精忠廟(정충묘)와 쌍령전투에 대하여
朴光敏(박광민-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 2017. 음력 正月初三日(양력 1월 30일 11:00) •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쌍령동 87-1 山麓(산록) • 규모 : 정면 1칸 측면 1칸 • 廟祭(묘제) : 賜祭(사제) / 2003년부터는 廣州市(광주시) 公祭(공제)로 거행. *賜祭 충절(忠節)로 죽은 신하의 제사를 국가가 지내 주는 것 • 配享(배향 ) ◦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使(병마사) 許完(허완) ◦ 慶尙右道(경사우도) 兵馬使(병마사) 閔栐(민영) ◦ 公淸道(공청도) 兵使(병사) 李義培(이의배) ◦ 安東營將(안동영장) 宣世綱(1970년대에 추가배향) *서기 1958년 정충묘 重修(중수) 직후 정충묘에 추가 배향 되었던 沈演(심연)은 여주까지 왔다가 허완 장군 등이 청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回軍(회군)했고 귀양까지 갔다.는 이유로 정충묘에서 黜享(출향-배향을 취소함)하였다.
• 祭享由來(제향유래) 檀君紀元(단군기원) 3970년(西紀 1637년) 丁酉年(정유년) 음력 4월 7일 雙嶺戰鬪(쌍령전투)와 險川戰鬪(험천전투) 戰歿者(전몰자) 주검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첫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祭享日(제향일) 매년 음력 正月 初三日(매년 음력 정월 초삼일) • 獻官(헌관) 이전에는 예조(禮曹)에서 제문(祭文)을 내려 주기도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鄕祭(향제)로 올리기도 하였다. 현재는 아래와 같다. ◦ 初獻官 : 廣州市長(광주시장) ◦ 亞獻官 : 정충묘 유사회(有司會)에서 결정 ◦ 終獻官 : 정충묘 유사회(有司會)에서 결정 • 告祝(고축) * 과거 鄕祭(향제)의 축문 자료 維(~年紀) 歲次(~年干支)正月(~月干支)朔初三日(日干支) 廣州郡草月面大雙嶺里居民代表 ○○○ 敢昭告于 故丙子戰亡功臣贈兵曹判書行慶尙左道兵馬使忠莊公許完 故丙子戰亡功臣贈兵曹判書行慶尙右道兵馬使忠莊公閔栐 故丙子戰亡功臣贈領議政行公淸道兵使忠壯公李義培 諸公之靈 忠憤義烈 旣着此土 本村民人 歲薦犧牲 神其赫臨 伏惟尊靈 眷佑一洞 攘灾降福 俾無後艱 謹以淸酌 脯醯用伸 虔告謹告 尙饗 • 丙子胡亂(병자호란) 당시의 쌍령전투 병력 현황 ◦ 慶尙左道(경상좌도) 兵馬使(병마사) 許完(허완) 휘하 1천5백명(始 2천명) ◦ 慶尙右道(경사우도) 兵馬使(병마사) 閔栐(민영) 휘하 8천명 ◦ 公淸道(공청도) 兵使(병사) 李義培 휘하 2천명 ◦ 安東營將(안동영장) 宣世綱 휘하 약 1천명 ◦ 尙州營將(상주영장) 尹汝任(윤여임) 휘하 약 1천명 ◦ 折衝將軍(절충장군) 許復良(허복량) 휘하 약 1천명 ◦ 昌原府使(창원부사) 白善男(백선남) 휘하 약 5백명 ◦ 正憲大夫(정헌대부) 金忠善(김충선-일본에서 歸化한 장수) 휘하 약 1백50명 ◦ 副司果(부사과) 尹忠祐(윤충우) 휘하 100명 전투참여 군사 합계 약 15,250명
• 丙子胡亂(병자호란) 당시의 쌍령전투 戰歿者(전몰자) 數(수) 병자호란 쌍령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元均(원균)의 칠천량(漆川梁) 해전, 6․25 전쟁 당시 劉載興(유재흥)의 麟蹄郡(인제군) 기린면(麒麟面) 縣里(현리) 전투 패전과 함께 韓國戰爭史(한국전쟁사) 치욕의 3대 패전으로 전해 온다.
쌍령전투가 이렇다 할 전략전술을 세우지 못하여 어이없이 허물어진 것은 맞지만 치욕적 패배라기 보다는 장렬한 패배라고 함이 적절한 표현이며, 칠천량 패전과 현리 패전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는 점에서 달리 평가 되어야 한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은 李舜臣(이순신)이 왜군을 대패시켜 해상권을 완벽하게 장악해 놓은 상태에서 아장(亞將) 들의 건의마저 묵살한 원균의 무능과 비겁함으로 부하 장수들은 장렬하게 전사하고 원균은 아들과 함께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치다 倭賊(왜적)에게 죽음을 당했다.
육이오 전쟁 때 3군단장으로서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때 縣里(현리)의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 당하여 3군단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군당장 유재흥은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 밖으로 도주하였고, 3군단은 패닉상태로 허물어졌다. 이보다 앞서 1950년 3월에는 육군 제7사단장으로서 의정 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개전초기(開戰初期)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해 제7사단은 붕괴되고 서울은 함락당했다. 1950년 7월에는 경상북도 함창에서 새로 창설 된 육군 제2군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중공군과의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 포위 당하여 제2군단은 전멸 당했다.
