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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교회 전덕기 목사 / 스크랜턴 선교사
전덕기는 한말 격동기의 시대에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쳤던 큰 인물이다. 단순히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울타리에서만 활동했던 인물이 아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던 민족의 지도자였고 애국자였다. 당시 전덕기를 중심으로 국내 모든 민족운동이 주도되었고 상동교회 지하실을 거점으로 해서 민족운동이 전개되어 전덕기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후대에 상동파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의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구국운동은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덕기의 입교 동기와 목회 배경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나이 9세 때에 부모를 다 잃고 숯장사를 하는 숙부 밑에서 성장하였고, 가난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총명한 사람이라 이웃집 서당에 가서 어깨 너머로 배워 약간의 한자를 알게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 전덕기의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당시의 지도자나 우국지사들과 같이 높은 교육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에 후에 민중을 위한 목회의 토대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전덕기가 17세 되던 1892년에 정동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스크랜튼 선교사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사이며 의사이자 목사인 스크랜튼은 1885년 5월에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 일찍이 자리를 잡고 시병원이란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도 역시 정동에서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 교육과 선교에 진력하고 있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의 집에서 기거하며 일하고 밤에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상동교회에 세례(1896년), 입교함으로서 상동교회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던 병원을 민중 선교의 본거지인 서민들이 많고 사람들이 밀집해 모여있는 남대문으로 옮겼다. 1893년 그는 병원교회를 정식 상동교회로 조직하며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전덕기는 스크랜튼이 민중중심의 선교를 해나갈 때에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도와 일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과 함께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인품과 신앙을 본받게 되었다. 전덕기는 상동교회에서 크고 작은 일을 돌보며 청년회원과 회장으로서, 또는 속장과 교회 중견직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1년 상동교회의 새 예배당이 완공되던 날 권사로 임명되어 담임목사와 신도들로부터 촉망받는 일꾼이 되었다. 결국 그는 1902년 미 감리회 연회에서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학회의 전도사 과정을 꾸준히 참석한 그는 1905년 집사목사(현재의 준회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스크랜튼이 사임한 후 뒤를 이어 전덕기 목사는 1910년에 장로목사(현재의 정회원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다. --전덕기와 상동청년학원전덕기는 1897년에 설립된 상동청년회에 임원 및 회장 등 주요직책을 맡으면서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1903년부터 전도사였던 전덕기는 부담임자로서 실질적으로 상동교회에서 설교, 심방, 교회 일들을 돌보았다. 상동교회에서 청년회를 주도할 때부터 그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국운회복과 민중계몽에 힘쓰며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결국 수 천 여명의 애국 청년들이 전덕기가 있는 상동청년회로 모여들었다. 당시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은 지도자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고 포용력이 있었던 전덕기를 중심으로 다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상동청년회에서는 기도회, 전도토론회, 연설회, 매일학교 운영 등의 활동으로 신앙함양뿐 아니라 근대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갖추도록 힘썼다. 상동청년회는 단순한 신앙활동과 친교에 만족하지 않고 교육을 통한 빈곤추방과 구세회복을 취지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상동교회 안에는 이미 189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설립된 공옥여학교와 1899년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된 공옥남학교가 있어 초등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중등교육기관이 없었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로 상동청년학원이 시작되는데 이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경천애인 사상에 근거하여 지, 덕, 체를 겸비한 이 나라의 참된 일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04년 10월 15일 상동청년학원이 개교되었는데 설립자는 청년회 회장 전덕기였고 교장에는 이승만, 부교장에 박승규, 교사에 스크랜튼 대부인(영어), 주시경(국어), 헐버트(역사), 류일선(수학), 김창환(체육), 이필주(군사훈련), 전덕기(성경, 종교)등이 맡았다. 이러한 교과목은 당시 새로운 것이었고 교사진 역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애국지사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교과목에 군사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전투훈련을 통해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대항하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의 준비라 볼 수 있다. 그 후에 류일선, 노병선, 이필주 김진호, 이동령, 장도빈 조성환, 최남선, 남궁억, 장지연, 여준 등의 교사들이 상동청년학원에 재직하며 인재양성에 힘썼다. 학원운영자금에 있어서도 설립자인 전덕기가 나서서 재무를 맡고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자기의 생활비를 절약하던지, 사회로부터 성금을 호소하고 학원을 꾸려나갔다. 