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을 끌어안고 덕을 펼치는 - 포천 광덕산 산행기
포천, 역사의 아픔이 흐르는
2013년 6월 25일 제55차 산행지는 경기도 포천 광덕산(1,046.3m)이다. 코스는 ‘광덕고개-광덕산(1046)-삼각점(830)-박달봉(810)-백운교-흥룡사’로 산행시간은 약 4.5시간으로 넉넉하게 잡았다.
한국전쟁 63주년 기념일이기 때문일까, 포천의 분위기가 무거워 보인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무장을 한 군인들이 도처에 보이고, 헬리콥터가 부산하게 산등성이를 오르내린다. 군부대로 인해 지역 경제와 문화가 많이 좌우될 수밖에 없는 군사도시임이 실감난다. 도시 근교에서 군생활을 했던 나에게 포천이나 철원과 같은 최전방 지역은 낯설기만 하다. 내가 근무한 특전사는 비행장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산첩첩 물첩첩한 38선 접경지역 최전방과는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달리 버스 파트너인 ‘산과강’님은 이곳 포천에서 군생활을 했고,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에 오게 되어 감회가 남다른 듯 했다. 폭설이 내릴 듯한 하늘처럼 막막하기만 했던 젊은날의 어느 시간을 그는 더듬고 있었으리라.
포천(抱川). ‘한탄강을 품은 땅’이라는 뜻을 지닌 고장으로서 정맥의 땅이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주요 구간, 즉 광덕산(1046)-백운산(904)-국망봉(1168)-민둥산(1023)-강씨봉(830)-청계산(849)-운악산(936)이 포천을 지나기 때문이다. 오늘은 포천(砲天), 하늘 한 자락에서 전몰장병을 애도하는 대포소리라도 터질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늘따라 분단의 슬픔, 역사의 아픔에 마음이 저려온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의 추가령곡에서 발원하여 철원과 연천을 거쳐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하는 물줄기이다. 한탄강 강물은 38선을 지나 남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머리를 돌려 임진강을 얼싸안고 서해바다에서 금강 한강 임진강 예성강 대동강 물이 하나되는데, 한민족 비극의 역사는 언제 끝나려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한여울, 큰강물이란 뜻을 지닌 한탄강이 분단의 아픔 때문에 한탄, 탄식하는 강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광덕산, 한탄강 일대는 눈물과 연관되는 지명이 많다. 연천(漣川)이란 지명도 ‘눈물을 흘리는 냇물’이란 뜻이고, 궁예왕이 울었다는 명성산(鳴聲山), 고종, 순종 임금이 승하하셔서 백성들이 이 산에 올라 궁궐을 바라보고 울었다는 망곡산(望哭山)은 망국의 비애를 담고 있는 지명이다. 그런가 하면 차탄리(車灘里)는 선정을 베풀던 원님이 민정을 살피다 수레와 함께 냇물에 빠져 사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차탄리 북쪽 신탄리(新灘里) 월정리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문구와 함께 분단 역사의 수레바퀴가 쇠울음을 울고 있다. 또 철원의 고석정이란 바위섬은 양주 불곡산 출신의 임꺽정이 아지트로 사용했다 하니 변혁에 실패한 민중의 한이 배인 곳이기도 하다.
포천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47번 국도를 타고 철원을 향해 북상한다. 철원은 우리나라 최대의 안보관광지로서, 노동당사, 백마고지전승비, 제2땅굴 등이 있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란 신조어처럼, 비극적인 역사 현장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고자 하는 여행들에게 철원은 빠뜨릴 수 없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작년에만 해도 안보 관광 명소를 찾은 외국인이 150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6월 25일, 참혹한 역사의 상처를 가슴에 새기고 이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동막걸리로 유명한, 포천시 이동면 장암리를 지나 도평 삼거리에 이르러 우회전하여 316번 지방도를 타고 도평리 백운동고개를 오른다.
