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申砬)과 배수의 진(背水之陣. 배수지진)
1. 배수의 진(背水之陣. 배수지진)
背水之陣(배수지진)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치다는 의미로서 필승을 의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략을 말한다. 중국 한(漢)나라의 한신(韓信. ?~BC 196)이 조(趙)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의 고사로서 강·호수·바다 같은 것을 등지고 치는 진(陣)으로서 물러가면 물에 빠지게 되므로 필사(必死)의 각오로 적과 싸우게 되는 것으로 줄여서 背水陣(배수진)이라고도 하며 濟河焚舟(제하분주), 破釜沈舟(파부침주), 捨糧沈舟(사량침주), 기량침선(棄糧沈船)도 같은 의미이다.
濟河焚舟(제하분주) 물(강)을 건너고 배를 빠뜨린다.
破釜沈舟(파부침주) 밥짓는 솥을 깨고 돌아갈 때 탈 배를 가라앉힌다. 솥을 깨뜨리고 배를 가라앉힌다. 항우(項羽. BC 232~202. 본명 항적(項籍). 자 우(羽))가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린 데서 유래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것을 비유하는 말(출전 : 항우본기(項羽本紀)). 破釜沈船(파부침선).
捨糧沈舟(사량침주)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 필사의 각오로 결전에 임함.
棄糧沈船(기량침선) 식량을 버리고 배를 침몰시킨다.
2. 신립의 배수의진
가. 니탕개(尼蕩介)의 난(선조 16년 1583년) 진압
여진족 추장 니탕개(尼湯介)는 조선에서 관록을 주어 대우하고 회유와 강경 정책에도 약탈행위가 그치지 않았다. 니탕개난은 경원을 비롯한 여러 진을 함락시키고 기세가 자못 심하였으나 신립(申砬)은 기병 500명을 이끌고 첨사 신상절(申尙節)의 분투로 여진족 1만여명을 진압할 수 있었고 다음 해 선조 17년 1584년 에 함경도 북병사가 되었으며 선조로부터 환도(環刀)와 수은갑두구(水銀甲頭口) 등을 수여 받았고 기병술에 능해서 여진족에게는 두려운 장수로 알려졌으며 조정에서도 무관으로서의 입지가 높았다.
나. 임진왜란
⑴ 부산상륙
왜는 1592년 선조(1567~1608)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고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첨절제사 정발(鄭撥)과 부장 이일운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전사시키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⑵ 이일(李鎰) 상주 패주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순변사, 함응대와 조경을 좌우방어사, 류극량과 변기를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했으나 1592년 4월 25일 상주에서 300명의 군사들은 흩어지고 이일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하였다.
⑶ 신립(申砬)의 충주 패배
① 삼도순변사(三都巡邊使)
이일이 싸워 보지도 않고 패주하자 선조는 여진족과의 실전 경험이 있는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三都巡邊使)에 임명하여 직접 보검을 하사한 뒤 충주로 파견했다. 충주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요충지(要害處)였다. 신립은 4월 26일 죄를 지어 감옥에 있던 의주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관으로 삼고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충주 남쪽 단월역(丹月驛)에 진영을 설치했다.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대는 조령(鳥嶺. 문경 새재) 남쪽 문경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② 김여물(金汝岉)의 전략 미 채택
신립은 김여물과 휘하 장수 몇 명을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는데 조령의 지형을 정찰한 김여물은 신립에게 의견을 냈다. 종사관은 참모이고 전략가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제갈량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김여물이고 김여물은 상당히 병법에 밝은 것 같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銳鋒)과 직접 맞부딪칠 수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險峻)한 요새(要塞)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김여물은 높은 언덕을 점거해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했으나 신립은 찬성하지 않았다. 김여물은 문경 새재의 좁은 길을 지키면 일본군의 북상을 적어도 한 달 이상 막을 수 있다고 보았으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조련된 기마병으로 대승을 거둔 적 있는 신립은 "이 지역은 기마병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면서 기마병으로 일본군을 상대한다면 승산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③ 새재 포기와 탄금대 주둔
신립은 문경 재새(조령)을 포기하고 충주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갔다. 이튿날인 27일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로 나가 남한강과 달천에 등지고 주둔하여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왜군은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④ 패전과 투신 자살
1592년 4월 28일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종사관 김여물의 조령에 진을 치자는 의견을 물리치고 탄금대의 금강 상류를 등지는 배수진을 친 신립은 코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에게 패배하여 부하 8000명중 2~3명만 살아 남고 김여물과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⑷ 신립의 패전 이유
① 전술의 실패
김여물 이하 여러 장수들은 수적으로 불리하니 조령의 천연지형을 이용해 적들을 협곡으로 끌어들인 다음 양쪽에서 공격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신립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서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주인공 마속(馬謖)의 이야기를 해보자. 마속(馬謖, 190 ~ 228.)은 중국 촉한의 장수로 자는 유상(幼常)이며 형주 양양군(襄陽郡) 의성현(宜城縣) 사람이다. 재주가 뛰어난 5형제중 막내로 바로 위의 형이 백미(白眉)로 유명한 마량(馬良)이다. 제갈량의 신임을 받았으나 가정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제1차 북벌을 말아먹은 책임을 져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성어를 남기고 죽었다.