전덕기 목사의 상동청년학원은 일반에 환영을 받았는데 3년제의 중등학교로서 교사진이 뛰어났으며 민족주의 학교로서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그 후 수업연한이 4년제로 연장되었고 철저한 기독교적 인격자를 양성하는 것과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더욱 수준 높은 교육기관이 되었다. --전덕기와 민족운동상동청년회의 청년학원 운영이외의 구국활동도 놀라운 것이었다. 1905년 8월에는 멕시코에서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는 교포 노동자들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청년회 이름으로 보낸 일은 당시 감히 정부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또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상동청년회에서는 연일 수 천명이 모여 구국기도회를 열었고 지방 청년까지 모여 함께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 또한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구체적으로 모의하여 청년들이 도끼 메고 대한문 앞까지 상소를 하고 시위를 주도한 일, 나아가 전덕기, 정순만 등 청년 임원들이 평안도 장사 수십 인을 모집해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모의까지 했다. 이렇게 그 어느 애국단체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한편 일본의 적극적인 공작과 압력, 그리고 친일적인 선교사들의 정책으로 상동청년회의 활동을 신앙적이기보다 정치적이라고 못 마땅히 여겨 청년회 대한 해산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계속 유지되면서 민족, 구국운동을 해나간다.전덕기는 이제 청년학원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1906년 초부터 기독교 구국단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은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단체와 연결되는데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그리고 전덕기 등 이미 상동교회나 상동청년학원과 직간접으로 인연이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1907년 9월에 신민회가 조직되지만 신민회의 결집력과 전국의 조직확대는 상동파의 인맥과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로 점진적인 국권회복을 꾀하는 정치집단이 신민회였는데 이러한 취지는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에서 전덕기 목사가 추구하였던 노선과 일치하였고 많은 상동파 인사들이 신민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상동교회 청년과 신도들이 애국단체 신민회의 핵심구성원이 되었고 당시 상동교회는 우국지사들의 비밀본부였다. 전덕기는 신민회 조직이나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실질적인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지도자 및 목회자로서 회원들에게 정신 및 신앙적인 힘을 제공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듣고, 이에 전덕기 목사를 중심한 상동파 사람들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기로 모의했다. 이 사건의 온상이 된 것은 상동교회 청년회였고, 그 배후에는 전덕기 목사와 헐버트가 있었던 것이다. 전덕기 목사는 신민회에서 재무를 맡아 일하였고 서울의 총감직을, 그리고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에서는 의사부와 종교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가 계몽강연에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할 때 대성황을 이루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 데라우찌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 이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로써 신민회가 사실상 해체되는데 전덕기 목사와 상동파가 타격 받은 것은 물론이요, 신민회와 인연을 맺었던 여러 인사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전덕기 목사의 사회활동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청년학원에서 발간한 두 월간지 중 하나인 <가뎡잡지>의 회계 일을 보면서 사회적인 면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민중들을 계몽시키려 노력했다. 전덕기에게는 청년, 장년, 상류층, 하류층 모두가 고루 계몽의 대상이었고, 서재필, 이상재, 안창호, 이동휘 이준, 이승훈등과 함께 YMCA 연설, 국민연설회 연설 등 대외 계몽활동과 청년학원내 강습소 활동 등을 펼쳐나갔다.--전덕기 목사의 말년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상동교회와 청년학원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데 수많은 인사들이 취조를 받고 투옥되며 전덕기 목사도 병석에 누워 자유로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표면적인 민족운동은 못하더라도 병상에서 그는 국내 민족 운동가들이나 은신중인 국내 민족 운동가들과 연락하며 영향력을 미쳤다. 결국 불행하게도 전덕기 목사의 병세 악화와 더불어 상동청년학원이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1913년 11월 19일 제 7회 졸업생을 배출시키고 문을 닫고 말았다. 전덕기 목사는 결핵과 늑막염에 걸려 병상목회를 하면서 민족정신과 신앙을 권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결국 병과 싸우다가 가족들과 전 교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1914년 3월 23일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가노라”는 말이었다. 장례식에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조객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에 안장되었다가 1934년 일제의 강요로 인해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로 인해 현재 그의 위패만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전덕기 목사의 목회와 사상첫째 전덕기 목사는 언행이 일치하는 인격자였다.그는 설교나 말에만 그치는 목회자가 아니라 설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였다. 그가 목회하는 상동교회가 주로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병든 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기에 전덕기는 구휼과 치료, 나아가 죽은 후에 장례까지도 책임지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의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덕기 목사에게 감화를 받고 그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었다. 뜻있는 인사들이 구국운동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 지하실로 모여 들었는데 전덕기 목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곳에 모여 비밀회합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실천적 삶을 가진 진실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 전덕기 목사는 민족 구원에 관심 있는 목회자였다. 그는 신앙의 문제를 민족 구원에까지 연결시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구국운동에도 앞장을 서야함을 역설한다. 