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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역사 / 손나래
1)국어의 기원. 2)고조선언어. 3)부여계 제어. 4)고구려어.
5)백제어. 6)신라어. 7)중세국어. 8)전기중세국어. 9)후기 중세국어
1)국어의 기원
지구상에는 약 4천여 종의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형성 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언어에서 분리 되었으며, 한 조상의 언어에서 나온 것을 계통적 언어라고 말한다.
한국어 계통은 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터키어, 몽골어, 만주어, 퉁구스어, 일본어 등의 언어가 이 어족에 속한다.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은 공통적으로 모음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모음조화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어근에 접사를 붙여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교착어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인 어순은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알타이’라는 어원은 몽골의 서남지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타이 산맥에서 유래한 것이며, 알타이어족을 사용하는 민족들은 아시아 대륙의 최동북 지역으로부터 중국의 북부 및 북서지방, 몽골,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남부, 볼가 강 유역, 터키, 중동 및 발칸 반도의 여러 지방,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 등 널리 분포되어 있다.
언어학자들은 알타이어족간에 존재하는 어휘 및 구조적 유사성에 근거하여 계통적으로 친족관계에 있는 언어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에 따라 알타이어족이라고 불러왔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알타이어족에 존재하는 어휘의 일치성과 구조적인 유사성은 그 언어들이 고대와 접촉하며 상호차용한 결과이거나, 동일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상이한 언어 사이에 흔히 발생하는 지역적 합류동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알타이어족간의 계통적 관계를 부정해왔다. 따라서 이 학자들의 개념으로‘알타이어족’은 역사적, 유형적 관점에서만 동일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 한무리의 언어들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알타이어족간의 근원적 친족관계의 가능성은 인정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연구방법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2) 고조선언어
고대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문자의 사용이다. 고조선 이전에 배달을 건국했을 때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다.『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환웅천황께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하게 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배달 시대에 녹도라는 문자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세 가륵단군이 새 글자를 만들기 전,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고 하는 진서라는 상형문자가 바로 녹도문으로 여겨진다.
BCE 2181년에 가륵단군은 그 진서가“ 해독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라고 하며,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였다『단군세기』,『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 이로써 고조선의 새로운 문자, 가림토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가림토 또는 가림다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조선 세종 때 만든 한글과 그 형태가 같거나 흡사하다. 특히 모음 11자는 똑같이 생겼다.
최근 중국 곳곳에서 은나라 갑골문 이전의 문자로 추정되는 상고금문이 발견되고 있다. 이것을 연구한 중국 학자 뤄빈지는 자신의 저서『금문신고』에서‘상고금문은 한민족의 언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자’라고 밝히면서, 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를 동방 조선족이라고 단언하였다(김대성,『금문의 비밀』). 상고금문이 은나라의 갑골문, 주나라의 대전, 진나라의 소전을 거쳐 지금의 한자로 완성된 것을 볼 때, 한민족의 문자가 바로 중국 문자의 원형인 것이다.
출처:『환단고기』(안경전 역주,상생출판 2012년 출간) 인터넷 고조선의 언어,문자 생활
3) 부여계 제어
3세기경에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서력기원 전후의 만주와 한반도의 언어 상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광대한 지역에는 숙신계, 부여계, 한계의 3대 어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부여계 제어는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어, 예어 등이 있었던 같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부여, 고구려어, 옥저, 예의 언어는 서로 비슷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유사한 기술은『후한서』<동이전> 등에서도 발견되며 이것은 이들 언어를 포괄하는 한 어군의 수립을 가능케 한다. 특히 이 어군은 고대 숙신 언어와의 대립에서 파악되었다.
숙신이나 그 뒤를 이은 읍루, 물길, 말갈의 언어에 대해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이 이름들뿐이다. 따라서 이것이 오늘의 어느 언어로 이어지는지 밝힐 길이 막연하다. 어디서 살았으며 어떤 모습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 그 인종적 계통을 밝히고 이를 통하여 언어 계통에 접근하는 것뿐이다.
