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심리‧사회적 원인론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의 원인과 유전적 소인 (생리적 접근- 주로 약물치료)은 의사들이 담당하는 영역이고 개인 내적 경험과 양육, 대인 관계적 측면은 심리적 요인으로 심리학자들이 주로 담당하는 영역입니다. 그리고 사회적 원인 주로 현실적 삶과 시스템적 지원 같은 환경적 요인은 사회복지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인 부분과 환경적 요인에 당사자집단과 가족의 역할도 포함되어있고요.
이 말은 어떤 특정한 한 부분에서 전체를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는? 심리적스트레스가 병을 유발하는가 병이나서 심리적스트레스를 받는가?
결국 답이없이 계속 돌고 도는 유기적인 형태의 질문인데
그것은 개인의 신념과 해석의 차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각 영역에서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우문현답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정신장애는 가두고 치료해야 할 대상이고
병이 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치료적 관점이 강조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약물적 치료와 개입은 정신장애에 접근하는 주 방법이지만 그것이 꼭 답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이후의 산업화의 핵심인 효율의 측면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으므로 주 접근법으로 된 것이지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정신재활 역사를 보십시오.
장애학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기계화되고 자동화가 된 시스템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산을 하기 위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데 가장 중요한 게 기계가 중단되지 않도록 불량품을 골라내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시대적사조에 힘입어 정신과영역에서도 정신 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이라는 DSM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비밀전략을 만드는데 그것을 정신적인 문제로 발설하거나 스파이짓을 하면 떼몰살당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 그 분류체계에서 이상과 정상을 분류하고 다수인 정상집단이 더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불량품인 정신장애인을 분류하여 저 산밑에 사람들이 없는 곳에 따로 모아서 격리해둔 것이 hospital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그 비정상의 집단을 치료라는 개념으로 또다시 그 당사자와 가족들에게서 수익을 창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부품의 재활용이죠. 물론 이것은 지극히 장애학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치료의 효과성 또한 약물만큼 가성비가 좋은 대안은 아직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치료의 개념으로 접근했을 때 인간 고유의 가치가 치료라는 명분으로 무시되었고 또 과도한 재정적인 부담으로 더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었죠.
그래서 60년대 탈시설화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약을 먹고 폐쇄적인 병동에 오래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 밖으로 배출되었을 때
사회적인 파장이 커졌습니다. 증상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너무 퇴화하여 사회에 적응을 못 하는 일이 발생하고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은 가정의 애물단지가 되거나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범죄를 일으키는 사회적 부적응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정신의학이 이야기하는 치료라는 패러다임이 결국 정신질환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입원하고 약을 먹으면 점점 기능이 살아나고 증상이 좋아져서 5년 10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어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가족들도 세월을 통해 경험한 것처럼 약과 입원이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약만으로는 점점 좋아지기보다 점점 퇴행하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나온 것이 재활이라는 개념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정확한 통계는 찾아봐야 하겠지만
우리가 피부병을 치료하듯이 완전히 병이 나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질병의 회복을 보이는 사람은 10명 중에 한두 명이 될까요?
그래서 격리와 약을 통해 회복하지 못한 8명은 병과 증상이 남아있어도 현실 세계에 적응이라도 잘해서 일상생활을 잘하게 만들자 사고 치지 않고 100%는 아니지만 남아있는 기능으로 일부 정상처럼 그리고 정상을 판단하는 기준 중에 가장 큰 돈이라는 것을 일부 벌게 만들어보자는 개념으로 정신재활이라는 패러다임이 대두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서 대인관계훈련도 억지로 하고 증상이 생겨서 결근하지 않게 약물 증상교육도 하고 남아있는 기능을 잘 파악해서 그나마 쉽고 단순한 일에 적응시켜서 직업도 가지게 하자라고 말이죠. 그래서 재활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은 기능의 상승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재활을 시키고 기관을 만들어 훈련도 하고 교육을 했더니 8명 중에 두 명 정도는 지속적으로 일하고 그런대로 삶을 만족스럽게 적응을 하는데
남은 6명은 치료도 안 되고 재활도 안 되는 겁니다.
그 남은 6명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 먹이고 계속 훈련하는데 비정상이 정상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남은 6명은 재활용도 안 되는 불량품이라 폐기해야 하는가요?
정신의학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소속집단은 그것은 그 개인의 문제일 뿐 우리는 우리의 방법론에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해답은 당사자집단에서 나옵니다.
이 방에 계신 이관형 선생님처럼 장우석선생님처럼 회복한 사람들이 수기를 쓰고 자신의 경험을 강연하면서
본인들이 recovery 된 방법과 요인들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정하대표처럼 인권운동을 하면서 우리도 할 수있다며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경험한 것이 단지 쓸데없이 재수 없이 걸린 병 때문에 겪는 쓸모없는 경험이 아니라
그 또한 인간의 고유한 삶의 과정이고 고통에 직면한 인간의 실존적 문제와 극복과정임을 스스로 증명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가 집단은 그 recovery를 역으로 추적해서 들어가서 이론으로 만든 것이
회복/재기 패러다임입니다.
당사자들은 이야기합니다.
--------- 우리는 불량품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경험을 한 것이고 정상집단과 다른 이질 집단일 뿐 우리는 정산되기 위해서 치료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나름의 고유한 삶의 형태가 있다고요.
