄하는 것을 결론짓는 말이다. 부처님은 대장자와 같아서 중생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3계(界)의 화택에 들어가서 모든 불속에서 받는 고통(焚燒苦)을 구제하시기 때문에 구세(救世)라고 말한 것이다. 세상을 구제하는 덕성은 바로 이 대비(大悲)인 것이다. 자기와 타인을 떠난 대비와 인연에 의하여 차별하지 않는 대비는 모든 자비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대비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세계(佛地)에 있는 모든 덕성(萬德) 가운데서 여래는 오직 대비만을 힘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 대비(大悲)만을 들어서 부처님의 인격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대비심
만약 부처님이 대비심이 없다면 부처의 자격이 없다. 보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수행자로서 자비심이 없다면 불교적으로 수행자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만큼 대중과 사회를 정화하고 구제할 수 있는 종교적 사상을 갖춘 종교가 적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소승적으로 흘러가서 대승적인 사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대중들을 일깨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대비(大悲)는 불보살의 가장 광대한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대비라고 한다.
만약에 대비심이 없는 분이라면 이는 곧 부처라고 명할 수 없다.(若無大悲者 是卽不名佛) 그렇기 때문에 혼자 성불해서 혼자 호의호식(好衣好食) 한다면 부처로서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3계의 화택에 들어가서 불속에서 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불로 태우거나 뜨거운 쇳물을 끓여서 집어넣는 고통을 화탕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고통이 따른다. 지옥에서는 그렇게 심한 고통을 받고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서 또 다시 고통을 받게 되는 고통의 연속이다. 불교에서는 3계(界)를 화택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것은 불이 난 집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면 무섭고 뜨거워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3계가 다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색계와 무색계는 욕계보다는 훨씬 고통이 덜하다. 색계천과 무색계천은 우리들로 봐서는 가서 살고 싶은 세상이지만 부처님으로 봐서는 구제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자비행을 하더라도 자칫하면 자신을 돌보거나 일가친척을 돌보거나 하는 것은 대비가 아니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차별심을 떠난 자비와 인연에 억매이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자비를 대비라고 한다. 부처님은 오직 대비만을 수행의 힘으로 삼는다.
如增一阿含云 凡聖之力有其六種 何等爲六 小兒以嗁爲力 欲有所說 要當先嗁 女人以瞋恚爲力 依瞋恚已 然後所說 沙門婆羅門以忍爲力 常念下於人 然後自陳 國王以憍慢爲力 以此豪勢而自陳說 阿羅漢以專精爲力 而自陳說 諸佛世尊以大悲爲力 弘益衆生故 是知諸佛偏以大悲爲力 故將表人名大悲者 上來三句歎佛寶竟
<증일아함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범부와 성인의 힘은 여섯 가지가 있다. 그 여섯 가지는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小兒)는 우는 것을 힘을 삼아서 말할 것이 있으면 마땅히 먼저 울어대는 것을 말한다. 여인은 성내는 것(瞋恚)을 힘으로 삼아서 성내고 난 다음에 원하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문과 바라문은 인욕으로 힘을 삼아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낮다고 생각한 연후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국왕은 교만한 것을 힘으로 삼아서 호걸 같은 기세(豪勢)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아라한은 오로지 정진하는 것을 힘으로 삼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대비로써 힘을 삼아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하는 분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대비만을 힘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비하신 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설명해 온 세 구절은 불보(佛寶)를 찬탄한 것이다. 불보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범부와 성인들은 무엇을 도구로 힘을 삼는 것일까?(凡聖之力)
어린아이는 우는 것을 힘으로 삼아서 원하는 것을 말하고, 여자들은 화내는 것을 힘으로 삼아서 원하는 것을 말한다. 사문과 바라문은 참는 것을 힘으로 삼아서 항상 다른 사람보다 낮다고 생각한 연후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한다. 불교에서는 자신을 낮추어서 생각하는 마음을 하심(下心)이라고 한다. 사문(沙門)은 출가한 스님을 말하는데 사문은 나쁜 마음을 쉬게 하는 식악(息惡)의 뜻이 있다. 식악은 모든 마음의 번뇌를 쉬게 하는 것을 말한다. 사문을 다른 말로 하면 부지런히 수행한다는 뜻에서 근행(勤行)이라고도 한다. 바라문(婆羅門-Brahman)은 인도의 4성(姓)계급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귀족계급을 말한다.
동시에 바라문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계급에도 속한다. 옛날에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제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 계급인 찰지리(刹帝利-ksatriya)는 왕족이나 무사와 같은 사회 지배계급을 말한다. 그 다음 계급인 비사(毘舍-vaisya)는 농사짓고 토목을 하는 서민계급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수드라(sudra)는 노예계급을 말한다. 수드라는 아무리 뛰어나도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살아야 한다. 인도는 이와 같이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발전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인도의 이러한 사성계급을 타파하고 나선 것이 불교이다.
국왕은 교만으로써 힘을 삼고 호걸 같은 기세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다. 아라한은 오로지 정진하는 것을 힘으로 삼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라한은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었다는 면에서 살적(殺賊)이라고 한다. 살적은 직역하면 도적을 죽인다는 말이지만 도적은 번뇌에 비유된 말이다. 아라한은 번뇌를 모두 소멸한 수행력을 가진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은 수도를 잘해서 내적인 번뇌를 다 끊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든지 공양에 응할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응공이라고도 한다.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대비로써 힘을 삼아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
<대승불교연구원/ 오형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