숙신이 퉁구스 계통이요 그 언어가 퉁구스 어군에 속하는 것이었다면, 숙신의 언어와 부여계 언어는 다르다고 한 중국 역사책들의 기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다. 고대에 이미 부여계 언어와 퉁구스계 언어의 구별이 있었음을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전하는 부여계 언어 자료와 현대 퉁구스 제어와 비교를 통해서 재구한 퉁구스 조어의 비교를 통해서도 인정된다.
4)고구려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언어에 대하여 부여·옥저·예 등의 언어와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을 부여어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여어군의 언어들은 모두 사멸되었지만, 그 가운데 고구려어는 약간의 자료를 남겼을 뿐 아니라, 중세국어의 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그 흔적을 국어 속에 남겼다. 중세국어는 고려 초엽에 형성되었는데, 그 토대가 된 개경방언에는 고구려어의 요소가 많건 적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중세국어의 ‘나믈(那勿=鉛)’과 ‘(呑=村)’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향약구급방≫과 ≪조선관역어≫에 각각 보이는데, 고구려어에서 온 것으로 믿어진다. 고구려어에‘乃勿(鉛)‘과‘呑(谷)‘이 있었던 것이다. 언어사연구에서 일부 학자들이 제기한 저층설을 원용하면, 중세국어의 고구려어 저층을 말할 수 있다.
고구려어의 자료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적에 기록된 인명·지명·관명 등이다. 그들 자료를 이용하는 데 있어 특히 주의할 점이 있는데, 고유명사는 그 음상만 기록되어 있을 경우 그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언어자료로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음상과 의미를 갖춘 것들만이 고구려어의 확실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다행히 고구려어에서는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의 음을 빌리기도 하고 새김을 빌리기도 하여, 때로는 하나의 고유명사에 대하여 이 두 표기를 남겨놓기도 하였다.
그런 경우 하나는 고구려어 단어의 음상을 알려주고, 다른 하나는 그 의미를 알려준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많은 예에서 그와 같은 두 가지 표기를 보여주는 ≪삼국사기≫ 지리지는 고구려어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구려어가 부여어군에 속한다고 할 때, 부여어군은 남쪽의 한어군과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본래 한 조어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믿어진다. 이 조어를 부여, 한공통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국어의 최고단계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고구려어의 단어들은 신라어나 백제어의 그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그런 차이는 조어로부터 갈려나온 뒤에 서로 다르게 변화한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한편, 고구려어는 퉁구스어 및 일본어와 가까운 면이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부여어군은 한어군보다 알타이 제어에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부여어군이 일본어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음을 느끼게 하지만, 그 영향이 어떠한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더 깊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5)백제어
백제어의 기원은 부여계어의 하나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언어외적으로 볼 때 백제의 영토가 대체로 삼한 중 마한의 강역에 해당한다는 것과 언어적으로는 백제어의 특징을 보이는 부리가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의 후신이라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백제는 중부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초기 단계를 벗어나면서 드디어 마한을 병합하였으며, 마한어 기원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백제어의 시대별 특징은 전기, 중기, 후기로 삼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전기 백제어는 온조의 건국시기인 서기전 18년으로부터 260년(고이왕 27)에 이르는 약 3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백제는 단일 언어사회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단일 언어는 앞서 밝혔듯이 부여계어로 추정된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 남겨준 언어자료는 관직명, 인명, 지명 등에 한정되며, 대략 수십개의 어휘에 불과하다.
