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9
붉은 여왕의 나라
낚시 철이 돌아왔다. 낚시는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시작한 어로 기법 중 교묘한 속임수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다. 근래 들어 발전한 루어낚시는 인조미끼를 이용해 고기를 낚는다. 가짜 미끼는 피라미를 비롯해 새우나 곤충까지 생김새도 다양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 움직여 눈 속인다.
만약 인간이 낚시할 줄 몰랐다면 오늘날과 같은 인류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물고기는 인간에게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고 맛있는 식품일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식량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낚시가 어민들의 생업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낚시를 레저활동으로 즐기는 사람의 수가 2016년에 이미 7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낚시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유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낚시라는 단어가 고약하게 변질하기 시작했다.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란 합성어 때문이다.
'Phishing'은 'fishing(낚시)'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타인의 개인정보를 낚아서 사기 친다는 의미로 쓰인다. 보이스피싱이란 신조어는 법령에 명시된 법률용어가 되었고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등의 관련 법까지 생겼다. 낚시의 대상이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 된 셈이다. 손발이 얼어붙는 새벽 댓바람부터 거친 파도를 타는 어부들이 통탄할 일이다.
얼마 전 사기당한 취업준비생을 자살로 내몬 보이스피싱 주범이 잡혔다. 놈이 사칭한 이름이 '김민수 검사' 였다. 보도대로라면 조직원이 90여 명이고 피해액은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건을 맡게 될 재판부는 법관의 양심이 아니라 법의 양심에 따라 법률이 정한 최고의 형량을 주문하길 기대한다.
보이스피싱의 대표적인 유형을 보면, 가족이 납치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거나 사고를 당했다고 정신없게 만든다. 금융범죄에 연루되었다고 겁박한 대표적인 예가 자칭 김민수 검사였다. 금융대출금리를 낮은 조건으로 전환해준다고 꼬드기기도 한다. 지인의 이름으로 송금을 부탁하거나 개인정보가 유출되어 빨리 다른 계좌로 옮겨야 한다고 설레발 치는 건 오래된 수법이다. 젊은이가 걸려들면 취업을 미끼로 개인정보를 요구하기도 한다. 금융정보를 캐내기 위해 문자를 보내 링그하거나 파일을 내려받게 하는 것도 고전이다. 최근에는 아예 휴대전화에 악성 앱을 설치하여 금융회사나 수사기관에 확인 전화를 하더라도 보이스피싱 조직에 연결되도록 한다고 한다. 새로운 루어 미끼를 줄기차게 개발하는 것을 보면 사기꾼들의 재주가 특허감이다.
언뜻 영악한 한국 사람들이 그따위 미끼를 어떻게 덥석 물까 싶다. 그러나 보이스피싱 사건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언론에 보도된다. 피해자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거나 콩 싶은데 콩만 나는 것으로 아는 순박한 사람이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놈들의 미끼가 보통 그럴싸한 것이 아니어서 막상 꼬리를 흔들면 영락없는 피라미다.
사기꾼이 날뛸수록 쫓는 일도 바빠진다. 경찰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택시기사가 경황없는 여성 손님이 보이스피싱에 낚인 상황을 눈치채고 기지를 발휘해 범인을 잡았다고 한다. 이쯤에서는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s Hypothesis)이 등장한다.
붉은 여왕이라는 말은 원래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소설 속의 붉은 여왕은 주인공인 앨리스에게,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도록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는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주변 세계도 그에 따라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달려야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뜀박질 가설은 엉뚱하게도 진화학에서 채택되었다. 자연환경과 경쟁자는 언제나 변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어떤 생물이 생존하려면 주변 환경과 경쟁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자연계의 경쟁에선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는 개념으로 붉은 여왕 가설을 차용한다.
이 이상한 나라 이야기는 기업경쟁론을 설명할 때도 곧잘 등장한다. 끊임없이 혁신하지 못하는 기업은 도태된다는 관점에서다. 보이스피싱을 업으로 삼은 낚시꾼들이야말로 붉은 여왕의 나라에 살고 있는 마라토너들이 아닐까 싶다.
불행하게도 달리기 가설은 보이스피싱에도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CCTV를 달아도 훔치는 도둑이 있고 쫓는 경찰이 있는 것을 보면 보이스피싱도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다. 시민들의 경각심이 높아지고 수사기법이 발전할수록 사기꾼들도 갖은 잔머리를 굴리며 진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놈들은 좀 더 그럴듯한 미끼를 개발하여 낚싯대를 휘두를 것이 분명하다. 코로나가 대면접촉을 어렵게 하는 상황도 얼굴 없는 사기꾼들에게는 호재다.
도둑이나 사기꾼은 남의 재산을 대가 없이 가져간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피해자에게 주는 상실의 감정은 다르다. 도둑은 최소한 배신이란 똥을 싸지르지 않지만, 사기꾼은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극대화한다. 오죽하면 젊은이가 목숨을 끊었겠는가? 그런 점에서 사기꾼의 형량을 높일 필요가 있다.
두 손 멀쩡한 놈들이 흡혈귀가 되어 누군가의 고혈을 빨기 위해 주둥이에 빨대를 물고 다닌다면, 부득이 노동하는 인간이 될 때까지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문제는 범죄에도 형평성이란 게 있어 마냥 가둬둘 수도 없는 모양이다.
기초생활 수급으로 끼니를 이어가는 장애우의 비상금,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침을 맞겠다고 속곳 주머니에 넣어둔 마늘 값, 건설일용노동자의 어린 자식 병원수술비를 보이스피싱으로 잃었다는 뉴스를 보면 분노를 넘어 허탈해진다. 흡혈귀들에게 분에 넘치도록 자비로운 법정의 방망이를 빼앗을 수는 없는 걸까? 젊은이는 죽었는데 법의 정의는 살인을 비켜 간다.
집채만 한 파도를 타며 고기 잡는 어부와 뱃전을 맴도는 도둑 갈매기가 한데 거친 바다에 있으니 고약한 생존의 생태계다. 인간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을까? 물고기를 훔치는 갈매기도 심장에 고이는 피가 따뜻한 온혈동물이라는 점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