결국 그에게서 개인 구원은 사회구원으로 연결된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계급적인 사회에 평등을” 준다는 성서의 말씀을 그가 처한 목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려 한 것이다. 사회구원적인 입장에서 항일 투쟁방법도 적극적이고 다양했다. 전덕기가 오늘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당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히 기독교의 아이덴티티를 찾고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이다.셋째 전덕기 목사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전덕기 목사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의 포용력 때문이었다. 민중계층이 상동교회로 많이 몰리게 된 것은 단지 지리적인 조건이나 외적인 위안처로 삼기 위해서였기보다는 전덕기 목사의 넓은 포용력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또한 지식인계층의 인사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고 전덕기를 중심하여 구국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도 역시 전덕기 목사가 모든 애국인사들을 품어줄 수 있는 큰 그릇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실례로 전덕기 사후에 민족 지도자들의 분열현상이 그의 표용성을 알려주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전덕기 목사는 기도와 성경 말씀에 근거한 진실한 신앙인이며 목회자였다. 그는 민중 속에서 출발하여 민중 속에서 생을 마친 민중 목회자였다. 그의 민중을 위한 실천적이고 헌신적인 삶은 당시 교회와 일반 사회에서 그의 지도력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민족운동 전면에 나선 적은 없으나 그가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민족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인물로 활약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암울한 상황 가운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몸소 느끼며 참다운 애국 신앙인의 길을 걸었다. 청년으로 또는 목회자로서 목회 일선에서 시대적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그는 한국교회사에서 길이 빛날 뿐 아니라 한국 민족사에도 지워지지 않는 거목으로서 존재할 것이다.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전덕기 목사전덕기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남대문 시장 숯장수였던 숙부 슬하에서 자랐다. 그런즉 그의 어린 시절은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하다.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친 것은 스크랜튼이라는 감리교 선교사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스크랜튼은 양반 동네에 외국인도 많은 정동에서 교회를 꾸리다가 “민중이 있는 곳” (where people are)으로 남대문 안 상동으로 교회를 옮겨 버릴 정도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기독교인이었고 전덕기는 그로부터 감화를 받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새로 이전한 상동은 이른바 상놈들의 동네였고, 전덕기는 ‘애민구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극빈자들에게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고자 노력한다. 여기까지는 전덕기 자신이 “뼈 속까지 닮고 싶다“고 했던 스크랜튼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전덕기는 뼈 속까지 한국 사람이기도 했다.그는 11월 10일 일본이 을사 조약 체결 이전 군대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무렵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를 개최하여 열렬히 기도를 올린다.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헤이그로 파송되는 이준도 상동교회에 찾아와 그 임무의 성공을 함께 빌었고, 상동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설립하여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는 일제에 저항했다. 훗날 삼일 운동 후 조선 총독부에서 나온 보고서는 상동교회를 “조선 독립 운동의 근원”으로까지 꼽았다.전덕기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 휘하의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교류했던 인물들의 이름을 들다보면 그 무게감이 짐작이 갈 것이다. 민영환, 이동녕, 이상설, 이승만,이시영, 이회영, 주시경, 그리고 김구. 거기에 안창호는 호형호제한 사이. 후일 민망한 말년을 맞기는 하지만 육당 최남선은 “나의 독립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전덕기 목사”라고 토로한 적이 있었다.진정한 기독교인의 죽음전덕기는 경술국치 후 민족운동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제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는다. 그 후 191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고문 후유증과 결핵으로 인한 병마에 시달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바울처럼 편지를 보내는 ‘병상 목회’를 멈추지 않았다.그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필요한 세 가지 물품으로 ‘마른 쑥과 나막신, 그리고 의지(종이로 만든 약식 관(棺))를 들었다. 그것은 연고 없는 가난한 이가 돌아갔을 때 마른 쑥을 콧구멍에 꽂고 들어가 그를 염해야 하기 때문이었고 대개 시체 썩은 물이 방안에 그득하므로 나막신이 필요했으며, 그 종이 관에 싸서 망자를 묻어 주었던 자신의 숱한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그가 돌아갔을 때 서울 장안은 슬픔에 휩싸였다.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모를 초상꾼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관을 잡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가장 슬퍼한 것은 남대문 일대의 거지들 왈짜들, 불한당 소리 듣던 이들이었다. 서울 장안의 기생들도 소복을 입었으며 갑오경장 이래 차별은 없어졌으되 여전히 사람 취급에서 벗어나 있던 백정들도 꺼이꺼이 소울음을 울었다. “우리 선생님이 죽었다. 우리 선생님이 가셨다.”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 리를 헤아렸다고 한다.나이 마흔도 안된 젊은 목사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한 것에는 마땅히 이유가 있으리라.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해 달라고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고 도끼를 들고 달려나가 “조약을 거두시든지 내 목을 치라”고 자신의 황제에게 호소하던 목사. 대한제국에서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썩은 시신들을 거두는데 이력이 났지만 동시에 산 송장과 같은 매국노의 목숨을 거둘 의거를 계획하던 목사….. 그의 생애를 돌이키면 사람들이 그리도 슬퍼한 이유를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준 열사