우리는 정상이라는 절대다수의 처지에서 보면 비정상이지만 우리도 인간이고 우리도 희망을 품고 우리도 행복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오히려 정상집단이 우리의 개별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치료라는 명분으로 우리를 환자라는 프레임 안에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했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일부 부족한 요소들을 도울 때 필요한 서비스의 제공자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의 필요 때문에 그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서 격리했고 우리의 인권을 탄압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지는 내가 결정하고 증상으로 그 자기 결정권이 흔들릴 때 나를 도울 뿐인데 왜 나의 인생을 타자들이 결정하고 낙인찍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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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이후 recovery를 기반으로 한 재활 패러다임으로 바뀌면서 재활의 방법론도 기존의 기능향상 위주의 프로토콜들이 사장되고 방법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구했습니다.
우리가 재발하지 않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지역사회에 기반을 많이 만들어두고
당사자만의 독특한 생태계를 인정하고 구축할 수 있도록 사회적인 지원을 해달라고요.
그리고 정신재활의 패러다임은 기존의 산업화시대처럼 인간을 전체의 한 구성물 부품처럼 보고 불량품을 분류해 격리해서 치료라는 것을 통해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서 한 개인의 고유한 특성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고유성을 높이고 독특한 생태계를 구축해주기 위한 패러다임으로 변해서 현재도 여전히 미국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samsa의 최상위 목표가 되어있습니다.
인간 고유의 안녕감을 추구하는 것 그것은 병의 유무와 관련 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누릴 권리인 것이죠.
그렇게 미국에서는 당사자들의 recovery와 당사자 운동, 수기 쓰기 강연 등을 통해서 가능성과 그 경험을 인정해주게 되었고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면서 당사자의 위상이 변해서 정상적으로 서비스를 구매하는 갑과 제공하는 을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미국과 다르게 우리는 의료보험체계가 있고 그 의료보험체계는 사보험보다 훨씬 덜 까다롭습니다.
몇 년 전에 전체 병원 의료보험청구 금액이 대략 30조 정도가 안되는데 그중에서 정신과 입원비용으로 나가는 게 5조? 정도라 모든 질병 중에 독보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이제 미국의 1950년대 후반 탈시설화를 논의하는 시절의 수준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배정규교수님과 술자리에서 이제 2000년대이고 글로벌화 된 시대에서 정보가 다양한데 그래도 50년 뒤처져있지만 인터넷때문에 50년보다는 더 빨리 정신건강 분야가 변화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죄송하지만 배정규 교수님이 틀리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10년까지는 아니지만, 얼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그 시간보다 정신건강 분야가 변하는 속도가 훨씬 느린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역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년 전에 50년 차이 났는데 지금은 60년이 차이 나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집단에 대한 인식은 그때보다 더 혐오로 바뀌고 그나마 있던 지역사회 시설은 낙후되고 패러다임을 따라가지 못하며 더 양극화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당사자경험에 대한 질적연구를 하면 한물간 철학 연구를해서 버리는 것이고 뇌에 관련된 연구는 어마어마한 연구비를 지원받으면서 승승장구합니다.
이게 의사들이이 이야기하는 조현병이 뇌의 질환이는 것이 증명이 되어가고 구시대적인 이론은 폐기되어서 그런것일까요?
그나마 인권치료를 표방하던 중소병원들이 문을 닫고 큰 병원이나 아니면 완전히 사람 장사하던 저 산 위에 악질병원들은 더 당사자를 쥐어짜서 생존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협회는 계몽을해야 하고 우리의 운동의 노선과 방향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정신의학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과병원보다 더 효과적인 대체할 수단이 없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가장 효율적이고 값싸고 가성비 높은 치료적 접근법입니다.
김영희 이사님이 정신병은 심리치료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증명이 되었다는데 도데체 무슨근거로 그런이야기를 하시는지 통탄스럽습니다.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정신병심리치료에 대해서 개념이나 방법을 잘하는 전문가가 없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회를 줘보고 환경을 구축해보고 되는지 안되는지 논하라 와 똑같습니다.
저는 배정규교수님이 재발직전에 당사자들을 상담하며 증상을 약이상으로 가라앉히는 것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저 또한 칼들고 찌르거나 뛰어내릴만큼 싸이코틱한 내담자를 심리치료로 웃으며 나가게 한 것이 수도 없습니다.
환경과 전문가가 없을뿐이지 심리치료가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수십만원의 비용대비 몇백원짜리 디아제팜 한알이면 재울수 있기 때문에 가성비가 떨어질뿐입니다.
의료보험 수가를 3분진료보다 파격적으로 늘려보십시오. 의사들이 정신병 심리치료를 골싸매고 장려하나 안하나 다음에 자료를 가지고 논해보겠습니다
하여튼 말이 샜는데 병원이 100중에 90% 이상을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들이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건강 영역의 기본은 다학제적 접근입니다.
약과병원이 50%라면 지역사회 기반이 50%는 되어야 합니다. 그 기반 안에는 당사자들의 생태계가 가장 우선적으로 포함되고 가족의 상처도 보듬어주고 병원과 시설의 연결고리가 되는 중간다리 영역을 해야 하는 것도 포함되고 기존시설의 혁신과 특화도 필요하며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도 서로 존중하는 무대도 만들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