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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13.12월호 원고(55매 내외)
[ 내 고향 산책] 시인 송수권의 전남 고흥
송 수 권
1. 첨산 고개를 넘어
‘함평 천지 늙은 몸이/ 제주 어선을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 갈 적/ 흥양(고흥)의 돋은 해는 보성을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 있다’ 동리(秱里) 신재효 선생이 지은 호남가의 일절이다. 임방울 명창이 소리를 할 때는 목청을 고르기 위해 퍼질렀던 단가의 첫머리이다.
비록 캄캄한 떡목이요 귀명창도 못 된 시인이지만 고향으로 내려가는 차 속에 앉아 무릎장단으로 추임새를 매겨 볼 밖에. 고흥반도는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자라 모가지 같은 벌교읍만 없었다면 영락없는 섬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뻔한 땅이다. 전라남도에서는 해남 반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한 시인이 자라고 꿈을 키웠던 땅, 송곳날 같은 제석산(첨산) 고개를 넘으면 동강면 마륜촌이다. 이곳에는 단종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일족이었던 송간(宋侃, 충강공, 형조참판, 순무사)을 주벽으로 모신 고흥 여산 송씨의 파조(派祖) 사우인 재동서원(齎洞書院)이 있다. 계유정란으로 순무를 하고 있었던 송간이 이곳에 숨어들어 퍼뜨린 자손이 5천호에 이르는 오늘의 고흥 여산 송씨다. 그 기맥이 창창하여 임란공신 8충을 제향하고 매월당 김시습, 조려 같은 생육신도 함께 향사한다. 생육신과 사육신 이들이 아니었으면 이땅 강상의 윤리 벌써 요절났으리. 이들의 후예가 아니었으면 어찌 울돌목 해전 율포, 당포, 한산, 노량대첩이 있을 수 있었으리.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습니다(若無湖南 始無國家)’ 난중일기에 새겨진 피맺힌 충무공의 한 구절, ‘나 죽었다 입 밖에 소문내지 마라(愼言我死)’ 노량해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차마 이 말 한 마디는 난중일기에 새기지 못하였구나! 재동서원 충신 중 송희립(宋希立) 장군은 승전고의 북채를 손에 쥐고 유언을 귀엣말로 마지막 지킨 막료장, 간(侃)의 6세손으로 송대립 창의장, 홍원 전투에서 순절한 그 아들 송심 등 3부자가 공신인 고경명 집안을 닮았다. 그래서 재동사는 포충사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 재동사에 가면 ‘여름날 녹두나물은 먹지마라 사람 상할라’는 귀엣말이 있다. 녹두나물은 상온의 날씨에 잘 쉬므로 먹지말라는 뜻으로 후세를 경계해오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2. 물레야 돌아라 빙빙 돌아라
28번 국도를 따라 시인의 고향(두원면 학림) 가까이 있는 운대리의 사구시로 길을 잡는다. 사구시는 고흥의 주산인 팔영산의 안산(案山)으로 운남산의 수도암 골짜기 여섯 동네를 말한다. 사구시란 ‘사기 굽는 마을’이란 뜻을 지녔다. 그러니 ‘사기골’이요, 독쟁이 마을이다.
사기골의 가마터를 살펴보면 지금의 석촌(石村)마을, 운곡리(雲谷里) 일대에 흩어져 있는 32여 기의 가마굴이 있다.
11C-16C까지 500여 년간 전통을 이어온 ‘한국 최대의 독쟁이들 마을로 사기전(沙器廛)을 갖추어 배다리가 있는 곳까지 드나들었던 곳으로 이 안골 마을을 싸잡아 사구시라고 부른다. 중요한 가마터를 살피면 ⓵ 절터골 ⓶ 독적골(독을 빚던 마을) ⓷ 사구시(石村, 운곡리 일대) ⓸ 독점골 ⓹ 큰골(석촌 뒷골, 청자사기 11-13C) ⓺ 작은골(//) ⓻ 뒷골 (자완, 대접, 접시 12-13C) ⓼ 수둑골(상감, 귀얌, 덤벙분장의 대접, 접시류) ⓽ 성적골 ⓾ 대등골(농박골, 분청사기, 지방기념물 80호, 1984년 문화재청 발굴 조사 19호-20호) 등으로 밝혀져 있다.