임진왜란 칠천량(漆川梁) 패전의 원균(元均)과 육이오 현리(縣里) 전투의 敗將(패장) 유재흥(劉載興)은 패전 뿐 아니라 부하를 버리고 제 목숨만 살고자 도망쳤다는 점에서 패역비열(悖逆卑劣)한 지휘관의 典型(전형)이라 할 것이다.
쌍령전투 장수들은 전술(戰術)에 미숙(未熟)하여 비록 패전했을지라도 끝까지 분전(奮戰)하며 모두가 장렬(壯烈)히 전사하였으니 칠천량 해전의 패전, 현리 전투의 패전 등과 묶어서 貶毁(폄훼)하는 것은 쌍령전투 순의(殉義) 장수와 의병들에 대한 禮儀(예의)가 아니다.
쌍령전투 의병 숫자는 15,000 명 내외로 추산 되지만 대부분이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채 급히 모병된 병사들이니 군대로서의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못했을 것이요 중도에 달아난 병사들을 감안하면 12,000명 이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고, 허완 장군의 신도비에 1만여 명이라 한 것이 실제 병력 수와 큰 차이가 없는 숫자였을 것이다.
쌍령전투 전사자가 4~5만 명이라는 말이 전해 오지만 의병 숫자를 최대 1만 5천 명으로 본다 해도 터무니없는 말이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 쌍령전투와 험천전투, 강화전투의 희생자 수가 대략 明示(명시) 되어 있다. “鄭太和(정태화)의 馳啓(치계)에, ‘……本道(본도)의 險川(험천)․雙嶺(쌍령)․江都(강도-江華島)에서 전사한 자 들이 도합 2천6백여 명이니 恤典(휼전-조정에서 이재민을 구휼하는 것)을 똑 같게 시행하는 것이 온당합니다.……’라고 하였다.
험천전투 는 金俊龍(김준룡) 장군이 승리했고, 강화도에는 군사도 많지 않아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패했으므로 험천 전투와 강화도 전투의 戰死者(전사자)는 몇 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쌍령전투 전사자를 2천 명 정도로 推定(추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重刊顯節祠誌 p.99 『조선왕조실록-인조 16년』 1월 15일)” 쌍령전투는 비록 참혹하게 패한 전투지만 조선전쟁의 漆川梁(칠천량) 해전이나 縣里(현리) 패전과 같이 ‘치욕’ 이라고 하는 것은 쌍령전투에서 나라를 위해 순절하신 장수들과 의병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적어도 廣州人(광주인)이라면, 애국심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쌍령전투 순국 의병들의 순절에 無限敬意(무한경의) 를 표해야 할 것이다. 의병들의 이름은 장수들 외에는 전해오지 않지만 이름이 드러난 이들 만이라도 그 尊諱(존휘)를 거명하여 그분들을 기리는 우리의 敬慕之情(경모지정)을 표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하고 생각한다.
“姜誡南(강계남)과 노복․權克常(권극상)․琴漢龍(금한룡 琴海龍금해룡 형제)․金得民(김득민 金鎬永김호영 父子)․ 金夢麟(김몽린)․金燁(김엽 金煜김욱․金燦김찬 삼형제)․金永達(김영달)․金忠善(김충선)․金頀(김호)․南武成(남무성)․ 閔栐(민영)․朴瑀(박우)․白善男(백선남)․宣世綱(선세강)․孫宗老(손종로)․申適道(신적도)․沈訥(심눌․沈諒심량 從兄弟)․ 梁碩南(양석남)․禹成績(우성적과 노복 貴同귀동)․尹汝任(윤여임)․尹忠祐(윤충우)․李起郁(이기욱)․李瑞雨(이서우)․ 李檍(이억)․李彦義(이언의)․李義培(이의배)․정대업(鄭大業)․河繼仁(하계인)․許得良(허득량 許復良허복량 從兄弟)․ 許完(허완)․黃萬朱(황만주)․黃是憲(황시헌)
우리는 흔히 廣州를 忠孝의 고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곳 精忠廟를 보십시오. 씽령전투에서 2천 명 이상이 떼죽음을 당한 精忠廟가 이렇게 초라할 수는 없습니다. 錦山에는 2만8천 평의 너른 부지에 重峯 趙憲 선생과 七百義兵의 英靈을 모신 “七百義塜”을 성역화해 관리사무소를 두고, 해마다 盛大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廣州에서도 “精忠廟 移建增築 및 2천 의병 殉義碑 건립 추진위원회”라도 결성하여 2만 8천 坪까지는 아니라도 1천평 이상의 敷地를 확보하여 精忠廟 성역화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먼저 廣州市民과 有志들께서 一心合力(일심합력)하여 참여해 주시는 것이 사업 추진의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이 앞장 설 때에 광주시나 관계기관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병자호란 쌍령전투 忠節殉國(충절순국) 2천 영령(英靈)께 부끄럽지 않은 廣州市民이 되십시다
출처 : 카페 "남한산성 현절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