11시 30분, 전주에서 약 5시간이나 걸려 광덕고개 휴게소에 도착했다. 광덕재는 일명 카라멜 고개라고 불리는데, 험한 고개를 오르는 운전병에게 미군들이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카라멜을 준 데서 연유했다고도 하고, 낙타(카멜)처럼 등이 굽은 고개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오늘 산행의 기점인 광덕고개는 한북정맥 1구간의 끝인 광덕산과 2구간의 시작점인 백운산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와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의 경계가 된다.
광덕산을 위한 변명
북쪽으로 산행 코스를 절묘하게 잡아 장맛비를 피해 산행을 할 수 있었지만, 전주에서 포천까지의 이동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회원들이 지루함을 느꼈을 법도 하다. 더욱이 기다림, 기대와 달리 조망도 시원치 않고, 기묘한 바위도 거의 없는 육산이라서 실망한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달리 의미를 부여해 생각해 보면 광덕산은 많은 미덕을 지닌 산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광덕산은 한북정맥 1구간의 중심이 되는 산이라 할 수 있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산줄기를 의미하는데, 추가령-오성산-백운산-도봉산-장명산으로 이어진다. 그 중 1구간은 백두대간 수피령(780m)-복주산(1152m)-상해봉(1024m)-광덕산(1046)-광덕고개가 되고, 2구간은 광덕고개에서 백운산(904m)-도마치봉(937m)-국망봉(1168m)-도성고개이다. 한북정맥의 동쪽은 한강유역에 속하는 회양, 화천가평, 남양주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북정맥의 서쪽은 임진강유역으로서 평강, 철원, 포천, 양주 등의 도시가 있다. 따라서 전주알프스에서 지난 3월 12일에 산행을 했던 양주 불곡산(469m)도 광덕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광덕산은 강원도 화천군과 철원군, 경기도 포천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서, 광덕산(廣德山)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덕이 많은 산, 후덕한 어머니 같은 산이다. 최근에 산행을 했던 문경 조령산, 고흥 팔영산, 해남 두륜산, 주작산이 암릉산행을 하면서 산과 바다를 조망하기에 좋은 골산이었다면, 광덕산은 부드러운 숲길과 차갑지 않은 계곡물, 그리고 나무와 새와 꽃을 음미하기에 좋은, 모성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육산이다. 골산에서 등산(登山)을 하게 된다면, 육산에선 입산(入山)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광덕산은 내가 넘어서야 할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안겨야 할 흙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광덕산에선 시각보다 청각과 후각을 열어두려 했다.
광덕산은 단풍과 능선의 억새, 그리고 설경이 아름답지만, 야생화와 나무를 관찰하기에 좋은 산이다. 광덕산은 펑퍼짐하게 큰 육산이라서 백운산 자락은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아가기에 적합한 곳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승복군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울진 삼척 공비 침투 사건(1968. 11) 이후 산속의 외딴집이 공비들의 은신처가 된다고 해서 화전민들을 떠나게 하고, 일부 지역에는 잣나무를 심기도 했다고 한다. 화전민들이 떠난 직후에는 고사리, 모시대, 잔대가 살기 시작하고, 이어 억새, 두릅, 병꽃, 국수나무, 버드나무들이 세대 교체를 하고, 최종적으로 참나무들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살고 있어 지금은 화전의 흔적이 거의 지워지고 복원된 상태이다.
우종영의 <게으른 산행>에 따르면, 이른 봄, 광덕산은 풀꽃들의 천국으로 불린다. 광덕산 북쪽으로는 추가령지구대 협곡이 있어 북방계의 식물이 모여 있고, 남에서 올라오는 남방계 식물이 광덕까지 도달하니 광덕산 주위는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런 까닭에 강원도 선자령, 곰배령, 분주령을 우리나라 3대 야생화 천국으로 일컫고, 양구 두타연계곡 생태관광코스도 유명하지만, 광덕고개에서 회목현을 거쳐 상해봉에 이르는 길은 나무 관찰장으로도 유명한 것 같다. 또한 키가 큰 나무들이 잎을 피워내 하늘문이 닫히기 전에 꽃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작은 꽃들을 관찰하기 위해 야생초 마니아들이 이른 봄에 이곳 광덕산을 찾는다 한다. 복수초, 꿩의바람, 노루귀, 얼레지, 중의무릇, 동의나물 등이 눈 덮인 광덕산에서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복수초 피는 이른 봄, 능선에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늦가을, 설경이 아름다운 겨울에 광덕산을 다시 찾는다면 광덕산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리라. 또한 우리가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면 광덕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으리라.