현재 이를 기념하는 세계 최대의 도자기 공원(20만평)이 조성되고 있어(1호-20호) 가마가 복원될 계획이다. 동시에 도자기 공원을 비롯하여 도자기 전시관, 설화문학관(어유야담의 저자 유몽인 문학관) 기타 시인의 문학상 제정과 문학관도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접근성이 좋아 고흥읍에서 7분 거리에 있어 고흥의 중요한 문화행사를 비롯 각종 축제가 이 공원에서 이루어 질 전망이다. 이를 기념하는 시인의 16시집인 《내 고향 산책, 사구시의 노래》가 11월 중 출간 배포될 예정이다. 산골짜기 정상에 유서 깊은 수도암(修道庵)이 있어 물이 맑고 골이 깊어 휴양지로서도 적격인 셈이다.
물레야 돌아라 빙빙 돌아라
허튼가락 흘립기법
흙을 밟고 흙을 빚던 손
시구시 사람들 다 떠나가고
물레소리만 남았다
너구리 가마 속 불빛 한 줄기
누군가 살아 독을 짓는 마을
다시 물레를 밟는다
물항아리 간장독 해무리굽 대접
귀얄무늬 중발들
그 이전의 청화백자 희청자까지......
우리 동네 웅기짐을 지고 온 늙은이
어디서 왔당가 물으면, 사구시
사구시는 어디랑가 물으면
수도암 골짜기 여섯 동네
물레야 돌아라 빙빙 돌아라
이 시는 <사구시의 노래>로 준공탑이 세워지면 새겨질 시를 미리 써 본 것이다. 알다시피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을 도자기 전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도 큰 싸움이 있었다. 일본 3대 국보 자기는 남원에서 넘어간 사스마자기, 섬진강 하류, 샘골(井戶)에서 넘어간 막사발의 이도다완 그리고 이곳 사구시에서 넘어간 고비끼(분청사기)가 그것이다. 정유재란 때 충무공의 좌수영이 무너지고 소서행장이 순천왜성, 그 사위인 도진의홍이 사천왜성을 쌓고 마지노선인 섬진강 전투를 감행, 도자기공들 70여 명이 일본으로 붙잡혀 갔다. 그때 사구시 가마터를 지키기 위해 상포(上浦)에 상륙한 소서군을 맞아 중흥사(中興寺) 스님들 200여 명이 나와 처절한 혈전을 치르었다. 탈취해간 그 명품 그릇들을 놓고 한밤중에도 입으로 불고 닦았던 번주(藩主)들의 호사품이 그 그릇들인 것이다. 그것은 칼에 새겨진 너희들의 국화문장이 아니라 우리 겨레의 혼과 피와 눈물이었음을! 그래서 충무공 막하의 막료장과 군사들은 고흥사람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3.두원운석
추석 성묘도 못해 부끄러운 김에 사구시에서 멀지 않은 시인의 생가로 샛길을 잡아 달린다. 사람이 살지 않은 생가는 거의 폐가가 되어 마당에 솟은 산갈대가 키를 넘는다 이곳에서 읍내 중학교까지 20리를 통학하며 소년기를 보냈던 집이다. 그때는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에 나오는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이었다. 이 붉은 황톳길의 신화가 곧 나의 작품 ‘시골길 또는 술통’, ‘여승,’ ‘꿈꾸는 섬’, ‘자서전’, ‘봄’, ‘산문에 기대어’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때는 비가 와서 질컥러리는 그 황톳길 20리를 맨발로 걸어 넘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학교에 고무신 도둑들이(주로 상급생) 우글거리는 때였다. 기록이 햇빛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이 길은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을’ 동생이 자살했던 고향으로 들어가는 나의 등단작 <山門에 기대어>라는 초혼장을 쓴 애터진 길이기도 하다. 한 소녀를 꿈꾸었고, 꿈꾸었던 그 소녀의 이름은 다님이었던가 다남이었던가, 살모사 같은 발자욱을 파며 3년간 말 한마디 없이 궁둥이만 따라 다녔던 길이었고 혼자서 《꿈꾸는 섬》의 길이었다.(제2시집)
시인이 살았던 학림마을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있다. 그 초등학교 고갯길에서 좌측길은 고흥만 방조제로 들어가는 길이고 직선으로 뻗은 길은 두원반도의 끝자락 대전 해수욕장이 있다. 득량만과 보성만이 합수된 곳, 조성역이나 예당역으로 바다길 멀리 구물거리며 들어가는 가차를 보고 싶으면 자주 소풍을 오곤 했던 곳이다. 그 중간쯤 성두리 뒷산에 떨어진 운석은 1943년 도쿄과학박물관에 잠행했는데 지금은 대덕단지에서 영구 임대로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대전 못 미쳐 예회리 석류밭은 미인들의 사랑을 받는 고흥의 특산물 9미 8품 둥 정2품의 주산지다.
