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도다 기삼연
1910년 무렵 전라도 일대에서는 “장하도다 기삼연, 제비 같다 전해산, 잘 싸운다 김죽봉, 잘도 죽인다 안담살이, 되나 못되나 박포대” 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동요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우상으로 여긴 남도 의병장들이다. 이 중 맨 앞에 등장하는 기삼연은 1907년 장성 수연산에서 거병한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한말 호남 의병의 큰 물꼬를 튼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김죽봉은 광주 농성광장에 동상이 세워진 김태원 의병장을, 안담살이는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교과서에 이름이 실린 보성 출신의 안규홍을, 박포대는 기삼연 의진의 부장인 박도경을 가리킨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기삼연 사후 부장이었던 김태원, 전해산, 이석용, 심남일, 박도경 등이 남도 의병을 이끄는 독립의병 부대로 분화, 발전한다. 그리고 이들 의병부대의 활동 때문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까지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 이름 붙은 ‘전라도 의병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고, 전라도는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가 된다. 광주·전남이 ‘의로움의 고장’이라 불리게 된 밑바탕에는 이처럼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삼연은 1851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에서 진사 기봉진의 4남으로 태어난다. 호는 성재(省齋)다.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의 거두인 노사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 뿐 아니라 병서에도 재주가 뛰어나 기정진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기삼연은 기정진의 7촌이 되는 종질(從姪)이었고,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의 삼종숙(三從叔)이기도 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기우만은 1896년 2월 7일(음력) 장성향교에서 거병했다. ‘장성의병’이 그것이다. 장성은 노사학파의 본고장으로, 노사의 손자이며 제자인 기우만의 영향력이 컸다. 이때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300여 의병을 모집했기 때문에 ‘백마장군’이라는 별칭을 얻는다.
나주로 행군한 장성의병은 동년 2월 2일,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거병한 나주의병과 함께 호남 각 읍치를 점거하고 북상하려는 개혁을 세운다. 그러나 전 학부대신 신기선이 사령관 이겸제와 관병 500을 이끌고 와 임금의 해산명령을 전하자, 나주의병에 이어 장성의병마저 해산하고 만다. 이에 기삼연은 “유생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으로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라고 개탄한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한 후 외교권을 빼앗자, 기삼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대낮에도 산짐승이 나타나는 인적이 드문 수연산 기슭 송계마을로 이사한다.
호남창의 회맹소 대장이 되다
수연산에 은거한 기삼연은 날마다 상민 출신의 선머슴들과 술을 마시며 놀았다. 큰 뜻을 품은 선비가 저잣거리에서 술이나 마시며 폐인처럼 행세했던 것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는 위장술이었다. 그는 가슴 속에 ‘인통함원(忍痛含寃)’, 즉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연산 자락으로 이사 후 그는 총을 사 모으고 화약과 실탄을 만들었다. 식량과 의복도 구했다. 종손인 기형도는 총을 보탰고, 형 양연은 무쇠 덩어리를 구해주었으며, 전 군수 이용중은 군자금 900냥을 내놓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자, 기삼연은 장성 수연산 석수암(石水庵)에서 ‘호남창의회맹소’라는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거병한다. 대장에 기삼연, 통령에 김용구, 선봉에 김준(김태원)이, 동요에 등장하는 박도경은 포대(砲隊)에, 전해산은 종사(從事)에 임명된다.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후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백성들의 협력을 촉구하며,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7년 9월, 고창 문수사 전투부터 시작된다. 1907년 12월에는 법성포를 공격, 순사주재소와 일본인 가옥을 불태운다. 세곡을 탈취한 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고, 나머지는 군량미로 사용한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활동은 1908년 1월에도 계속된다. 담양, 장성, 함평 등 여러 읍과 광주의 일본인 농장을 습격했다. 헌병분견소, 세무서, 관청, 일진회원, 일본인 상점, 우편 취급소 등이 주 공격 대상이었다.
재판 없이 광주천에서 총살되다
‘호남창의회맹소’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자, 일본군 광주수비대는 ‘폭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부대를 추격한다. 일군 토벌대에 쫓긴 기삼연은 1월 30일(양력) 300여 의병을 이끌고 담양 금성산성에 들어온다.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큰 비로 노숙하는 의병들의 옷이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담양 주둔 일군의 기습을 받는다.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자, 기삼연 부대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북문을 통해 탈출한다. 순창의 복흥산으로 옮긴 기삼연은 설날을 맞아 의진을 일시 해산하고,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삼연의 계획은 설날 일군에 체포되면서 물거품이 된다.
복흥산에서 의병을 해산한 기삼연은 구수동(九水洞)에 사는 6촌 동생 기구연의 집에 숨어들어 아침 설상을 받는다. 이때 일군 수십 명이 들이닥쳐 기삼연을 찾으며 집주인을 헤치려 하였다. 기우만이 저술한 『호남의사열전』에는 당시의 모습이 다음처럼 서술되어 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음식을 먹으려는데, 적 수십명이 들이닥쳐 수색하였다. 기대장을 내놓으라면서 집주인에게 총칼을 들이댔다. 돌연 성재는 창에서 큰소리를 질렀다. 기대장은 여기 있다. 주인이 무슨 죄냐?”
담양에서 광주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가마를 메고 가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잘 가지 못했다고 한다. 1908년 2월 2일(양력) 설날이었다.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김태원이 담양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장 요시다(吉田...일본 수비대 가와미츠川萬布建 조장과 하야시 상등병)을 죽이고 그 잔졸들을 추격하다 기삼연 대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태원 부대원들이 대장을 구하기 위해 경양역까지 쫓아오지만, 기삼연은 이미 광주헌병대에 수감 된 뒤였다. 일군은 의병들이 기삼연을 구하기 위해 광주헌병대(경무서, 호남의병열전, 확인)를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튿날인 2월 3일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에서 재판 없이 처형하고 만다.
광주 헌병대에 수감 당시 기삼연은 죽음을 직감하고 다음의 절명시를 남긴다.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出師未捷先死)/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이 일찍이 삼키려 했던 ‘해’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광주천에서 쓰러진다. 그가 처형당한 광주천 서천교 밑 백사장은 10년 뒤 ‘조선독립 만세’ 소리로 가득 찬 광주 3·1운동의 발발지가 된다.
기삼연의 시신은 한동안 광주천 백사장에 방치되었다. 며칠 뒤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고 염한 후 서탑등(지금의 광주공원)에 매장하고 ‘호남의병장 기삼연’이라 쓴 목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