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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
* 스톤 마운틴의 형성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74년 Edwin De Leon은 ‘하퍼’라는 잡지에 기고한 “새로운 남부(The New South)”라는 기사에서 스톤 마운틴이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나올 만큼 스톤 마운틴은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화강암으로 된 돌산으로 유명하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스톤 마운틴은 3억 5천만년 전 酉?이동이 일爭じ庸?대륙판과 판의 마찰로 발생한 열에 의해땅 속 깊숙한 곳에서 용암이 끓어 지표로 올라오다가 중간에 굳어 단단한 화강암이 되었고 이 상태에서 수 천 만년이 지나면서 다시 지질변화가 일어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의 일부가 지면에 노출이 된 것이 바로 지금의 스톤 마운틴이다.
100여 마일 떨어진 애팔라치안 산맥과 지하로 연결된 이 화강암 덩어리 전체 크기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이며 현재 지상으로 솟아 산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전체 화강암 덩어리의 수천분의 일에 불과한 크기로 추정되고 있다. 오래 전 침식작용에 의해 지표면 위로 노출된 산의 전체 면적은 약 390만평(583 acres 또는 2천5백만 스퀘어 피트)이고 둘레는 약 8 km 정도. 높이는 해발 1,683피트(270m)로 주변지역보다 825피트 정도 높아 평원지대인 애틀랜타 전체 뿐 아니라 서쪽으로는 케네소(Kennesaw) 마운틴, 북쪽으로는 아미칼로라(Amicalola) 폭포, 북동쪽으로는 요나(Yonah) 마운트 등 조지아주의 주요지역을 조망할 수 있다.
* 스톤 마운틴 지역의 역사
스톤 마운틴의 역사는 스페인계 백인들이 이곳을 찾기 훨씬 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던 크리크족(Creek) 인디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톤 마운틴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대 인디언 부족들의 주거지가 최소한 12개 정도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이곳이 북미 인디언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 전부터 이 부근에 거주했던 우드랜드(Woodland) 인디언들은 조지아 북부 포트(Fort) 마운틴에 있는 것과 유사한 형태의 바위벽을 스톤 마운틴 정상을 둘러싸도록 설치하기도 했다. 스톤 마운틴 자락에서 이들이 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2개의 마을 유적지들이 발견되어 이들 고대 인디언들이 스톤 마운틴 주변에 마을을 이루고 군집했음을 증명했다.
스톤 마운틴은 1567년 스페인 탐험가 Juan Pardor가 고대 인디언 유적지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 이 산을 ‘크리스털(Crystal) 마운틴’이라 부르기 전까지 크리크족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론(Lone) 마운틴’으로 불려졌으며 주변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지형조건 때문에 회합장소로 자주 이용되곤 했다. 1790년 6월 9일 Marinus Willett 대령은 당시 미국의 수도였던 뉴욕에서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이곳에서 크리크족 인디언 추장들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록(Rock) 마운틴’ 또는 ‘록 포트(Rock Fort) 마운틴’으로 불렸던 스톤 마운틴은 하이타워(Hightower) 트레일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던 초기 유럽 정착민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했다. 1813년 이전까지 초기 정착민들은 현재 GA 124번 하이웨이 북쪽에 위치한 ‘락 브리지’(rock bridge)를 지나기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현재의 귀넷카운티 북부 지역으로 돌아가곤 했고 하이타워 트레일을 통해 계속 서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인디언 거주지역을 지나야 했다. 초기 정착민들은 1813년 조지 길머(George Gilmer) 중위가 피츠트리(Peachtree) 요새를 세워 스톤 마운틴 서쪽 지역을 확보한 이후에야 비로서 스톤 마운틴 남쪽 지역(현재의 락브리지(Rockbridge) 로드 주변)을 지나다닐 수 있게 됐다. 1821년까지 스톤 마운틴 인근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던 크리크족 인디언들이 떠난 후 헨리(Henry) 카운티의 일부로 편성됐던 스톤 마운틴 지역은 추첨에 의해 6명의 당첨자들에게 배분됐는데 당시 가격은 202.5 에이커 당 19달러였다고 한다.