갔던 길을 다시 돌아나와 고흥만 방조제로 뚫린 길을 달린다. 방조제가 있는 마을이 곧 풍류(風流)고 득량만의 길목에 있어 해산물이 넘실거렸던 곳이다. 모래밭가에 있는 이 마을도 이제는 풍류가 아니다. 횟집이 세 군데, 어장이 둘 밖에 없다. 도양으로 건너가는 방조제가 막히고 득량만은 죽었다. 4km의 방조제를 타고 바닷길을 달리면 녹동항으로 연결된다. 28번 국도를 타고 고흥읍에서 녹동으로 가는 직선 도로를 피해 요즘 관광개들은 일부러 고흥읍을 거치지 않고 이 길로 바다 경치를 음미하면서 달린다. 늦가을인데도 깔다구(농어)를 치는 낚시꾼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4. 녹동애가
40분 쯤 달려 녹동항에 들면 먼저 쌍충사(双忠祠)를 들르지 않을 수 없다. 녹도 만호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사우다. 이대원(李大源) 장군은 임란이 일어나기 전 손죽도 해전에서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18세에 무과 급제, 선전관에서 녹도만호(鹿都萬戶)로 온 것은 그의 나이 22세 때, 그에게도 죽죽녀(竹竹女)라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좌수영의 좌수사 심암(沈岩)이 군기점검차 녹도에 왔을 때 소록도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취흥이 벌어졌다. 가야금을 타고 있는 죽죽녀의 미모에 반해 본영에 있는 기생과 맞바꾸자고 녹도만호에게 청을 했다. 그때 죽죽녀는 녹도만호의 여자랍니다, 라고 단연코 거절했다. ‘내일 출항시 이 여자를 데려가겠소’ 하자 죽죽녀는 은장도를 꺼내어 이 뱃머리에서 자결하겠소라고 읍소했다. 좌수사가 돌아가고 얼마 되지 않아 손죽도(損竹島)에 왜적이 출몰, 이대원은 연전연일 화살이 다하여 적장의 포로가 되어 돛대에 묶인 몸이 되었다. 이 때 좌수사 심암은 이 싸움을 구경만했고, 재빨리 장계를 올려 공의 공적을 본영의 공적으로 거짓 상소했다. 조정에는 두 문건의 장계가 잇달아 올라왔다. 그 중 후발된 장계는 죽죽녀가 관찰사에게 탄원한 애절한 탄원서였다. 그로 인해 심암은 파직되었고 죽죽녀는 정유란 때 순천왜성의 소서군에게 끌려가 자결했다. 이대원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는 고흥향교 유림들 사이에선 죽죽녀의 사랑을 흠모하여 사발통문이 돌았고, 그녀가 태어난 마을을 정문동(旌門洞)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남긴 시문과 함께 민요가 전해 오기도 했다. 남녘 땅 물뜰에 수국처럼 핀 절세가인, 이는 녹동애가의 한 토막이다. 개성에 진이가 있고 북도에 매창이 있었다면 남도에는 죽죽녀가 있었다. 시인은 이 한 토막의 애사를 전교(典敎)로 있었던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정운(鄭運) 장군은 충무공의 막료장으로 부산 해전에서 전사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보이는 충무공의 애도사는 ‘국가는 바른 팔을 잃고(國失右) 나의 오른 팔이 잘렸구나’라고 통탄했다. 그래서 이대원 장군이 죽은 손죽도를 손대섬이라고 부르고 정운 장군이 죽은 몰운대(沒雲台)를 몰운대(沒運台)라고 쓰기도 한다. 쌍충사의 유허비에 새겨진 이대원의 절명시 한 수 ‘돛대에 묶인 몸 나라의 은혜도 져버렸구나.’