숲과의 대화
11시 30분. 광덕계곡 화엄(華嚴)공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화엄(華嚴)이란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화엄은 서로 다른 꽃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꽃을 이룬 경지를 말하는 데, 불교에서는 불법의 가르침으로 중생을 하나로 아울러 꽃밭을 이룬 이상 세계를 뜻한다. 그래서 구례 화엄사의 경우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법당과 요사채들이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되어 화엄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공존하여 아름다운 생태계를 이룬 이곳 광덕산 전체가 화엄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 보며 산행을 시작한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회장님이 올린 사진을 보니 回라는 붓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겨놓았다. 화엄공원에 있는 듯한데, 덕산(悳山)이란 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광덕산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 우리들의 산행도 회귀(回歸) 산행이요, 인생이란 긴 여행 또한 태자리에서 출발하여 떠나온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모성의 자리가 어머니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사랑이어서 우리네 마음의 본자리(본성)가 사랑이니, 사랑이 있는 마음이 영원으로 이어지리라.
덕(德)자의 원형은 덕(悳)이다. 곧은(直) 마음(心)이다. 나중에 행(行)이 추가 되어 德이 되었다. 또 덕의 사(四)자는 목(目)을 가로 눕힌 것이다. 직의 십(十)은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다. 곧은 마음으로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이 덕(德) 있는 삶이요 복된 인생이다. 저 높은 곳으로 머리(首)를 향하여 달려가는(走) 삶이 도(道)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영성운동가 다석 유영모(1890~1981) 선생은 단순 소박한 금욕의 삶을 살기 위해 50세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나이를 햇수로 세지 않고 날수로 하루하루 세었는데, 33,200일을 살았다. (전주 중인동 독배마을 복지시설 ‘진달네집’에 그분의 자취가 남아 있다) 그의 제자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김흥호(1919~2012) 교수 또한 스승처럼 55년을 1일 1식하며 그렇게 사시다 소천하셨다. 늘 말씀의 양식, 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살았던 것이다. 사랑의 마음(悳)을 실천할 때(德) 인간은 비로소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영생의 세계에 이르리라.
광덕동 마을 입구에서 단체 기념 촬영을 하고 수렛길을 따라 100m 쯤 들어간다. 화엄공원에서 잠시 머무르는 바람에 후미에서 출발했는데, 선두가 ‘평화의 집’ 쪽으로 간다. 그리 계속 가면 회목현, 상해봉으로 가는 길이 된다. 후미인 우리가 선두로 뒤바뀌어 한바탕 웃고, 잣나무림으로 들어서서 북쪽 능선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잣나무들은 20여년 전에 심어 간벌을 끝낸 상태라 제법 어른스럽게 자랐다. 우리가 숲에 들어서니 방어를 하기 위해 피톤치드를 뿜는지 기분이 상쾌하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것이 편백나무, 전나무인데, 잣나무는 이들보다는 약하지만 소나무, 낙엽송보다는 효과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단풍, 철쭉, 신갈나무들과 눈인사 한 후 암릉지대를 지난다. 등산로 왼쪽으로 오뚜기부대 유격훈련장이 있다. 광덕고개에서 1.4km를 오르니 도평리 마을과 백운동고개가 내려다 보이는 소나무가 나타난다. 참나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조선 소나무들이라서 그런지 눈에 띄고 기품이 느껴지고 돋보인다.
12시 06분. 다시 이정표가 나타난다. 광덕고개에서 1.78km을 왔다. 광덕산 정상까지 0.66km 남았다. ‘산까치’님을 비롯한 3~4명의 선두 그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상을 향해 오른다. 발끝에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느리게 걷기로 한다. 숲에는 혼자 들어가는 게 좋다는 조언을 떠올리며, 숲과 대화하기 위해 혼자 걸어본다. 깊이 들어갈수록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나무의 기운을 느끼고, 그들과 말없는 말을 나누며 새소리에 귀를 연다. 흰보라 싸리꽃, 흰 눈개승마를 만나면서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분(無一唯一)과 우주적 교감을 나눈다.