함남 북청군 속후면 용전리 발영도에서 이병관(李秉瓘)과 청주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성재라 했다. 성(性)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요, 재(在)는 인간이란 그 하늘의 뜻을 따름에 있다는 뜻이다. 3세 때 부모를 잃은 그는, 젊은 시절 이름을 준으로 고치고 호는 일성이라 했다. 준(儁)은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이요, 일성(一醒)은 세상을 한번 깨우친다는 뜻이다. 그는 조부 이명섭(李明燮)과 작은아버지 이병하(李秉夏) 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에 사서삼경에 이르렀다. 17세에는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올라가 대원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 김병시(金炳始) 등과 교제하다 일단 고향 북청으로 귀환했다. 1887년 29세 때 함경도시에 장원한 후 함경감사 조병식(趙秉式)과 협의하여 스스로 2천 평의 토지를 희사,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했다. 1889년 다시 상경한 그는, 김병시의 중매로 1893년 이화학당 출신 이일정(李一貞)과 결혼했다. 그의 나이 35세, 아내 나이 17세로 나이차이가 심했지만,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뜨거운 애국심에 불타고 있어서 부부라기보다 동지적 결합이라는 것이 타당했다. 아내 일정은 생활이 곤란할 때 잡화상을 차려 생계를 꾸렸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부인들의 반지를 빼서 바치는 탈환회(脫還會), 찬거리 값을 절약하여 내는 감선회(減腺會)등을 조직 . 활동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두시위대에 뛰어들어 구국을 외치기도 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함흥에 있는 순릉참봉의 벼슬을 맡아 하향했다가, 일본이 승리하자 그는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의 권유로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했다.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 만에 면관(免官)되고 말았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을미사변 이후 조직된 김홍집 등 친일내각 각료들과 교제가 있던 그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 와세다 대학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였고 마침 그의 체포령이 해제되었다. 이에 귀국하여 다시 독립협회에서 일하는 한편 상동교회 청년회장직을 맡아 힘쓰다가, 독립협회 해산 시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902년 민영환ㆍ이동휘ㆍ이상재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했고,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 침략과 친일 주구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ㆍ대한협동회 등을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했다. 친일파인 일진회와 대항하기 위해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어 친일대신 5명을 성토하다가 체포, 황주 철도(黃州 鐵島)에 6개월 간 유배당했다. 이 때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중에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진실한 신앙에 몰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치생활의 구급피난소로 첫 출발하였으나 여러 신자들과 상종하며, 목사 전덕기와의 관계와 상동 예배당 만국청년회의 관계가 인연이 되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번 유배 가운데서 더욱 예수의 성스러운 희생의 정신인 십자가의 피의 의의를 내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일성의 종교생활의 완전한 출발은 이 불우한 귀양살이 섬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부터는 많은 공사의 생활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일성 이준 열사>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는 전국감리교회 엡웟청년회 연합회가 소집되어 ‘을사보호조약’ 무효상소운동을 결의하였는데, 이 때 상동교회 엡웟회 대표로 참석한 그도 대한문에 나가 상소를 올렸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무참히 해산되고 말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설립하여 소장이 되었으며, 그 해 조직된 항일 결사 신민회에도 참여하였다. 한편 1907년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먼저 들은 양기탁은 즉시 상동교회 공옥학교 교감 이회영에게 알렸고, 이회영은 전덕기 목사에게 알렸다. 전덕기는 이회영, 이동휘 등 여러 동지들과 이 회의에 고종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은 일제의 강압이며 결코 한국 황제의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알려 무효화시키기로 합의했다. 특사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으로 정한 후 이 뜻을 은밀히 고종황제에게 전하였고, 1907년 4월 20일 고종의 신임장을 받았다. 이후 전덕기 목사는 이준에게 신임장을 전달하고 상동교회에서 그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해주었다. 그 해 4월 헤이그로 출발한 그는 도중에 이상설ㆍ이위종과 합류하여 6월 25일 도착,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방해 및 각 국 대표들의 냉담한 태도로 말미암아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다. 그 당시 서울에서 The Korea Review를 발행하며 배일운동을 하던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가 헤이그로 와서 한국 대표를 후원하며 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신문인 의 주선으로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의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고, 이 때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이 세계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이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비분한 이준은 49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으며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있던 유해가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에 이장 되었다.