중기 백제어는 261년으로부터 475년(문주왕 1)에 이르는 약 2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부락국가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탈바꿈하였으며, 비류왕 초기(324년)에는 도읍을 광주로 옮겼고, 근초고왕대에는 마한을 완전 병합하였다는 역사적 특징을 가지는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에 따라 이 시기의 백제어는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공존하는 복수의 언어사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병합하여감에 따라 백제의 영역 내에는 한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한의 언어지역에 부여계어가 막강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의 치환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후기 백제어는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하여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6년으로부터 757년(경덕왕 16)까지의 약 3세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백제가 전국토의 3분의1 이상인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천도하였다는 점에서 부여계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빼앗겼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백제어는 지역적으로 볼 때 단일 언어사회로 복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단일 언어는 전기 백제어와는 달리 한계어인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계층적으로 볼 때에 지배계층의 언어인 부여계어가 피지배 계층의 언어인 한계어에 동화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후기 백제어는 지배족 언어인 부여계어와 피지배족 언어인 한계어가 계층을 이루는, 이른바 계층언어 사회의 특징을 갖는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계층언어적 대립의 존재에 대해서는 희미하나마 약간의 문헌적 방증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주서≫ 이역전에“왕의 성은 부여씨인데 ‘어라하라’하며 백성들은‘건길지’라 부른다. 중국어로는 다 왕이란 말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어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본백제지명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일본 자료로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관계 기사들이 주목된다.
우리가 현존자료를 가지고 재구할 수 있는 백제어의 단어는 명사 53, 형용사 11, 동사 10 등 78여어에 한정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제어의 형성과정이 지극히 복잡하여 이들 어휘가 백제어사의 전기, 중기, 후기 가운데 어느 시기에 해당할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이들 지명에 의하여 그려질 수 있는 판도가 문주왕의 공주천도 이후에 축소된 모습을 보이므로 더욱 그렇다. 아마도 78여의 단어는 대부분이 후기에 해당하는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면 보다 이른 시기인 전기(혹은 중기까지)의 백제어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전기 백제어시대의 판도는 사실상 지금의 경기권과 이곳에 인접한 황해도와 강원도 일부 그리고 충청도의 북단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보충참고: 인터넷 민족문화대백과사전
6)신라어
현재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부족의 언어로부터 고대 삼국의 하나인 신라의 언어로 발전하고,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나라 전체의 언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언어는 우리 국어의 근간이 되었다.
신라어는 계통적으로는 한계에 속하며, 같은 한계에 속한 백제어와는 매우 가까운 점이 많았으나, 부여계인 고구려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이들 언어가 공통조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뒤에 생긴 것이다.
신라는 고대 삼국 중에서는 가장 많은 언어자료를 남겼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는 신라어의 참 모습을 자세히 알기에는 부족하다.
신라의 인명, 지명, 관명 등의 표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사적에서 볼 수 있다. 모두 한자로 표기되었는데, 그 음을 빌려쓴 표기와 새김을 빌려쓴 표기가 아울러 발견되는 예가 적지 않아서 신라어 단어의 음상과 의미를 재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신라시대의 이두 자료는 매우 적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후대의 ‘이두’에도 신라시대의 전통이 담겨 있을 것이나, 그것을 가려내는 정밀한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신라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로서 이 노래들은 향찰로 기록되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신라어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균여전≫에 실려 있는 <보현십원가> 11수도 함께 연구될 수 있다.