12시 20분 광덕산(1,046m) 정상에 도착했다. 안내 지도에 따르면, 광덕고개에서 정상까지는 2.44km이고 오르는 시간은 80분을 잡고 있는데, 보통 60분 정도 걸릴 듯하다. 광덕산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가까이 ‘한국의 차마고도’라 불리는 각흘산(838m), 그 너머에 명성산(923m)이 펼쳐져 있고, 다시 남으로 시선을 돌리니, 백운산, 도마치봉, 국망봉, 경기 제1봉인 화악산이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다. 한북정맥 제 2구간이다.
궁예의 나라, 미륵의 꿈
정상에서 북으로 철원평야와 상해봉를 바라본다. 1953년 정전을 앞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고지들이 가까이 다가올 듯하다. 아스라이 보이는 저 너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우리 국토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온다. 광덕산 정상 안내판에 흐릿하지만, 한북정맥을 설명하는 지도와 도마치봉(道馬峙峰)에 대한 설명이 있다. 광덕산 주변에 궁예와 연관된 수많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857년 궁예는 신라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한 쪽 눈을 잃고 유모에 의해 길러졌다고 한다. 그 후 궁예는 선종(善宗)이란 법명을 지닌 승려가 되어 무예를 익히기도 하다가, 처음에는 기훤의 수하가 되었다가 양길의 수하로서 승승장구하며 무용을 떨쳤는데, 결국 양길을 제거하고, 901년 후고구려를 세워 후삼국시대를 열게 된다.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하고,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는 살아있는 미륵을 자처했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점차 난폭해지고 의심이 많아 점차 민심을 잃은 궁예는 마침내 부하였던 왕건에게 쫓기는 처지가 되어 광덕산-백운산을 지나 도마치봉(925m)에 이르게 되었으리라. 한북정맥 2구간의 강씨봉(830)은 선정을 애원하는 부인 강씨(姜氏)를 이곳에 귀양보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광덕산에서 9시 방향에 있는 명성산(鳴聲山)은 강씨부인을 잃은 궁예, 나라를 잃고 도마치봉으로 패퇴하는 궁예와 그 부하들이 통곡을 한 산이라 하여 통곡산으로도 불린다. 또한 제 2구간의 최고봉인 국망봉(國望峰, 1168)은 나라 잃은 궁예가 이곳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바라보았다는 슬픈 전설을 담고 있다. 궁예의 삶과 역사 또한 승자에 의해 왜곡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이 점은 궁예와 동시대에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웠던 ‘가련완산아’가 된 견훤의 경우와 유사하다. 둘 다 미륵의 나라를 표방했지만, 인간의 세상에 용화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좌절한 비운의 영웅들들이었는지 모른다.
박로자 교수는 왕건 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궁예를 '인격살인'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 그려졌던, 궁예가 부석사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 경문왕 초상화를 칼로 베는 장면도 부석사(의상) 중심의 화엄종과 금산사(진표) 중심의 법상종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궁예와 견훤이 미륵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법상종 계열의 민중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왕건이나 신라 귀족들은 화엄종을 그 정신적 뿌리로 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궁예의 삶과 역사의 진실성 여부를 떠나 '뿌리를 잃은 절대권력은 무너진다'는 교훈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내세불 신앙인 미륵신앙은 역사의 후미진 곳에서 자랐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세계를 소망하는 민중들의 염원과 합치된다. 어느 시대나 정치권력은 종교를 끌어안으려 하나, 종교가 지배 권력과 결탁하고 사유화되는 순간 종교는 본질을 잃고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고, ‘팍스로마나(로마에 의한 세계평화)’의 수단으로 전락했을 때부터 기독교의 세속화는 시작되었고, 십자군 전쟁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일찍이 성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가르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예수, 석가, 노자, 간디, 다석과 같은 분들이 지닌 유일한 무기는 맑은 영혼에서 우러나온 말씀이요 실천하는 삶 전체였다. 그분들의 말씀과 삶은 광덕산의 숲과 길처럼 부드러우며 고요하고 넉넉하며 또한 깊다. 지식과 결탁한 권력, 권력과 야합한 종교는 민중종교, 민주정치를 표방하지만 이면에 폭력성을 내포한 경우가 많다.