손정도 목사님 손정도(孫貞道, 1872년 7월 26일 ~ 1931년 2월 1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교 목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아들은 훗날 대한민국 해군 창군 주역이자 해군 제독으로 지낸 손원일이다. 윤치호 일가와는 사돈으로, 윤치호의 이복 동생 윤치창이 그의 맏사위였다. 자는 호건(浩乾), 호는 해석(海石), 문세(文世)이다. 평안남도 출신이다.생애생애 초기187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오흥리(吳興里)에서 손형준(孫亨俊)과 오신도(吳信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아 1872년생 설, 1881년생 설, 1882년생 설이 있다. 유교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손정도의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88년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한학(漢學)을 수학하였으며 관리 지망생이었다. 1895년 23세에 중매로 고향 이웃 아저씨인 박용(朴鏞)의 첫째 딸 박신일(朴信一)과 결혼하였다. 박신일에게서 장녀 진실(眞實, 다른 이름은 원미(元美)), 차녀 성실(誠實), 장남 원일(元一), 차남 원태(元泰), 삼녀 인실(仁實)이 태어났다.과거 포기와 기독교 개종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 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후일 1976년 그의 장남 손원일은 손정도의 개종과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이상 생략)...평소 괄괄하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던 청년은 당장에 몸을 떠는 감동을 맛보았다. 불과 하룻밤도 안되는 사이에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에 몸을 맡기는 변신을 이룬 것이다. ...(이하 생략)...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도피와 중고교 재학사당을 철거한 이 일로 그는 친족들에 의해 패륜으로 낙인찍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가 새벽에 그를 깨워 잠옷 바람으로 빼돌려 야간도주를 하게 되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 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목사를 통해 평양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되고 면담하였다.문요한과의 상담 후 문요한은 그를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추천,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김형직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독재자 김일성의 생부였다.선교 활동졸업반이던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실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시험 부정행위, 절도, 속임수, 험담, 불평 등을 회개할때 참여하였다.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관리 지망생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1909년 미국 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내외국선교회”를 창립하는데 가담고 중국선교를 시작하려 할 때 선교사를 지원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1910년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차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 체류 중 조성환(曺成煥)을 만났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신민회의 핵심 인원이었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와 소개를 주고 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서로 아우님, 형님 하는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한국 내 신앙 운동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1911년 연회참석 차 귀국하여, 그해 4월 "기독교인의 자신력(自信力)"이라는 글을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면서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자력,자주를 역설했다.감리교회 선교사1911년 손정도는 한국에서 집사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1912년 3월 귀국,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선교활동을 보고하자 다시 “청국 봉천 북방 할빈 남방” 선교사로 재파송되었다. 1912년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설교,노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예배당을 헌당하고, 한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1912년 하얼빈(哈爾濱)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에도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여 순사, 형사를 비롯하여 유배지 근처의 주민, 수십리 밖의 진도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1914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다.감리교 성직자가 되다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 때 탁사 최병헌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동대문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당시 교회의 규모는 전도사 6명, 지교회수 12곳, 입교인 312명, 학습자 142명, 원입자 469명 등 924명이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은 786명이었다. 성직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했다고 한다.1915년 감리교로부터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다. 손정도 목사를 존경한 동대문교회 교우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손정도의 교회 이임을 극구 반대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억압과 덕수궁에 살았던 고종을 위해 근처의 가옥들을 이전시켜 이화학당,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그는 1916년 이전에 해산된 엡워스 청년회를 10년 만에 재조직하고,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도 제거했다. ‘손정도식 설교’, ‘손정도식 목회’는 여기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1916년 교세는 입교자가 747명, 학습인 275명, 원입자 930명, 주일학생 820명 등 총2,772명으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발전되었다. 이 때 600원의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기도 했다.독립 운동독립운동1917년 손정도는 우여곡절 끝에 협성신학교 제5기로 졸업했다. 1918년 6월 23일 장로(elder)목사 안수를 받고, 신병치료차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행동이었다.