5. 당신들의 천국
쌍충사에서 건너다 보는 소록도대교와 거금대교(금산)가 바다에 걸쳐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소록도와 거금도(금산)는 의형제처럼 그림엽서처럼 떠 있다. 7분 거리밖에 되지 않은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의 중앙공원으로 진입한다 작은 사슴이 노니는 곳, 수호천사촌으로 알려진 소록도는 결코 천사촌이거나 지상낙원의 섬은 아니다. 소문 속에만 무성했던 당신들의 천국, 이 천국엔 단 한번도 낙원은 없었다. 눈썹도 코도 얼굴도 없었던 유령의 섬, 그 유령들이 한밤중이면 깨어나 통나무와 널빤지에 목을 걸고 탈출했던 바다, 오늘은 그들이 피고름을 짜 만든 중앙공원에 비가 내린다. ‘메도 죽고 놓아도죽는 바위’ 바위가 있었던 잔디밭에 앉아 시인도 비를 맞는다. 일곱 천사촌을 돌아나와 악명 높았던 4대 원장 슈호 마사토(周防正秀) 동상이 철거된 구라탑 아래 서서 당신들이 건널 수 없었던 바다 비를 맞는다. 단종수술대(斷種手術台) 위에 누워 날것으로 빠삐용 같은 청춘의 무덤을 썼던 그 감금실의 울음소리, 흐느낌 소리, 빗소리, 목도질로 목도질로 5천 명 한센들이 바다물을 퍼 내어 건져올린 유령의 땅, 저 오마도 텅 빈 간척지 겨울 벌판에도 비 내린다
소록도는 녹동과 더불어 갈록지수형(渴鹿之水形)으로 사슴이 목말라 물을 마시는 형국이란 뜻에서 유래한다. 중앙공원은 4대 원장(1933-1942) 때 바다를 메워 만등 공원이고 오마도 간척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14대 조창원장(趙昌源, 대령,1961.824-1964.3.7), 재임 시절에 이루어진 벌판이다. 현재 소록도는 100년사를 자랑하며 아직도 한센인 580 명이 살고 있다. 중앙공원 비석에는 한하운의 시 ‘어릴 때 꽃청산 그리워 필 늴리리....’가 새겨져 읽는 이의 가슴을 태운다
6. 거무섬의 마빡이
거금대교를 건너 금산으로 들어간다. 속칭 거무섬으로 불러왔고, 금산에 와서 힘 자랑 말라했다. 전라도 왼씨름꾼들의 토박이 고향이다. 왼씨름이 오른 씨름으로 바뀐 것은 역시 박통시절이었다.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고흥 특산 김이 생산되는 돈 많은 섬이다. 연흥리에 있는 김일 체육관을 먼저 둘러본다. 체육관 앞에는 동상이 우뚝 서서 마빡을 자랑하고 있다. 저 어둡고 암울했던 60년대 흑백 TV시대, 밤이면 애늙은이들 어린애들까지 한 방에 모여 고함을 쳤던 시대, 링 위세서 역도산과 짝패가 되어 김일(金一)선수가 구석으로 몰렸을 때 박치기다 박치기! 박아라 하면 그의 이마가 무쇠뿔처럼 박혀 우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적셨다. 그것은 차라리 두려움이었고 공포였다. 저 이마가 쇳덩어리여 망치여, 그가 우리들이 사는 고흥반도 끝섬 거무섬 출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TV는 마을 전체로 번져나갔다. 학교에 가면 교실에서 난장판이 되어 이마에서도 피가 흘렀다. 좀더 자라서 대처에 나가 사는 곳을 물으면 고흥반도는 몰라봐도 이마를 한번 쑥 디밀며 박치기왕이 사는 동네라면 주먹깨나 쓰는 깡패들도 슬슬기었다. 이 덕택에 고흥에서도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간 마을은 금산이었다. 연흥리의 토종갓물김치는 맵고 얼큰해서 돌산갓보다는 한 수 위에 있다. 오천항에서 내다보는 저녁 노을 적대봉 봉수대에 올라 바라보는 아침 노을, 그보다 갓물김치국은 알큰하고 아린 맛이 속창까지 뒤집어 흔들어 속풀이 해장국이 따로 없다. 해안 일주 도로를 휘둘러 수목원과 오천항을 나오다 적대봉 밑 김성수(국창, 초대국악원장) 생가가 있고 월포 농악으로 유명한 매생이 마을이 있다. 미운 사위 음식이라 해서 사위 밥상에 오르면 사위는 멋모르고 떠먹다 입천장을 덴다. 매생이국은 김이 안나기 때문이다.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로 들어가면서 읊었다는 적대봉 위 송광암에서 듣는 황혼의 범종소리는 월포귀범(月浦歸帆)과 함께 금산 8경 중의 하나다.
