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익산의 독립운동
내 고향은 전북 익산(益山)이다. 그곳에서 나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산 지 어언 50년이 흘렀다. 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일이 있어 찾아가 볼 때마다 밋밋한 자연환경은 변함이 없고, 타 도시에 비해 경제적 발전도 더디고 인구수도 점차 줄어드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했다. 내가 평소 관심 기울이고 있는 독립운동의 경우도 그러했다. 일찌감치 고향을 떠난 탓도 있겠지만 익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나 익산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이야기를 별로 듣지 못했다. 내 고향에서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부족했던 것일까? 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안동이나 밀양 같은 곳을 고향으로 둔 이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실은 등잔불 밑이 어두웠다. 익산의병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익산의병전쟁사”와 그 속에 수록된 익산의병장 이규홍의 “오하일기”를 읽으면서 익산의병들의 활약상에 놀랐고, 더욱이 이규홍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고향마을의 이웃 동네 어른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또한 3.1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상세히 담고 있는 박은식의 명저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운동 당시 가장 뜨겁게 전개된 만세시위 현장 중의 하나로 내가 수없이 오간 익산역 광장이 소개되고 있는데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익산의 독립운동이 그 어느 곳에 못지않게 치열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인 광범위성을 특징으로 한다. 특별히 어디라고 가릴 것 없이 전국 곳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넋이 많이 잠들어 있고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치는 독립운동 사적들도 부지기수다. 우선 내 주변부터 챙겨 볼 일이다. 내 고향 익산의 독립운동을 의병투쟁과 자정 순국, 그리고 3.1운동으로 나누어 차례로 더듬어 보았다.
우리 역사는 임진왜란 당시 3대 승전으로 한산도, 행주산성, 진주성 대첩을 들고 있다. 그런데 왜적들은 그보다 ‘이치 전투’를 더 뼈아픈 패전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치(梨峙)는 충남 금산에서 전북 완주‧전주로 넘어가는 대둔산에 있는 ‘배티재’라고 불리는 고개이다. 권율 장군이 이끄는 1,500여 명의 조선 군사들이 1592년 9월 그곳에서 1만여 명의 왜군과 맞서 싸워 전주성과 호남평야를 지켜냈다. 그 전투에 익산군 금마면 출신의 이보와 소행진이 낫과 쇠스랑을 든 익산의 농민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권율의 부대에 합류해 같이 싸우고 모두 장렬히 순국했다. 그 의병들의 숭고한 애국혼이 누대를 두고 후손들에게 이어졌는가? 구한말에 이르러 같은 적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고자 익산의병들이 또다시 떨쳐 일어선다. 평야지대에 있는 익산은 자연적 여건 때문에 의병활동을 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곳이다. 그래도 수많은 의병들이 앞다투어 나섰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규홍(李圭弘)이었다. 오하(梧下) 이규홍은 익산 팔봉 태생으로, 20대의 약관에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1906년 박이환‧문형모와 함께 옥구 출신의 임병찬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와 함께 면암 최익현이 이끄는 태인의병에 참여했다. 그 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 소식을 듣고 1907년 12월 익산 팔봉면 석암리 관동부락 앞 야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부친 이기영은 전답을 팔아 수만 원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27세 이규홍 의병장의 지휘 아래 7개 지대로 구성된 257명의 익산의병들은 완주‧진안‧장수‧금산 등지를 풍찬노숙하면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혈전을 치렀다. 그러나 병력과 무기의 현저한 열세 속에 대부분 병졸이 죽고 흩어졌다. 결국 1908년 4월 대전시 동구에 있는 식장산 장군바위 아래서 이규홍은 눈물을 머금고 남은 의병들을 해산시켰다. 당시의 심경을 그는 오하일기에 한 편의 시로 남기고 있다.