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벌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33인 민족대표에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의친왕 이강공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청년당에 입당했다.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던 그는 박신일사모가 낮에는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정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박신일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어 내는 일이었다 한다.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하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朱山月)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강공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에 참여했던 핵심인물들은 해석, 현순, 최창식 등 모두 감리교 목사들이었다. 이들의 암호명은 손정도는 입정(立丁), 현순은 석정(石丁), 최창식은 운정(雲丁)으로 입석정(立石丁)이었다.망명과 임시정부 참여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의 노출을 우려한 그는 각종위원회에 그 이름없이 참여하거나 가명, 익명으로 참여하였다. 자신의 신분노출이 조직의 활동에 장애가 될까 하여 익명으로 노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천도교인사들과도 접촉했던 그는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천도교로부터 1만원, 미국 선교부로부터 1만원을 얻어낸 것도 모두 해석의 일이었다.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金神父路)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金立)·김철(金徹)·김구(金九)·윤현진(尹顯振)·김순애(金淳愛)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임시정부 활동1920년 중반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Central Conference of Eastern Asia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를 발표하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선교사 수 십인을 접대했다. 비용은 해석이 국내로부터 모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음해로 공금 유용죄로 조사를 받게 되어 도산 안창호가 직접 조사하고 국내의 후원자까지 만나서 조사했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해석은 큰 상처를 입고 길림성의 목회를 지원하였다.1921년 3월 3일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김인전(金仁全)·조상섭(趙尙燮)·송병조(宋秉祚)·장덕로(張德櫓) 등과 함께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1921년 8월 임정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고 노공부장(勞工部長)를 지냈다. 동시에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常義會) 위원, 치리 회원, 미션학원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만년임시정부 유지 노력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李鐸)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吉林)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북만주 주민들의 복지노력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 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될 무렵,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다 황해도의 재산을 처리하며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향의 땅을 사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내지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 등 고난의 길을 걸었으나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그 주변 대분, 대강자 교회, 더 나아가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두루 다니며 돌보았다. 이 무렵에 김일성과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별세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저하, 스트레스, 고문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1년 1월 해석은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사후가족들첫째 아들 손원일은 귀국, 대한민국에서 해군의 창군 주역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의 셋째 딸 손인실과 셋째 사위 문병기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국내에서 사업을 하던 맏사위 윤치창도 1963년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갔다. 손정도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북한에서의 존경현재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의 은인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있다. 1926년무렵 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을 손정도 목사가 친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했다.그래서 북한에서는 2003년 10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같이 열어서,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였다.일화김일성의 은인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친과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 장로와 김일성은 2살 차이였다.김일성은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유길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공안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해석은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며 그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경의 위협이 다가올 것이니 피하라고 권고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면 10년형을 살게 될 것을 면해 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해석을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1991년 5월 네브라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았고, 김일성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였다.