7. 봉황에서 올빼미 씨는 나오지 않는 법
적대봉 밑 국창 김연수 생가를 들렀다가 고흥읍으로 서둘러 나온다. 9미8품 중 정일품인 고흥 유자단지(풍양)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유자들을 보고 고흥냉면집을 떠올린다. 유자청, 유자술이 아니라 유자향을 웃기로 쓴다는 고흥냉면집은 최근에 유명세를 탄 집이다. 고흥읍 봉황산 밑 종합문화회관 앞에서 그리 멀지않다. 한말 나라가 망하자 궁중음식 수라간지기였던 조순환(曺淳煥)이 조리사와 기생을 모아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차렸던 명월관 냉면 또한 고흥유자향을 웃기로 썼다고 한다. 명월관의 유자향냉면은 빙허각 李씨가 쓴 《규합총서》에서 가려 뽑은 《부인필지》기록에 의하면 그 향이 망국의 슬픔을 달래는 음식의 극치였다고 쓰고 있다. 아서원이나 태서관쪽보다는 말하는 꽃(기생)으로서 명월관 기생들이 한 수 위였던 것 같다
물냉면은 원래가 평양의 메밀국수가 본적지고 회냉면은 개마고원의 감자꽃에서 유래했고 꿩고기를 쓰면 상치 냉면, 나박김치를 쓰면 나박김치 냉면인데 고흥냉면은 칡냉면이다. ‘전통문화의 향수가 끊이지 않고/ 대대로 그 맥이 이어져 언제까지나/ 창창한 흥양골/ 이 삶의 터전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지켜 갈 낙원이다/ 복되거라 참되거라 영원하거라/ 문풍(文風)이여 떨치고 일어나/ 이 땅의 이름처럼/ 저 창해에까지 끓어 넘치라// 이는 필자가 1999년 종합문화 회관 건립기에 새겨 놓은 제석탑시(題石塔詩)다.
읍내 한 중앙은 봉황산이 활짝 날개를 펴고 그 위용을 자랑한다. 팔영산 능가사 큰스님이 말했다던가, 봉황에서 올빼미 씨는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8. 팔영산능가사
그래서 팔영산 능가사로 큰스님을 찾아간다. 능가사는 능가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8봉 아레 가장 큰 절로 유서가 갚다. 팔영산은 고흥의 주산이며 남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영산이다. 편백림 숲길을 타고 오르면 8봉 아래 팬션 몇 채가 아늑하고 8봉은 고흥 10경 중 제 1경이다.
수양제의 세수대야에도 비쳤다는
수려한 8봉이 대웅보전 지붕 위로 그림같이 솟았다
편백림 숲길을 올라 하늘다람쥐가 되어 볼까
한 봉우리마다 발을 걸고 뜀박질을 해볼까
아니면 한 봉우리마다 그네를 걸고
8선녀를 불러내어 밀어달라 할까
목탁을 들고 육관대사 성진(性眞)이 되어
나비처럼 숨어 저 꽃송이마다
술래나 되어 한 세상 저물까
대웅보전 큰 스님 무릎 밑에 엎드려
능가경 한 구절로 백 팔 염주알이나 세며
한 세상 저물까
능가사 큰스님은 좋겠다
아침마다 그 세수대야에
8봉이 거꾸로 비치고
그 8봉 위에 까까 머리가
아침 해처럼 떠오른다니.....
날아가던 비둘기 떼가 똥벼락을 내리면
대웅전 부처님도 두 눈썹 치켜들고 큰 소리 내어 웃는다니.....
능가사 큰스님은 참 재미있겠다
9.고흥부원군 유청신(柳淸臣)과 우주센터
팔영산을 굽이굽이 에돌아 무릉도원 백년폭포를 지나 용굴로 간다. 용굴 입구 절벽엔 ‘고흥부원군 유청신의 피난굴’이라고 써있다. 풍양면 한동리에서 자랐던 유청신은 고려말 고이부곡(고양이)을 고흥현으로 승격시킨 고흥의 개조(開祖)인 셈이다. 고흥읍 호동리의 운곡사(雲谷祠)는 그의 사우이며 토반 고흥 柳씨 혈손으로 알려진 유몽인(柳夢寅,고향은 아님)도 배향한다. 유몽인(1959-1603)은 광해군의 시강, 인조 1년 (1623,7월) 광해군 복위사건으로 아들 약과 함께 고향 양주에서 금부도사에게 끌려와 참형을 당한다. ‘일흔 살 늙은 과부가 혼자서 규방을 지킨다. 사람마다 개가를 권하는데.....흰머리에 젊은 얼굴로 가장한다면 어찌 분가루에도 부끄럽지 않으랴’ 그 유명한 <상부탄孀婦歎>의 한 구절이다. 숟가락이 남보다 작아보이면 반드시 고변한다고 마지막 해학을 남긴 시인, 최초로 시마(詩魔)를 발설한 시인, 오늘 호동리의 운곡사를 지나오며 그의 명패를 찾아내어 다시 읽고 왔다. 작년(2012)도에는 어우당 유몽인의 학술대회도 열렸다. 그가 고흥을 소재로 남긴 시가 103편에 이른다고 한다.