이후 스톤 마운틴은 1822년 12월 9일 새로 형성된 디켑(Dekalb) 카운티에 편입됐고 이어 머서(Mercer) 대학의 창립자 중 한명이었던 애디엘 쉐우드(Adiel Sherwood) 목사(침례교)에 의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스톤 마운틴 지역은 지역 사업가들에 의해 서서히 개발되기 시작한다. 먼저 1834년 7월 18일 어거스타(Augusta) 로드에 우체국이 세워졌고 1836년 같은 길 위에 호텔이 들어섰다. 1838년에는 사업가 애론 클라우드(Aaron Cloud)가 스톤 마운틴 정상에 자기 이름을 따 클라우드 타워(Cloud Tower)를 건립했다. 이 타워는 165피트 높이로 근처의 농장지대와 조지아 신기슭에 들어선 마을들을 조망할 수 있었고 1.1마일 트레일 코스를 걸어올라온 관광객들을 위한 식당과 클럽 등을 갖추고 있었다. (클라우드 타워는 폭풍에 의해 파괴된 이후 1851년 전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다시 세워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1839년 ‘뉴 기브랠타(New Gibraltar)’라는 이름의 마을이 세워졌고 1847년 12월 24일 조지아 주의회에 의해 ‘스톤 마운틴’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바뀌게 됐다. 이후 스톤 마운틴 마을은 농산물시장을 열기도 하는 등 짧은 번성기를 맞기도 했지만 남북전쟁 기간 중이었던 1864년 7월 19일 존 맥펄슨(John McPherson) 장군에 의해 파괴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같은 해 11월 16일 셔먼(Sherman) 장군의 부대는 대서양으로 진군하기 전 어거스타에서 출발해 스톤 마운틴 북부지역을 통과했던 철도를 파괴하기도 했다.
* 채석장
1830년대 초반 스톤 마운틴 동부와 남부 지역에서 소규모의 화강암 채석이 이뤄지기도 했으나 본격적인 채석은 1847년 간선철도가 완성된 이후인 1850년부터 진행됐다. 이 간선도로는 1864년 파괴된 이후 1869년 ‘조지아 철도회사’에 의해 복구됐다. 1867년 2월 5일 스톤 마운틴을 14.400달러라는 헐값에 매입한 ‘스톤 마운틴 철도 & 화강암 회사(The Stone Mountain Railway & Granite Company)’는 스톤 마운틴과 마을 사이에 채석 노동자들과 돌절삭기, 화강암들을 운반하는 소형기관차(Dinky)를 운행하기도 했다. 이 당시 스톤 마운틴의 채석산업이 번창했던 이유는 남북전쟁 중 사망한 병사들을 위한 기념비나 묘비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었다.
1887년 7월 16일 애틀랜타의 ‘배너블 브라더스(The Venable Brothers)’는 ‘남부화강암회사(The Southern Granite Company)’로부터 스톤 마운틴을 4만 5천 달러에 매입한 이후 24년 동안 채석사업을 벌였고 스톤 마운틴의 채석 사업은 이후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는 가운데 1970년대까지 계속됐다. 이곳에서 채석된 질좋은 화강암은 조지아 주 의사당건물이나 연방국회의사당 계단에 사용되기도 했고 멀리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 건축재로도 수출됐다고 한다.
100년 이상에 걸친 채석으로 인해 스톤 마운틴은 당연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무분별한 채석으로 이 산에서 쪼개져 나간 돌을 1피트 넓이로 깔면 북극에서 남극까지 이을 수 있는 규모의 분량이라니 어느 정도 규모의 채석이 이뤄졌는지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조지아 주정부는 1958년 뒤늦게 이 산을 구입해 주립공원으로 지정했지만 관리보호를 소홀히 했고 채석작업으로도 모자라 ‘실버 달러 시티(Silver Dollar City)’라는 개발회사에 관리권을 위탁해 수익성 있는 공원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산 주변의 경관을 해치는 무식한 짓을 벌여왔다. 193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채석사업을 위해 사용됐던 철도는 전성기가 지난 1942년 철거됐고 현재 스톤 마운틴 공원에서 운행되는 미니 열차는 원래의 철도와 아무 상관없는 관광용이다.