신라어의 음운체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매우 빈약하여 그 자음체계와 모음체계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말하기 어렵다. 우선 자음체계를 보면 파열음과 파찰음에는 평음과 유기음의 두 계열은 있었으나, 된소리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주로 우리나라 한자음의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차청음이 우리나라 한자음에서 유기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오히려 적고 평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많은 사실을 근거로, 신라어에는 유기음도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한자음에 분명히 유기음이 있고, 신라의 지명, 인명, 관명의 표기에 유기음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듯한 예들이 있어, 신라어에 있어서의 유기음 문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한편, 종래에는 중세국어의 유성마찰음 ‘○’, ‘ㅿ’은 신라어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으나, 여기에는 다시 생각해야 될 문제들이 있음이 최근의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신라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불가능한 처지에 있다. 그러나 현존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날카로운 해석을 꾀한다면 앞으로 신라어에 대해서 좀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신라어라고 하지만, 천년의 기간에 걸친 것이어서 그 초기와 후기의 언어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을 밝혀서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중세국어와 일치하는 사실들의 확인에 그쳐왔다. 앞으로의 연구는 중세국어와 일치하지 않는 사실들을 밝히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신라어의 특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충참고: 인터넷 민족문화대백과사전
7)중세국어
고려시대와 임진왜란 이전 조선시대, 곧 10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국어로서 통일신라의 언어를 근간으로 하여 발달하였다. 통일신라의 언어가 현재의 동남 방언에 속하는 경주어를 중심으로 한 것이나, 중세국어는 중부 방언에 속하는 송도와 한양, 곧 현재의 개성과 서울의 언어가 중심이 되었다. 송도는 고구려의 옛 땅이므로 고구려어의 영향이 중세국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고구려어와 고려시대 언어의 자료가 제약되어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학자에 따라서는 고려시대의 언어를 중고국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의 언어만을 중세국어라고 하기도 하나 언어의 중심이 동일하다.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언어 사이에 큰 차이가 인정되지 않은 점에서 다 같이 중세국어라 함이 온당하다. 다만 훈민정음, 곧 한글 창제로써 15세기 이후의 중세국어는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또 음운체계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에 14세기 이전과 15세기 이후를 구별하여 전기 중세국어와 후기 중세국어로 나누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언어자료의 풍부함과 투명성으로 말미암아 중세국어는 한글창제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국어를 지칭함이 일반적이다.
한글창제 이전의 언어자료는 모두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서 국어를 표기한 차자표기의 자료들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국내자료의 경우, 이두, 구결, 향찰자료로 나누어진다. 이두자료는 각종 이두문서와 ≪향약구급방≫ ≪양잠경험촬요≫ ≪대명률직해≫ 등이 저명하다. 구결자료는 균여의 ≪석교분기≫와 ≪구역인왕경≫의 훈독구결과 ≪남명집≫의 음독구결 등이 최근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향찰자료는 표기법 등 자료의 성격으로 ≪삼국유사≫의 향가와 같이 다루기도 하지만 ≪균여전≫의 <보현십원가>가 있고, 후대의 기록이나 <도이장가> 등도 있다.
한글창제 이후로는 이두와 구결 등 차자자료도 있으나, 한글로 표기된 문헌이 주된 자료이다. 한글자료는 ≪월인천강지곡≫ 등 창작된 것이 없지는 않지만, 언해서가 대부분이다.
언해서는 불교, 유교, 교훈, 의약, 역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어서 다양한 언어사실을 보여 준다. 그 밖에 ≪훈민정음≫≪동국정운≫ 등 어학서와 한글로 된 구결자료 등이 있다. 한글문헌은 처음 중앙에서 편찬, 간행되었으나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지방에서도 편찬, 간행되었다. 그 결과 방언의 모습이 문헌에 나타나게 되었다.
보충참고: 인터넷 민족문화대백과사전
8)전기중세국어
우선 전기중세국어 음운에서 자음체계를 살펴본다. 자음 체계의 된소리 계열의 등장은 전기 중세 국어에서 특징이다. 된소리는 본래 단어 또는 형태소의 연결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고대어에서도 속격의(ㅅ)이나 동명사 어미의 (ㄹ)뒤에 오는 단어의 두음‘ㅂ ㄷ ㅅ ㅈ ㄱ’등이 된소리로 발음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림유사≫나 ≪향약구급방≫에서는 어두 된소리의 명확한 증거를 확인할 수 없으나, 후기 중세어 자료에서 이것이 광범하게 확인이 된다.
또한,≪계림유사≫는 어두 자음군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15세기의 ‘ㅂ ㅅ . ㄹ(米)(자판사용을 못해서‘살’자를 못 씀)과 대응되는 것이지만 아직 어두의 ‘ㅂ ㅅ’은 없었고 그 사이에 어떤 모음이 있는 2음절을 보여 준다.