광덕산 산마루에서 한 인간의 영욕의 삶, 한 시대 역사의 부침을 생각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변함없는 가치를 생각해 본다.지도자들이 민중의 슬픔을 끌어안고 덕을 널리 펼쳤던들, 신갈나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밀려나 있는 광덕산의 소나무들처럼, 어찌 이 후미진 골짜기로 패퇴하겠는가?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人),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공자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부드러워라, 내리 걷는 이 길
‘산까치’님과 함께 상해봉에 들러 바위에 뿌리내리고 있는 소나무를 보고 또 다른 각도에서 한북정맥을 조망해 보고 싶었다. 대장께 말씀 드리고 상해봉을 향했지만, 파헤쳐진 기상관측소 주변의 한북정맥 능선을 보고 마음이 아파 되돌아오기로 했다.
12시 50분. 광덕산 정상에서 식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하산을 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맨발로 걷고 싶을 만큼 등산로가 부드러운 오솔길이었다. 바람마저 잠든 한낮의 숲은 느리게 들숨과 날숨을 쉬고 있었다. 자신의 호흡을 느끼며 명상보행을 하는 틱낫한 스님처럼 내 맥박과 호흡, 그리고 마음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숲길이었다.
백운동 주차장에 이르는 7km의 긴 능선, 참나무 잎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광덕산 산길에서 순수한 마음, 흙에 물들지 않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듯하였다. 아, 우리가 철이 들고 세상에 눈뜨게 된 이후 맨발로 걸을 수 있었던 삶은 과연 얼마나 되었던가? 세상의 숲들의 숨소리는 얼마나 거칠었던가?
돌아보면, 내가 걸었던 산길, 인생길 중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늘의 뜻이 선하고 아름다운 까닭이며, 우리를 아름다운 산하로 안내한 분들의 마음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행복을 경험하게 하신 깊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보면 늘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숲길을 걷게 된다.
암에 걸린 후 깨달음을 쓴 에세이집 <인생>에서 소설가 최인호는 이렇게 말한다. “생(生)은 신이 내린 명령(命令), 그래서 ‘생명(生命)’”이라고. 또 시 ‘엄숙한 시간’에서 R. 릴케는 말한다. “우리들이 이 순간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 때문이다.”
13시 50분. 산나리꽃을 본다. 광덕산 산행 중에 나리꽃이 세 차례나 발걸음을 붙든다. 하늘나리처럼 고개를 쳐들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땅나리다. 길섶에 외로이 피어있는 중나리 꽃 한송이에서 어머니를 겹쳐 본다. 공양주보살처럼,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할 적이면 목사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뒤안에서 식사 준비에만 여념이 없으셨던 어머니. 예수님께 칭찬 받았던 마리아의 삶을 버리고 어머니는 흔쾌히 마르다의 길을 택했다. 무엇이 본질이었을까, 왜 어머니는 그 길을 즐겁게 가셨을까? 흐릿한 시선에서 중나리가 감추어진다. 다시 하산을 재촉한다.
14시 04분. 박달봉(810)에 이르러 잠시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한 후 박달계곡 능선을 타고 내려간다. 능선이 끝나고 계곡에 가까이 갈수록 산은 낮아지고 나무들의 키는 커진다.
14 30분. 홍송 솔내음이 그윽하다. 내려갈수록 홍송들이 자리를 잡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신생의 아름다움과 적멸의 고요, 색과 공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이윽고 아랫마을에서 개소리가 올라온다. 사람의 마을에 다 온 듯하다.
回, 오직 길 위에 있을 뿐
15시 00분. 흥룡사(興龍寺) 주차장에 도착해, 백운계곡에 발을 씻으며 산행의 피로를 푼다. 차갑지 않아 오래 발을 담글 수 있어 좋다. 길이 10km의 백운계곡 물은 차갑지 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한다. 광덕산과 백운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이 백운계곡에서 겨울에는 동장군축제가 열린다.
