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언젠가 꼭 가보겠노라 아껴둔 곳이 있었다. 소소한 일탈을 꿈꾸는 에디터들의 서로 다른 세가지 이야기. 군산 빈티지 여행, 동해 바다 열차 여행, 가평 캠핑카 여행.
시간이 머문 곳 군산 거닐기
봄바람이 살랑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역마살을 달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시간이 멈춘 듯한 ‘빈티지’의 도시 군산. 그곳에서 잃어버린 낭만을 만끽한 하루는 일상의 메마른 감성을 채우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08:10 칙칙폭폭~ 기차 타고 출발일세!
기차를 타본 지 언제던가 더듬어봤다. 한참을 생각해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동안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스스로 자신에게 참 인색했다는 점에서 잠시 반성.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과 덜컹이는 기차소리를 느끼는 찰나, 눈을 떠보니 벌써 도착했단다. 내 ‘3시간 30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니! 놀라서 짐 챙기고 있는데 기차가 슬금슬금 움직인다. 당황한 나머지 빨간 버튼 누르고 수동으로 문 열어서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도저히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며 군산에 발을 디뎠다.
11:44 맛깔스런 남도 한정식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미리 찜해놓은 식당 ‘한주옥’에 들렀다. 회와 아귀찜, 농어매운탕, 간장게장에 편육과 잡채, 삼치 등을 곁들인 상다리 휘어지는 밥상을 받아 들고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가격은 한 사람당 1만3천원. ‘꺄악’ 소리 지르고 싶다. 음식, 가격, 맛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떨어진 맛집 탐방에 텐션 업! 기분 좋게 나오는데, 음식점 밖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맛집 포스가 줄줄 흐른다. 역시, 군산에 오길 잘했군, 잘했어.
12:50 웰컴 투 군산
배가 부르니까 이제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층층이 높게 오른 회색빌딩 숲에서 벗어나 단층 건물 위로 보이는 정겨운 하늘. 그 정겨움 사이로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져서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오래된 일본 목조 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일제 강점기, 수탈당한 많은 물자가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던 그 시기의 아픔이 서린 도시 군산. 역사의 잔재는 이렇게 거리 곳곳에 남겨 있었다.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채, 잔잔하게 흘러가는 항구도시의 굳건함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가. 하늘이 푸르고, 햇빛은 따사로웠고,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자연스러웠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가 뛰어 다니던 군산 서초등학교의 운동장. 영화의 80%가 이곳 월명동에서 촬영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단팥빵 중 내 마음속 1위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세워진 최초의 빵집. 문의 063-445-2772
13:30 멈춰버린 기찻길, 페이퍼 코리아선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1944년, 신문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옛 군산역에서 조춘동 사이에 준공한 2.5km의 짧은 기찻길.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의 지붕과 빨랫줄 사이를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달리던 페이퍼 코리아선은 지난해 12월을 기점으로 멈췄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자리도 얼마 후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된단다. 어디선가 노란 안전모를 쓴 역무원 아저씨가 비키라고 소리칠 것만 같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철로 옆에 말려둔 무말랭이와 시래기가 여기저기 무심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도 여전했다. 진한 삶의 향기도, 선로 옆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디딤돌에 놓인 고무신도, 자주 출몰하는 손님들의 방문에 심드렁한 백구도 모두 한가롭다. 시간은 이곳만 쏙 비켜가 있었다.
군산의 2대 명물 중화요리집 쌍용반점의 짬뽕. 조개로 우려낸 시원한 국물과 수타로 뽑은 쫄깃한 면발이 후루룩 잘도 넘어간다. 문의 063-443-1259
15:00 희망이 꽃피는 봄 해망굴과 월명공원
옛 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 해망동을 연결하는 터널인 해망굴은 1926년 개통한 국가등록 문화재다. 그 앞에 ‘안녕!’이란 글귀는 여행객을 맞이하는 센스. 굴을 따라 건너가면 ‘아트인시티 2006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마을 전체가 벽화 옷을 입은 해망동으로 이어진다. 숨은 그림 찾기 혹은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각기 다른 작품을 찾는 재미가 쏠쏠한 골목골목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유쾌함에 젖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듯. 3년의 시간이 흘러 곳곳이 벗겨지고 빛바랜 모습은 빈티지 도시 군산에 아주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해망동을 상징하는 물고기 그림을 따라 올라갔더니 어느새 해망굴 위로 펼쳐지는 월명공원에 도착했다. 면적만 무려 77만 평에 이르고 산책로만 12km에 이르는 이 공원은 봄꽃으로도 유명한 군산의 또 다른 명소.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진달래와 개나리까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꼭대기에 위치한 수시탑 바로 아래에는 그네와 미끄럼틀, 정글짐이 있는 새치름한 비밀의 정원이 숨어 있다. 그 그네를 타고 밑을 내려다보면 군산이 한눈에 담기는데, 마치 탄산 가득한 페리에를 벌컥벌컥 들이결 때처럼 짜릿한 여운을 만끽 할 수 있었다.
20:00 시간을 찾아서,다시 서울로
걷고, 또 걸었다. 어수룩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보고 싶은 곳을 찾아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한 가게 앞을 세번 이나 오갔더니, 마치 집 앞처럼 친근해진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고, 세상의 번잡한 소음도 음소거된 도시 군산.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는 결론이다. 시간의 틈을 간직한 이곳, 군산의 멋진 하루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