그리고 자료의 표기는‘ㅸ’의 존재는 분명히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로써‘순경음 비읍’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속단이다. 있었더라도 한자로 하는 표기가 불안전하여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후술될 바와 같이, 훈민정음 체계에서‘ㅸ’은 순경음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국어의‘ㅸ’은 양순음이었고 중국어의 순경음은 순치음[f], [v] 등이었으므로 중국인의 귀에 국어의‘ㅸ’은 오히려 순음중 [p],[b]에 더욱 가깝게 들렸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모음체계는 몽골 차용어의 검토에 의해서 분명히 들어난다. 몽골어 차용어는 주로 13세기 후반에 들어왔고 15~16세기 문헌에 정음문자로 표기된 것이 정확하다.≪계림유사≫의 모음 표기는 매우 조잡하지만, 그 면밀한 검토는 흥미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차용은 그것이 일어난 두 언어 접촉의 문화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런 관점에서 몽골 차용어들이 위에서 말한 몇 부류에 국한되어 있음은 흥미 깊은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몽골에서 유목민의 물질문화에 특별한 것을 받아들었던 것이다.
9)후기 중세국어
후기 중세국어는 15~16세기에 걸친다. 특히 15세기 중엽은 국어의 역사적 연구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그 주된 원인은 이때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이 문자로 많은 문헌이 간행되었다. 새로운 문자의 창제하였으나 국어의 역사에서 보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의 한자 표기가 보여 주던 단편적인 언어들이 그때부터 전체적으로 분명히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음운은 훈민정음체계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어떠한 문자 체계도 실제의 음운체계와 일치하기는 어렵다. 훈민정음도 마찬가지다. 당시 국어의 음운 사실을 정확하게 표기를 못했을 수도 있으며, 국어 표기에는 필요 없는 문자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그리고 어간의 모습이 둘 이상 나타나는 쌍형어간이 특징적으로 존재했다. 또한 어휘요소가 문법요소로 바뀌는 문법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형식명사류도 그러하지만, 후치사류와 어미류, 접미사류 중에는 문법화에 의해 생성된 것들이 많다. 의문사가 없을 때는‘-a’계통의 의문법어미가, 의문사가 있을 때는‘-o’계통의 어미가 호응되어 쓰였다.
문장 주어가 화자 자신임을 표시하는‘-오/우-’는 신분어미의 일종이었다. 조어법도 다양하게 발달해 있었다. 어간과 어간이 어떤 문법요소의 도움이 없이도 직접 통합하는 복합법과 여러 접사에 의하여 파생어가 만들어지는 파생법이 있었는데, 용언의 어간만으로 명사의 어간으로나 부사의 어간으로 파생되는 영파생 현상이 두드러졌다.
또한, 후기 중세국어에는 평음과 유기음 외에 경음 계열이 더 있었다. 어두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ㆅ’으로, 어중의 경음은 ㅅ계 합용병서와‘ㄲ·ㄸ·ㅃ·ㅉ’으로 기록되었다. ㅅ계 합용병서로 기록된 경음에‘ㅾ’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성마찰음 ‘ㅸ’과‘ㅿ’·‘ㅇ’도 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다.‘ㅸ’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소멸되었고,‘ㅿ’과‘ㅇ’도 16세기에는 소멸되었다. 어휘면에서는 다량의 한자어가 보였으며 이들은 다 중국어의 문어에서 간접 차용된 어휘들이다. 중국어의 구어에서 직접 차용되어온 어휘들도 눈에 띈다. 제2음절에‘ㄱ’을 가지고 있던 어휘들은 15세기 후반과 16세기에 걸쳐‘ㅅ’으로 변화되었다. 그외‘ㅂ’이‘ㄱ’으로,‘ㄱ’이 ‘ㄷ’으로 교체되는 어휘들이 많았다. 문법에서의 특징은 어간의 모습이 둘 이상 나타나는 쌍형어간이 특징적으로 존재했다. 또한 어휘요소가 문법요소로 바뀌는 문법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보충참고: 인터넷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대문명을 이루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문자의 사용이다.
고조선 이전에 배달을 건국했을 때 우리 민족은 이미 문자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래서 고조선부터 명확한 자료들이 남은 것도 문자의역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많은 언어로 분류를 해놓으니 우리나라가 제국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적어도 사투리로 치부해버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