한국을 향한 복음의 사도들 // 아펜젤러, 스크랜턴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시병원과 보구여관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일라 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 날 이화여대 부속 병원으로 발전한다. 벧엘에서의 첫 세례식, 첫 만찬식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2] 정동교회당 건축 1893년 7월에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아펜젤러는 다시 정동교회를 담임하게 되며 순직할 때까지 계속 정동교회에서 목회했다. 1895년 1월에 있었던 연회는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의 회당을 정동에 건축하도록 결의하고 이 일을 아펜젤러에게 위임한다. 선교본부에서도 또한 이 일을 승인함에 따라 1883년부터 4년 간 아펜젤러는 정동교회당 교회당을 위해 그의 정력을 쏟는다. 그는 미국에 있는 친지, 가족들에게 또한 한국의 유지들과 교우들에게도 건축비 헌금을 호소한다. 정동교회와 애국청년운동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말하자면 청년교회요, 학생교회이다. 따라서 이외의 교회활동은 주로 청년운동에 비중이 주어져 있다. 청년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주일운동이요, 또 하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다. 주일학교 운동은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을 목적하고 있는 데 비해, 엡윗청년회 운동은 신앙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엡윗청년회를 지도하고 프로그램에 직접 개입한 이들이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등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천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 두고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 우거하면서 배재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윤치호는 관직에 있으면서 배재학생들 위한 강연회를 자주 연다. 그리하여 독립문 기공식이 있은 지 열흘 만인 1896년 11월 30일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조직된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 관여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신앙 위에 선 민족구국운동이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의 경우가 많지만, 협성회의 회장, 부회장 등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또한 정동교회 엡윗선교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일했다.
홀 선교사 가족 이야기 한국선교는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두 분이 제물포에 첫 발을 딛었기 때문에 부활절과 관련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뿐만이 아니라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님들의 묘가 많이 있습니다. 약 450명의 유해가 있는데 대부분 이 땅에 복음을 전하다 죽은 선교사님들의 묘지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아니했지만 저는 이 중에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그의 부인 셔우드 로제타 (1865-1951) 선교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부유하고 여유있는 삶을 마다하고 당시 미개하고 풍토병이 심하였으며 기독교의 박해가 심하였던 조선으로 오려면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와야 했고 생명을 잃을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신했던 그들의 삶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드 로제타 (Sherwood Rosetta)은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로 일하다가 교회에서 ‘케네스 챈들스’란 부인이 인도를 여행하고 난 뒤에 인도여성에게 복음전도자와 의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의료선교사가 되리라 결심합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뉴욕에 있는 중국 여성들의 무지를 들었고, 그보다 훨씬 더 무지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조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1889년 3월에 졸업하고. 조선 선교의 꿈을 갖고 뉴욕의 한 병원에서 소아과 인턴으로서 임상실습을 하던 중에 남편이 될 윌리엄 제임스 홀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역시 교사로 제직 중에 ‘다시 주어진 인생을 값지게 살겠다’ 고 결심을 하고 퀸즈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1889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메디슨 가의 선교진료소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곳에서 소아과 인턴과정을 하던 로제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들어와 1892년 6월 27일에 최초의 서양식 결혼을 하였습니다.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치료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1894년 8월1일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청일 양군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신변을 걱정하여 감리교 선교부 서울본부에서 귀환하라고 하였지만 닥터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외면할 수 없다며 평양에 머물며 혼신의 힘을 다하던 중에 결국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1894년 11월 24일 로제타와 결혼 2년 5개월 만에 34세로 순직하여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당시의 일을 로제타 홀이 이렇게 회상합니다.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하나님이 나에게 갚으실 것이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때에 로제타 홀에게는 셔우드 홀이라는 2살 된 아들과 그의 뱃속에는 7개월 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했습니다. 딸 에디스가 태어난 후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자라고 섬겼던 카나다의 글렌 뷰엘의 작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교회에서 조선에 윌리엄 제임스 홀이라는 선교사님을 보내고 기도하며 헌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큰 감동을 받은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돌아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양화진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로제타는 그 딸을 남편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평생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닥터 로제타는 홀로 평양의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점동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 교육을 시켰습니다. 