* 스톤 마운틴과 KKK
지금은 애틀랜타 주민 뿐 아니라 조지아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관광명소로 부각된 스톤 마운틴이 한때 인종차별의 대명사격인 KKK단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노예해방 이후 이를 반대했던 KKK단원들은 해방된 흑인들을 습격하러 가기 전 스톤 마운틴에 모여 집회를 열곤 했다고 한다. 애틀랜타로 통하는 지금의 78번 하이웨이는 스톤 마운틴에 모였던 KKK단원들이 말을 몰고 흑인들을 습격하러 가던 길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1915년 추수감사절 저녁 윌리엄 J. 시몬스(William J. Simmons)와 사무엘 배너블(Sa mmuel Venable; 당시 스톤 마운틴의 소유주였던 ‘배너블 브라더스’의 창업자???) 등 16-34명의 무리(기록에 따라 모임에 참가한 자들의 수가 다르다)가 스톤 마운틴 정상에 올라 로마서 2장의 몇 구절을 읽고 십자가를 불태움으로서 한동안 사라졌다고 여겨졌던 KKK단의 부활을 선언했다. 당시 베너블은 모임 참가자들에게 산 정상에서 영원히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이후 다시 45년 동안 스톤 마운틴은 이 비열한 무리들의 회합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당시 스톤 마운틴에 모여 회합을 갖고 여러 악행을 저질렀던 KKK단의 행적은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악명을 떨쳤다. 애틀랜타 출신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3년 8월 28일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앞에서 이뤄진 그의 대표적인 연설 “I Have a Dream”에서 “조지아의 스톤 마운틴에서 자유의 종소리가 울리게 하자”고 외쳤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 스톤 마운틴의 부조물
스톤 마운틴이 애틀랜타의 상징이라면 산 중앙에 새겨진 부조물은 스톤 마운틴의 상징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단골 기념촬영장소로 각광을 받고있는 이 부조물은 남북전쟁의 패배로 인해 상처받은 남부의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돼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완성됐다. 기록에 따르면 1909년 당시 ‘남부의 딸들(The United Daughters of the Confederates)’이란 단체의 지부장 헬렌 플레인(Helen Plane)은 남부연맹의 상징이었던 로버트 E. 리(Robert E. Lee) 장군을 기념하는 기념물을 만들자고 호소하고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조각가 구존 보그럼(Gutzon Borglum)이 이 작업을 맡기로 하면서 750명의 남부군 병사들을 추가하자는 의견을 내는 등 조각대상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1923년 작업을 시작한 보그럼은 2년 만에 예산 과도지출과 작업과정 중의 의견 차이 등 여러 이유에 의해 중도한 뒤 사우스 다코다 주 러쉬모어 산의 대통령 4명의 얼굴조각을 맡게 된다.
이어 작업을 맡은 조각가 어그스터스 룩맨(Augustus Lukeman)은 이전까지 이뤄졌던 작업을 무시하고 절벽 중앙에 제퍼슨 데이비드(Jefferson Davis) 남부 대통령, 로버트 리 남부 사령관, 그리고 리 장군의 충실한 부하였던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장군과 기수 등 4명의 인물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28년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한 이 작업은 지지부진하며 진행과 중단을 거듭하던 중 2차 대전의 발발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됐다.
