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난까이(南海) 해곡 대지진주의보가 어제 해제되었다.
대지진은 포항과 경주 등 한반도 동해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니
양국에게는 다행스런 일이다.
금월 20일은 음력 7월 17일이니 조선개국일인 동시에 고려패망년 623년차이다.
오래된 역사를 작금에 이르러 반추함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구하고자 함이다.
고려패망은 발해의 멸망과는 양상이 다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무신정권과 원의 간섭기 각 100년을 거치며 국력이 쇠퇴화 되어 갔다.
개성왕씨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공민왕이 고려 재건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북경 볼모 생활 속에서 절치부심한 초심은 한 여인(노국공주)의 죽음으로 빛을 잃었다.
백열전구는 수명이 다하면 마지막은 평소보다 밝은 빛을 발한다.
오늘은 1271년 음6월에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여 살해된 삼별초왕 승화후 왕온과 강화 왕비릉 이야기이다.
사진은 고려종족기에서 발췌한 고려고종의 당숙모이자 장모인 희종비 성평왕후와
모친이자 강종비인 원덕태후 그리고 자부이자 원종비인 순경태후의 세계도이다.
모두 평양공(추존 정간왕)의 6세로부터 9세 후손이다.
강종비인 원덕태후 류씨는 종실 신안후 왕성의 차녀인데 외가 성을 따라 류씨라고 하였다.
신안후 왕성은 삼별초군이 왕으로 추대한 진도왕 승화후 왕온의 증조부이다.
그러니까 강종비는 왕온의 고모할머니로 촌수는 4촌간이다.
희종비인 성평왕후 임씨는 강종비의 친조카(3촌)이고
원종비인 순경태후 류씨에게는 강종비가 5촌 종증조 고모할머니가 된다.
몽골 황제를 속이고 원종을 대신하여 왕족으로서 고려 최초의 몽골 볼모가 된
영녕공 왕준은 이후 고국의 하늘을 보지 못했다.
그는 청화후 왕경의 4남 중 3남으로 진도왕 승화후 왕온이 백형이다.
그는 배중손 무인이 주도하는 삼별초군과의 동참은
7종(16촌)형제 지간인 국왕 원종의 왕명에 반(反)하는 행위라며 형님께 읍소하기도 하였다.
배중손은 고려개국공신 태사 배현경의 후손이다.
승화후는 1270.06월 삼별초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1년만에 김방경, 홍다구의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전쟁에서 패하고 외동아들 왕환과 함께
몽골장군 홍다구에 의해 참살(斬殺/목베어 죽임)되었다.
승화는 현재 전주 땅 봉지(封地)라고 한다.
사진은 진도군 의신면 왕온로20-7에 위치한 전(傳) 온왕릉이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승화후가 살해된 후 진도 백성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묘소는 도굴되었고 초기 조성된 장소에서 약간 이동하여 1978년 개축하였다고 한다.
진도문화원(전화 061-542-1109)에 문의하니
2003.05월 이후 매년 양력 5월15일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한다.
진도에 여행 계획이 있으신 종친은 자손과 함께하여 참배하심은 고려사 학습에 일조되리라 본다.
연합군 진영에 영녕공의 여섯 아들 중 장남 신안후 왕옹과 차남 광화후 왕희가 합류하였으니
백부와 사촌에게 칼을 겨눈 셈이다.
고려와 몽골(원)전쟁으로 인한 개성왕씨 집안의 비극에 후손들은 가슴이 아프다.
삼별초 항쟁에 대한 후기 역사학자의 평가는 둘로 나뉘어진다.
왕준의 손자가 신미세보(1991년) 폐간 사유의 정점에 선 광릉후 왕미이다.
종족기를 좀 더 살펴보니
승화후 왕온의 5대조 왕정도 봉작이 승화후(承化候)이며
증조부 왕성과 친조카 왕옹의 봉작도 신안후(信安候)(세보 기준, 종족기는 공)로 동일하다.
왕정의 부친인 왕영의 봉작이 종족기에는 경안후이나 갑신세보(3권 p891)에는 낙랑후로 등재되어 있고
희종비는 갑신세보(3권 P894)에 큰아버지인 계성후 왕항의 딸로 그리고 부친의 휘 또한
영인후 왕진(王禛 /복 받을 진)이나 수권(P308)에 임진(任稹 /치밀할 진)으로 잘못 등재되어 있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5등급으로 이루어지는 오등작은
중국 주나라 봉작제도를 본받아 고려문종이 시행하였다.
왕족, 귀족에게 봉하는 작위 칭호로 공작은 왕족들만이 누릴 수 있고 일반귀족들은 불가하다고 한다.
강종비의 능호는 곤릉으로 강화에 소재한다.
고종의 조부는 19대왕 명종이고 증조부는 17대왕 인종이다.
고종의 부인은 6촌지간인 희종의 딸로 1218년(고종5년) 고종비(안혜왕후)가 되었으며
아들 원종이 즉위하자 안혜태후로 추존되었는데 1232년(고종19년) 6월 승하하였다.