칼을 던지고 빈산에 앉아 있으니 投劍空山坐 흐르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누나 漏零沾戰衣 저 두견새도 나의 마음을 아는지 蜀鵑解知意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고 우는가 啼罷不如歸
이규홍은 지하활동을 계속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1914년 4월에는 임병찬의 대한독립의군부 창립을 돕기도 했다. 일제는 무려 4,000원의 현상금까지 걸고 그를 검거하려고 혈안이 됐다. 그는 줄곧 대전시 동구에 있는 지인인 송창재‧덕재 형제의 집에 은신해 있다가, 1917년 10월 일본 헌병이 급습해 오자 그 마을 뒤편 오도산으로 피신하던 중 총상을 입었다. 국내에서 투쟁의 한계를 느낀 이규홍은 1918년 5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이동녕‧안창호‧신익희‧이광수 등 임정 요인들을 만나고,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김규식에게 사재를 팔아 준비해간 돈 1,300원을 경비로 지원했다. 그리고 1920년 3월 간도에 가서는 김좌진 장군을 만나 군자금으로 남은 돈 3,000원을 마저 내놓았다. 당시 쌀 1가마가 대략 10원 정도였다. 그 후 1921년 6월 국내정세를 살피고 군자금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몰래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걸인이나 보부상 행세까지 하면서 계속 암약하던 중 1924년 3월 서울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가 4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 오른팔이 부러지는 등으로 사경을 헤매자, 일본은 의병 창의가 18년이나 되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를 붙여 그를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이규홍이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 44세였다. 집을 떠날 때 태중에 있던 아들은 18세가 되고, 부모는 모두 작고한 뒤였으며, 그 많던 가산은 거의 탕진된 상태였다. 출옥 후에도 내내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1929년 6월 향리 관동자택에서 한 맺힌 삶을 마감했다. 그의 부친 이기영이 500마지기, 동생 이규연이 85마지기의 전답을 팔아 그의 독립운동자금을 댔으니, 온 가족이 독립운동가였다.
1910년 끝내 국권을 침탈당하자 많은 항일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정(自靖) 순국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운명을 통탄하고 나라를 지키지 못한 자신의 책임을 묻고자 함이었다. 죽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항거이고, 독립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구한말 을사늑약 체결 시부터 시작해서 망국의 설움과 울분 속에 자결하여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 받은 사람이 전국에서 총 61명에 이른다. 적지 않지만, 그리 많지도 않다. 이를 시도별로 나누면 경북 17명 다음으로 전북이 11명으로 가장 많고, 그중에 세 분이 바로 익산인이었다. 김근배(金根培)는 익산 모현동 태생으로, 호는 매하(梅下)이고 본은 김녕(金寧)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적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짓고 의병을 일으켰다. 성균관 박사로 있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하여 제자들에게 한학을 교육하면서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그를 포섭하려고 은사금을 보내자, 그는 “살아서 능욕당하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정동식(鄭東植)도 익산 모현동 출신의 훈련원 무관이었는데,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날 곧바로 밤새워 토적문을 짓고 날이 밝자 완산부로 들어가 안찰사에게 “내가 힘이 없어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그 부끄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죽어 귀신이 되어 저 왜놈들을 섬멸하여 우리 선왕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라고 고했다. 그리고 의관을 정제하고 전주 공북루에 올라 목을 매 순국했다. 김영세(金永世)도 역시 익산 사람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를 통탄하고 원수 일본의 백성이 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자결했다.
1919년 3.1운동은 반세기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일어난 최대 사건이요, 전국적으로 펼쳐진 전민족적인 거사였다. 익산지역도 예외일 순 없었다. 오히려 더 거세고 뜨거웠다. 3.1운동은 일제 식민통치의 탄압과 수탈에 신음하던 이천만 민중들의 힘과 뜻이 결집된 항거였는데, 익산에서 그렇게 3.1운동이 치열했던 데에는 필연적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익산은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 반출을 위해 군산항을 전진기지로 삼고 전군도로와 익산-군산간 철도를 개설해 익산을 교통요지로 구축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을 익산지역에 대거 이주 정착시켜 농토를 사들이게 했다. 3.1운동을 전후해서 전북지방에는 40여 개의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사무실이 자리 잡았는데, 그중에 절반 이상이 익산지역에 집중되었다. 그 하나인 ‘오하시(大橋)농장’이 소유한 논 면적만 해도 1,300ha에 달했다. 이렇게 익산은 일제의 토지수탈의 최전선이 된 것이다. 그들은 헐값에 농토를 사들이고 조선인들에게 이를 턱없이 높은값에 소작 주었다. 그래서 소작민으로 전락한 조선 농민들이 피땀 흘려 지은 쌀들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 본토로 공출해갔다. 또한 익산은 3.1운동의 주도 세력인 천도교가 널리 전파된 곳이었다. 당시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한의 각 시도 중에서 천도교의 교인 수가 가장 많은 곳이 전북이었다. 