지금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조선여자 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학교가 지금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입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에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 부부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셔우드 홀도 16세가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후 의사인 부인 마리안과 결혼하여 다시 한국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은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어 판매하며 결핵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이 셔우드 홀이 선교지에서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 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 때가 1984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는데,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 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 마리안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암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혔습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당시에 미개하고 풍토병이 많고 청일전쟁을 위시하여 갖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한국을 찾아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육신의 안락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조선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 것은 바로 복음은 나를 구원한 대속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타인을 위함 섬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스크랜턴
한국 이름은 시란돈(施蘭敦). 1878년 예일대학교, 1882년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결혼한 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개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1884년 미국 감리회의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4일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885년 2월 3일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같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G. Appenzeller) 부부와 함께 한국으로 출발했다. 부녀자들의 입국이 어렵자 어머니와 부인을 일본에 두고 그해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서울에 도착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의 선교사인 알렌(H.N. Allen)을 도와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사업을 하다가 1885년 9월 10일 정동에서 민간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열어 1886년 6월 15일 시설을 갖추고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했다.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을 설치했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를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스크랜턴의 선교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그밖에 한글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서 성서사업에도 큰 공헌을 했다.
스크랜턴 선교사((Mary F.B. Scranton 1832~1909)
메리 스크랜턴(Mary F.B. Scranton 1832~1909)은 40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53세이던 1885년 5월에 미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 1922)내외와 함께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온 한국 최초의 감리교 여선교사이다. 이들 모자는 이 땅에 와서 어머니는 여성평등과 교육에, 아들은 의료와 교회 개척에 힘쓰며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은 후 이화학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양반집 아녀자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렇듯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 풍조에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심리가 더해져 설립 초기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런데 1886년 5월 31일, 한 관리의 소실인 김 부인이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왔다. 이로써 단 1명의 여학생으로 역사적인 첫 영어수업이 이루어졌고, 이날이 이화학당의 창립일이다. 1887년 학생 수가 7명으로 늘어나고 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으며, 동년 11월에는 200평 규모 기와집 학교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명성황후로부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이화’라는 친필의 교명을 받았다.
1889년 최초로 한국인 이경숙을 교사로 채용하면서 한글과 한문 교육이 시작되었고, 한글과 영어로 기초과목과 종교 과목을 가르쳤다. 학생이 꾸준히 늘자 1891년에는 기와집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 2층 건물을 세웠다.
1904년에 중등과(4년)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대학과(4년)를 신설함으로써 초•중•고등 교육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이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38년 이화고등여학교에서 1946년 이화여자중학교(6년)로, 1950년에는 3년제 이화여자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으며, 현재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1년)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고 동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125년 전 정동의 한옥방에서 싹튼 한 여선교사의 꿈이 자라나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가 된 것이다. 한편 이화학당은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 총독부 제약을 덜 받았기에 학생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3•1 운동은 물론 6•10만세 운동,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1929년 말~1930년 초 서울학생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이화학당은 전통적으로 여성 교육이 전혀 없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교육을 시행함으로써 여성의 의식을 깨우고 다양한 사회진출을 가능케 하였다. 3•1 운동의 상징적인 여성운동가 유관순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양의사 박에스더(김점동),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와서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독살당한 하란사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이화여고 내에는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제3호), 정문으로 쓰였던 사주문,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남아 있으며, 본관 뜰에는 한국 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남긴 이 글처럼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초로의 나이에 열악한 환경의 이 땅에 찾아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진정으로 이 민족을 사랑하며 섬겼다. 특별히 여성사회를 변혁시키고 근대화해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여성의식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로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 운영하고 여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지방 전도•교육 활동을 펼치는 등으로 구한말 여성인권 향상과 교육,의료, 복지에 기여한 감리교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 여선교사들의 대모이다. 조선인들은 스크랜턴 여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를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렀다. 이 땅에 여생을 바친 그는 1909년 25년간의 한국 사역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