능의 정확한 위치는 알 길 없으나 친정 부친 희종릉(석릉)과 남편 고종의 능(홍릉)이
강화에 위치한 걸로 보아 태후의 능(능호 미상)도 강화로 추정된다.
약 80년 후인 충선왕 2년(1310년)에 원나라 3대 황제 무종(武宗)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무종은 원을 세운 쿠빌라이 칸의 증손이다.
“고인의 공덕을 현창(顯彰/밝게 나타냄)하기 위해서는 추모하는 의례를 거행해야 하는 법이며,
제후에게 봉토(封土/제후로 봉하고 땅을 줌)와 작위를 나누어 주는 일은
천자의 은택(恩澤/은혜와 덕택)을 천하에 반포하는 전장[典章/규칙을 적은 글]에 따른 것이다.
이제 나의 옛 훈신(勳臣/공로있는 신하)에게 보답하기 위해 이 칭호를 내리노라.
고려 국왕 왕장(王璋 : 충선왕)의 증조모 류씨는
이름난 가문의 자손으로 왕가(王家/왕의 집안)의 배필(配匹/배우자)이 되었으며,
우리 원나라가 융성하게 되자 다른 이름 있는 나라들과 함께 신하로 귀부(歸附/스스로 복종함)해왔다.
어질고 밝은 교화(敎化/가르쳐 착한 마음을 갖게 함)를 받아 늘 공평한 마음과
정숙한 몸가짐을 지녔으며, 자손 대대로 지극한 부귀를 누렸다.
대대로 삼한(三韓)의 나라를 지켜나가니 그 지위는 다른 나라의 국왕과 동등하며
그 작위는 우리 종실(宗室/종친)에 버금(맞먹음)간다.
이에 특별히 새로운 은총을 내려 현숙(賢淑/어질고 정숙함)한 영령을 위로하며
고려 왕비로 추봉(推捧/추존/죽은 후에 존호를 올림)하노라.”
조서 속에서 삼한은 고려를 의미한다고 한다.
가릉(순경태후릉)으로부터 약 70m 거리에 도굴된 능내리 석실 고분이 2004년 발견되었다.
형태와 내용으로 보아 왕릉 또는 왕족, 최고위 귀족의 묘로 추정된다고 한다.
혹자는 능내리 석실 고분을 가릉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2006년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고분에서 출토된 청자는
대접과 접시가 대부분이며 원통형 향로도 1점 있다고 한다.
종사에 밝은 왕윤식(안경공 후손) 능참봉은 2021.10.25. 개성왕씨 단톡방에서
능내리 고분을 고종비인 안혜태후릉으로 추정하는 의견을 표하였는데
그 사유는 피장자 유품이 여성용이며 강화 천도가 1232.07월 시행되었으나
옛 국장의 소요기간이 3-6개월인 점을 감안, 6월에 개성에서 승하한 태후의 국장을
강화로 옮겨 장례를 치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1247년 승하한 희종비인 성평왕후릉(소릉)도 위치가 현재 오리무중이다.
슬하에 24대왕인 원종(휘:식)과 안경공 창(개성왕씨 안경공파 파조),수흥궁주 등 2남1녀를 두었다.
고종은 부친 강종이 병환으로 승하하시자 당시 실권자 최충헌의 지지로
22세 나이에 고려 23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고종은 1213년08월부터 1259년06월까지 고려왕중 가장 오랜 46년 재위기간중
안으로는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등 4대에 걸친 무신정권에게 실권을 내어주고
밖으로는 7차례에 걸친 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최우의 강요로 도읍지를
개성에서 강화도(강도)로 천도하고 27년간 항몽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불력으로 몽골의 침입을 저지코자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강화에서
대장경을 완성하니 바로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이다.
유학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몽골전쟁에서 패한 후 왕의 친조(입조)와 태자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講和)가 성립되었고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元)(몽골의 후신)의 속국이 되어
24대왕 원종(원 시호:충경왕), 25대왕 충렬왕, 26대왕 충선왕, 27대왕 충숙왕,
28대왕 충혜왕, 29대왕 충목왕, 30대왕 충정왕, 31대왕 공민왕(1351.10~1374.09 재위)까지
100여 년간 굴욕을 겪었다.
한편, 원나라는 1368년(공민왕18년) 명나라 주원장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과거에 강화홍릉의 홍 한자를 넓을 홍(弘)으로 잘못 사용되는 사례가 있었다.
클 홍(洪)이 맞다.
弘陵은 조선영조비 정성왕후 능호이디.
조선고종의 능도 고려고종의 능호와 동일한 洪陵이므로 구분하기 위해
2011년 정부고시에 의거 남양주홍릉이라 달리 부른다.
개성왕씨파계도에서
양양공파조 왕서는 안경공파조 왕창의 종조부(從祖父)로서 촌수는 6촌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