특히 익산지역의 교세가 강했고, 교단의 중앙 간부로 활동하는 오지영‧정용근이 익산 출신이어서 교주 손병희가 이끄는 3.1운동의 지휘부와 신속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익산지역의 초기 3.1운동은 천도교 측에서 주도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익산지방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것을 시발로, 3월 10일 여산면 장터를 비롯한 익산 곳곳에서, 그리고 3월 18일과 28일 금마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잇달았다. 모두 천도교 교인 중심으로 시위가 이루어졌으나 안타깝게도 초기에 진압되고 말았다. 일본인이 많이 사는 익산에는 일본인 지주들이 자경단을 구성해 자체 경비에 나섰고, 또 일본군의 무장병력이 추가로 배치되어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10일 여산면의 만세 시위를 이끈 김치옥은 옥고를 치르고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래도 익산 사람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번에는 기독교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익산 오산리에 있는 남전교회의 문용기(文鏞祺) 장로를 중심으로 한 교인들이 교회에서 운영하던 도남학교 학생들과 천도교 교인들까지 끌어들여, 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익산 솜리장터(지금의 남부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열기로 계획했다. 그 장터는 오하시농장 바로 앞이었다. 4월 4일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익산역 쪽으로 가두시위에 나선 군중은 처음 3백여 명으로 시작해 점점 1천여 명까지 늘어났다. 일경은 시위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시위대를 이끌던 문용기 열사 등 6인이 시위 현장에서 사망하고 39명이 검거되었다. 문용기의 순국 장면은 참으로 장렬했다. 일경이 칼을 휘둘러 열사의 오른팔을 베자, 열사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전진했다. 일경이 왼팔마저 베었는데도 열사는 만세를 그치지 않았고, 가슴을 칼에 찔려 피를 쏟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군중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도와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의 보고서에도 “수모자(首謀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혀 있다. 익산지역의 3.1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인물이 익산 금마면 출신의 임규(林圭)로서, 3.1운동을 주도한 죄로 기소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신문화운동과 교편생활을 해오다가, 3.1운동 당시 최남선의 독립선언서 작성을 도왔다. 그리고 거사일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그 독립선언서를 직접 일본어로 번역하고 인쇄해 일본 총리와 90여 명의 정치인, 20여 명의 학자, 주요 언론사 등에 우송한 후 체포되어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밖에 1920년대 이후로도 신간회 익산지부를 결성해 항일활동을 펼쳤던 배헌‧임혁근‧임영택, 이리농림학교 학생으로 일제의 한국 학생 차별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화랑회’라는 학생조직을 만들어 목천포 철교를 폭파하려고 기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순국한 이상운 등 청년 열사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가람 이병기, 그리고 민병 독립의용군으로 활약한 수많은 무명용사들이 익산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익산 지역에는 일반인들에게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 사적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익산 팔봉에서 금마 방향으로 무왕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 길가에 익산의병장 이규홍의 묘역이 나타난다. 묘역 안에 우뚝 서 있는 의병기념비에는 두견새 울음 속에 피눈물로 쓴 그의 한시가 새겨져 있다. 한편 국권 침탈에 항거해 목숨을 끊은 김근배의 위패를 모신 매곡사(梅谷祠)가 익산시 모현동 매곡마을에 세워져 있었는데, 유감스럽게 아파트 건축 개발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4.4만세운동이 일어난 익산 남부시장 일대에는 4.4만세기념공원이 조성되고, 문용기 열사의 동상과 순국열사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익산역 광장에는 동아일보사가 1971년 광복절에 익산시와 공동으로 건립한 3.1운동기념비도 서있다. 그 기념비를 전국에서 최초로 익산에 세운 까닭은 익산 4.4만세운동이 그만큼 치열하고 희생이 컸던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적지들은 하나같이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대부분 시설이 변변치 못하고 관리상태도 소홀하기 짝이 없다. 썰렁한 묘소, 덜렁 놓인 기념비나 동상이 보기에도 너무 송구스럽다. 시민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학생들에게도 생생한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보다 알차고 정성 들인 사적지 관리가 아쉽기만 하다. 그런데 익산의병기념사업회가 발표한 ‘익산의병기념공원’ 조성 사업계획이나 4.4만세운동의 현장인 남부시장 인근에 있는 옛 오하시농장 사무실 건물을 복원해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사업계획은 모두 어찌 되어 가는 것일까?
익산 땅을 휘감고 만경강이 흐른다. 만경강 일대를 예부터 ‘노화십리(蘆花十里)’라고 불렀다. 그만큼 만경강 연안에 만개한 갈대꽃이 장관이었나 보다. 그 갈대꽃이 ‘솜’처럼 보인 데서 익산 읍내의 옛 지명인 ‘솜리’가 유래했고, 일제는 이를 ‘속리’로 새겨 한자명으로 ‘이리(裡里)’라고 고쳐 불렀다. 이제 익산에 통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명이지만, 그 이름 자체로써 일제의 야욕을 드러낸 듯하다. 익산은 유난히 식민과 수탈로 얼룩진 땅이었다. 그런 만큼 그 땅의 민중들은 꿋꿋하게 저항했다. 그래서 익산의 독립운동은 그 어느 곳보다 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내 고향 익산은 실로 자랑스러운 의향이고 항일투쟁지였다. 향리의 독립운동을 바로 알고 자긍심을 갖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애향심의 출발일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