흥룡사에 들르기로 했다. 흥룡사 주차장에 군용차량들이 도열해 있다. 훈련을 하고 있는 병사들을 지원하는 차량들인 듯 했다. 흑룡사 입구의 거석에 행서로 白雲山黑龍寺라고 써 있다. 흑룡사에서 1.74km 거리에 흑룡봉(774m)이 있어, 한 때 절 이름도 흑룡사라 한 듯하다. 흑룡부대에서 군생활을 했는지라 묘한 느낌이 들었다.
흥룡사. 신라 효공왕 2년(878년) 도선국사가 700여 간의 범궁(梵宮-불교건축의 총화라 할 수 있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절)으로 조성하고 내원사라 칭했다 하는 절. 도선 국사가 나무로 만든 새 세 마리를 날려 보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백운산에 앉아 이곳에 절터를 정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조선 초기에는 무학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그 후 박은사, 상원암, 흥룡사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왔다.
6․25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일부 복원하여 현재는 대웅전,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 하나만 있는 절이 되고 말았다. 대웅전 앞에 5층석탑이 있고, 대웅전 왼쪽에 지장보살입상이 있으며, 법당벽화로 십우도와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세종대왕 친필이 전해온다 하여 종무소 스님께 물었으나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정토까지 가시렵니까 무량수불 앞에 일러 사뢰옵소서 서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 이 몸 남겨두고 48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
삼성각을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광덕산, 흥룡사와 무관하지만 향가 ‘원왕생가(願往生歌)’의 지은이로 알려진 광덕(廣德)을 생각해 본다. <삼국유사> 권5에는 광덕과 그의 친구 엄장, 광덕의 아내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출가승이었던 광덕은 분황사 남쪽에 살면서 극락정토에 이르기 위해 수도에 전념했다 한다. ‘원왕생가’는 광덕이 극락왕생하기를 소망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노래인 것이다.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들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종교성처럼, 진리의 세계, 도의 세계에 이르고자 불법(佛法)의 사자인 달에게 간절히 빌고 있는 것이다.
흥룡사 대웅전 뒤 삼성각 돌계단에 앉는다. 뒤태가 더 예쁜 절이라는 생각을 하며, 어머님을 모시고 올라갔던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 뒷모습을 생각해 본다. 80세 노모를 부축하며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며, 한사코 장곡사 뒷모습을 못 보고 내려가면 절을 안 본 것이라고 했었던 2003년 봄날이 떠오른다. 그 여행이 어머님과의 마지막 외출이었다. 그해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 어머님은 지상에서의 마지막 호흡을 거두셨다. 10년 전 오늘, 6월 25일.
계단을 내려서는데, 큰까치수염이 다시 나를 붙든다. 무수한 별꽃을 피워내고 있다. ‘잠든 별, 혹은 친근한 정’이란 꽃말을 지닌 꽃. 빛의 세계에 이르셨으면서도, 막내 아들이 그리워 잠든 별로 이곳에 피어나셨을까. 정겨움, 그리움이 밀려오는 오후의 시간이다. 광덕이 그러했듯이 한평생 구도의 길을 걸으셨던 어머니, 광덕산 넉넉한 산자락처럼 자식을 감싸주셨던 분.
하산주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듯하여 주차장을 향한다. 백운처럼 행운유수처럼 자재롭고, 흑룡처럼 지상에 있으되 진리(黑)의 세계, 하늘빛을 지니리라. 삶이 슬프고 척박할수록 덕을 펼치며 생을 끌어안는 광덕산의 미덕을 배우리라.
전주로 되돌아 오기 위해 다시 길을 나선다. 떠남도 돌아옴도 없다. 오직 길 위에 있을 뿐. 정호승 시인의 고백을 떠올려 본다.
"지금까지 내가 걸어간 길은 / 별의 길을 따라 걸어간 길뿐이다 / 별의 골목길에 부는 바람에 모자를 날리고 / 그 모자를 주우려고 달려가다가/ 어둠에 걸려 몇 번 넘어졌을 뿐이다" -시집 <여행>(2013)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