호동리 운곡사의 뒷산은 봉황산과 마주 보고 있는 수덕산이다.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어 봉대산이라고도 한다. 읍내 중학교에서 가을 소풍을 자주와서 득량만과 보성만을 발 아래 깔고 놀았던 곳이다.
저 남해의 좌수영이 있는 여자만(여수, 순천)과 가막만(벌교, 고흥)에서 우수영(해남, 진도)까지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말해 주는 다섯 개의 봉수대, 시인은 이 봉수대에 걸터 앉아 역사의식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수덕산 송치고개를 넘는 20리 눈부신 황톳길에서 시인은 신화의 꿈을 밟으며 순수 서정을 키워갔는지 모른다.
저 멀리 떠 있는 거무섬(거금도, 금산)의 적대봉 봉수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왜구가 침범했다는 기별통지, 봉대산(수덕산) 봉우리에도 연기가 피어 올랐다. 팔영산, 운남산에서도 다섯 모람의 연기, 드디어 전란에 휩싸였다는 급보, 한반도의 남쪽 끝섬에서 백두산 병사봉까지...... 일사천리로 연기는 북쪽 하늘 끝까지 이 땅을 뒤덮였으리라.
10. 아기장수 설화
봉대산을 내려오다 말발굽 턱바위에 앉아 땀을 닦았다. 이 산 아랫마을 어느 집에서는 몹쓸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몹쓸 탯줄을 걸고 나왔다는구나. 어찌나 그 울음 소리 세차게 울었던지 마을 사람들 역적질 아이가 태어났다고 관가에 고변 아이를 죽이기로 했구나. 하루는 이웃집 부인이 연장을 빌리려고 집에 와 보니 문고리가 들썩들썩, 장지문 구멍으로 들여다 보니 어린 아이가 학이 되어 천정을 날아다니며 좁쌀로 개미떼 군병을 만들어 낄낄대며 학익진법(鶴翼陣法)으로 지휘하고 있었으므로 마을에 역적났다고 산밭을 파고 있는 朴씨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렸구나. 두 부부는 한밤중 몰래 배를 타고 노저어 건너편 도덕면 가야리 앞바다까지 나아가다 벽락같은 아이 울음 소리, 뱃전을 잡고 기어오르는 어린 아이 외팔을 잘랐구나. 그때 봉대산에서 아기 장수를 기다리던 백마가 갈기를 세우고 날아와 외팔 장수 아기는 백마 등을 타고 천등산(天等山)으로 날아갔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 그래서 천등산이 마북산(馬北山)이 되었다는 이야기...... 난세에는 어김없이 그 아기 장수가 울음 소리를 타고 나타난다는데....그 날개달린 외팔 장수가 훗날 학익진법으로 한산대첩을 이끌었던 충무공 이순신이라고도 하고......
아기장수 설화는 함경북도에만 있는 설화가 아니라 이곳에도 있는 것을 보면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는 듯하다. 오늘은 그 백마가 갈기를 흔들며 흰 연기를 꽁무니로 토하며 나로도 항공우줸터에서 저 우주 하늘 끝 너머까지 아기장수 울음 소리를 퍼지르며 백마 위성 1호로 치솟고 있지 않으냐. ‘옛날 옛적에 그 몹쓸 아기 울음 소리, 훠이- 훠이-’
시인은 마지막으로 나로도 1대교 2대교를 거쳐 항공우주센터의 문을 열며 오늘의 여행도 끝난다. 아기곰 한 마리가 되어 꼬리불을 물고 우주 너머 끝 하늘에서 어느 날은 시인 또한 서성거리고 있으리라.
나로도 항공우주센터
밀리엄 세기의 첫장을 열었을 때
쑥밭골의 신화는 깨졌다
쑥과 마늘과 호랑이와 곰과
함께 살던 아기곰 한 마리가
굴 속을 빠져나와
꼬리 불을 물고 하늘을 서성거렸을 때
우리들의 신화는 빗장을 활짝 열였다
고흥반도의 아침이여
사구시의 노래여
-제16시집「사구시의 노래」서시(1) (2013.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