제1차 북벌에서 228년 마속은 가정(街亭, 지금의 간쑤성 친안 현)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제갈량의 당부도 듣지 않고 왕평(왕평.?~248)이 평지에 진을 쳐야지 산에 진을 치면 안된다고 여러 번 간했으나 마속은 말을 듣지 않고 산 위에 진을 치고 위나라 장합(張郃)이 물을 길어 나르는 길을 끊고 공격하니 대패한다. 이때 왕평 휘하의 군사 1천만이 북을 울리고 자리를 지키자 장합이 매복이 두려워 접근하지 못해 왕평은 흩어진 병사들을 조심스럽게 수합한후 돌아왔다. 마속은 군률에 따라 처형되고 승리는커녕 자신의 생명도 지키지 못했다. 반면에 제갈량(諸葛亮)은 왕평을 치하하며 참군(參軍),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오부(五部)를 통솔하게 했다.
泣斬馬謖(泣斬馬謖) 울면서 목을 벤다. 군율을 세우기 위하여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도 버림.백미(白眉) 흰 눈썹. 가장 뛰어난 사람.
馬良字季常,襄陽宜城人也.兄弟五人,竝有才名,鄕里爲之諺曰: “馬氏五常,白眉最良.”良眉中有白毛,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마량전(馬良傳)
馬良字季常,襄陽宜城人也. 마량의 자는 계상으로 양양 의성 사람이다.
兄弟五人,竝有才名, 형제 다섯 사람이 함께 재주에 따른 명성이 있었는데
鄕里爲之諺曰: 마을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했다.
“馬氏五常,白眉最良.” “마씨의 다섯 형제 중에 흰 눈썹을 지닌 이가 가장 뛰어나다.”
良眉中有白毛,故以稱之. -『三國志』 「촉서(蜀書)」마량전(馬良傳)
마량이 흰 눈썹을 가졌기 때문에 백미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었다.
② 경적필패(輕敵必敗)과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신립은 평소 일본군을 왜노(倭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 근심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만함도 전장에 선 장수로서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요인이었다. 적을 잘 알지도 못했다. 경적필패하고 적을 얕보면 패하기 마련이고 손자가 말하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는데 신립은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오는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도 몰랐다. 신립은 자신도 모르고 적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항간에는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손자(孫子. 본명. 孫武)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쳤던 승전의 기억에 매몰돼 기병을 고집했고 결국 참담하게 패했다. 개활지라고는 하나 논이 많고 습지가 많은 충주 땅은 말굽이 땅에 박혀 기병의 기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신립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輕敵必敗(경적필패) 적을 얕잡아 보면 반드시 패함.
知彼知己百戰不殆(지피지기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③ 유비무환(有備無患)
충주 전투가 패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신립이 지형을 세밀하게 살피고 참모들의 전술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신립의 작전 실패와 오만 고집 말고도 하지만 조선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다시피 했다. 일본이 서양식 조총을 대량 확보하고 잘 조련된 군사와 조직력을 가진 데 반해 조선은 무기라고는 녹슨 활과 칼이 대다수였다. 칼과 활로서 훈련받고 잘 조직화된 일본의 조총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有備無患(유비무환) 어떤 일에 미리 대비함이 있어야 근심이 없음.
曲突徙薪(곡돌사신) 굴뚝을 구부리고 섶나무를 옮긴다. 화를 미연에 방지함. 亡羊補牢(망양보뢰),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 桑土綢繆(상두주무).未雨綢繆(미우주무)도 같은 의미이다.
④ 훈련되지 않은 약한 군사력(烏合之卒. 오합지졸) 병력은 수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衆寡不敵. 중과부적) 오랜 평화로 군사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전장에서 군사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장수들 역시 실전 경험이 부족해 전략과 전술이 허술했다. 전쟁 초기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전력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도 신립이 패장이 된 이유다.烏合之卒(오합지졸)까마귀들이 모인 것 같은 군사. 임시로 모집하여 훈련이 없는 군사.
衆寡不敵(중과부적)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할 수 없음. 寡不適中(과부적중).
⑤ 제승방략(制勝方略)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제도 패배의 원인이었다. 분군법(分軍法)이라고도 하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작전 지역에 군사들이 모이면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는 방식으로서 임진왜란과 같이 시간을 다투는 전면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신립의 경우도 전쟁이 일어나고 급하게 충주에 파견돼 충주의 지리적 특성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략 수립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지방 방어 체제
| 지방 | 북방 翼軍 | 翼軍體制 → | 진관체제(鎭管體制) → | 제승방략체제(制勝方略體制)→ | 속오군체제(束伍軍體制) | 영장체제(營將體制) |
남방 營鎭軍안→ |
| 특수 | 雜色軍, 別技軍(1881), 심영(沁營, 강화도), 서영(西營,평안도), 남영(南營, 경상도)(1882~4), 진위대(鎭衛隊(1895) |
⑸ 결어
신립은 훌륭한 장수였지만 전략 실패와 자만으로 전투에 패해 조선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했으나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장(忠將)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았다. 신립의 묘역은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1에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고 불행과 비극을 되풀이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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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3(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에 가서 산쪽 길을 가는데 신립 장군의 묘역의 표지가 있어 산까지 올라가 참배를 하고 신립 장군과 관련 내용을 서술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