이후 1958년 조지아 주정부가 이 지역을 매입한 후 워커(또는 월터) 핸콕(Walker or Walter Hancock)에 의해 1964년부터 다시 조각작업이 시작됐다. 이 때 비로소 남부 영웅 3명만 조각하기로 결정됐고 첫 작업이 시작된 지 50년 만인 지난 1972년에 현재의 부조가 공식 완성됐다. 가로 190 피트(약 60m), 세로 90 피트(약 30m)의 면적에 새겨진 3명의 인물은 남북전쟁 당시 북부연맹에 항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남부연합의 대표들이다.(왼쪽부터 제퍼슨 데이비드, 로버트 리, 그리고 스톤월 잭슨)
* 스톤마운틴 공원의 형성
질좋은 화강암을 제공하는 채석장의 역할이 끝난 뒤 스톤 마운틴은 위락시설로 탈바꿈하게 된다. 억겁에 걸친 시간 동안 자연의 조화에 의해 형성된 이 거대한 화강암을 갈라내 상업용 석조로 이용했던 인간들은 이제 이 산 주변에 19세기식 농장, 개척시대의 증기기관차, 케이블카, 유람선, 박물관, 공예품점, 낚시터, 비치, 테니스장, 36홀의 골프장, 하이킹 코스 등의 위락시설을 갖춰놓고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기 진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스톤 마운틴 공원은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쇄도하는 조지아 제1의 명소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오늘날과 같은 스톤 마운틴 공원이 조성된 것은 남부동맹 기념관을 관광공원과 연계해 조성함으로 카운티와 조지아 주민들을 위한 막대한 세금을 거둘 수 있다는 디켑 카운티 출신 정치가였던 스캇 캔들러(Scott Candler)의 구상에서 비롯됐다. 1939년 초반부터 당시 주지사 탈매지(Talmadge) 등 유력인사들을 설득한 캔들러의 노력에 의해 1941년부터 조지아 주정부는 거대 농장주 샘 배너블(Sammuel Venable)의 후손들이 분할소유하고 있던 스톤 마운틴을 매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후 캔들러가 주정부 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958년 스톤 마운틴의 매입이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때까지 애틀랜타와 어거스타를 분할하는 도로였던 78번 하이웨이가 당시 미완성된 부조물이 방치되고 있었던 스톤 마운틴의 북쪽 절벽 앞으로 지나갔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부조물을 보다 가까이 보기 위해 절벽을 타고 내려오다 조난을 당하기도 했었다.
스톤 마운틴을 매입한 조지아 주정부는 78번 하이웨이를 공원부지로부터 1마일 북쪽으로 우회하도록 조정했고 옛 78번이 지나던 자리에 서쪽후문을 설치했다. 그리고 남북전쟁 이전의 방식으로 꾸며진 대농장, 철도, 스카이리프트, 대형 편종(Carillon Bell) 등의 위락시설이 마련됐다. 1970년대 들어 주정부는 I-285로부터 공원으로 이어지는 스톤 마운틴 프리웨이 건설을 완료했고 현재의 정문을 설치했다. 이후 캠프장, 호텔, 골프코스 등과 각종 오락시설들이 하나 둘씩 들어섬으로 현재의 스톤 마운틴 공원이 완성됐다.
* 스톤 마운틴 공원의 위락시설들
5월부터 10월까지 스톤 마운틴의 부조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름밤의 레이져쇼는 내용이 남부연맹을 찬양하는 등 다소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뤄 두어 번 정도는 봐줄만한 수준이다. 스톤 마운틴 공원에 자리잡은 호수에서 이용할 수 있는 증기유람선과 페달 보트, 카누 등은 가족동반으로 즐기기 좋은 위락시설로 일인당 8달러인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이용할 만하다. 호수에서는 공원에서 빌려주는 보트나 개인용 보트를 이용해 낚시를 할 수도 있다. 이곳의 골프장은 적당한 규모의 호수를 배경으로 멋진 경치를 자랑해 애틀랜타 한인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며 클럽하우스 또한 호수를 배경으로 분위기있는 식사를 즐기기에 적당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베큐 시설이 마련된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모처럼의 소풍을 즐길 수도 있다. 이처럼 스톤 마운틴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관광지가 아니라 애틀랜타 주민들의 활력소를 제공하는 하나의 거대한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음은 공원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몇 가지 주요정보들이다.
* 공원내 알코올반입은 허가되지만 길거리와 주차장에서의 음주는 금지되어 있다. 레이저쇼가 열리는 장소와 트레일 코스에서는 알코올휴대가 금지된다.
* 자전거는 대여되지 않고 공식적인 자전거용 도로는 없지만 교통법을 준수하는 한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다.
* 낚시는 조지아 낚시 허가증을 소지해야 하며 캠핑장에 위치한 식품점에서 3.50(일회용)-9달러(일년치)에 구입할 수 있다.
* 낚시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8달러에 대여할 수 있으며 일반 보트는 주말에만 대여할 수 있다.(대여료는 20달러)
* 호수에서 개인용 보트를 이용할 수도 있다. 5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5개월 동안은 주중에 해가 있는 동안,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는 오전 6시에서 오전 11시까지만 이용이 가능하다. 10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는 주중에만 개인보트를 이용할 수 있다.(공원이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공식홈페이지 (www.stonemountainpark.com)를 통해 구할 수 있다.
첫댓글 TV에서 본적 있어요~스톤마운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