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해 딸 부부와 손자가 병원 생활에 지친 나를 위한 나들이를 제안했다. 제주도에 도착 후 펜션 에 짐을 풀고는 잠간 휴식을 취한 후 렌터카로 사위가 직접 좋은 곳을 찾아 나섰다. 바다 냄새를 등에 업은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반긴다. 유리 조각 공원을 둘러보고 손자와 함께 조랑말에 올라 몇 바퀴 도는 것으로 첫날의 제주탐방을 끝내고 특산물인 갈치 조림으로 식사를 한 다음 숙소로 돌아가 쌓인 피로를 풀었다.
둘째 날은 성산 일출봉 앞에 멈췄다. 높은 산도 아니건만 그 당시 나의 몸 상태로는 까마득한 높이였다.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일출봉이 한라산으로 보였다. 딸이 “어머니 봉에 오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요.”라고 말했다. 한번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았다. “아니다. 오늘 내 척추가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해 봐야겠다. 오르다 안 되면 항복할 테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 556개의 나무 계단이 지그재그로 정상까지 연결되어 있다.
손자가 “할머니 신” 하며 나를 본다. 내가 신고 있는 신이 운동화가 아니고 구두였다. 떠나올 때 일출봉 정상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일이라 평소에 편하게 신는 신이어서 그대로 왔던 것이다. 잠깐 생각하다 나는 신을 벗었다. 한 계단, 한 계단이 조심스러웠다.
딸의 손을 잡고 20계단쯤 오르니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난간에 기대어 쉬면서 결국 안 되는 건가하고 생각하니 서글펐다.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숨을 할딱이면서 신나게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이마에는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지친 기색 없이 위를 한번 쳐다보고 할머니 한번 바라보며,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저렇게 어린아이도 오르는 길을 내가 허리 좀 아프다고 포기를 하다니, 부끄러웠다. 다시 용기를 내었다. 쉬다 가다를 하다 보니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결국엔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몸은 성산 일출봉에, 느낌은 한라산 정상에 섰다. 부드러운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은 분화구 너머로 아름다운 제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상까지 182m의 높이가 1820m로 느껴져 어깨를 토닥토닥, ‘잘했어, 참 잘했어’
탁 트인 넓은 분화구를 돌아 나를 휘감아버리는 제주 바다의 바람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끔찍했던 일들을 생각나게 했다. 2014년 여름날 늦은 오후, 청천 벽력같은 비보를 들었다. 오래전 부모님 모두 떠나시고 피붙이로 하나 남은 오빠가 떠났다고 한다. 억장이 무너졌다. 지병도 없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어인 까닭일까? 주섬주섬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고는 화장실에 갔다 나오면서 마음이 앞선 탓이었을까 그만 타일 바닥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악’ 하는 비명밖에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 폰 에서 벨이 울렸다. 가까이 떨어져 있었기에 겨우 전화를 받을 수가 있었다. 곧 딸이 달려와 119를 불렀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여 대원 한분이 등을 대고, 또 한분이 나를 뒤에서 안아 일으켜 업혀나갔고, 구급차에 실렸다.
구급차가 멈춘 곳은 수영구 센텀 병원 이였다. 바로 MRI 촬영에 들어갔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진단결과 1번 요추 골절이라고 한다. 병원 측의 권유대로 맞춤형 척추 보호대를 차고 입원을 하였다. 숨을 쉬기도, 팔다리 모두를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결국, 오빠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못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주치의가 회진을 왔다. 수술을 받아야 하겠냐는 딸의 질문에, 아무래도 시술을 받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의사가 나가고 간호사가 들어와 시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피부를 열지 않고 골절된 척추 사이에 주삿바늘로 시멘트를 주입하여 척추를 단단하게 잡아준다고 말했다.
부분 마취를 하고 시술을 시작했다. 찌~익 하고 뼛속으로 뭔가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시술 후에도 20일을 더 입원실에 있게 되었고, 퇴원 후에는 척추보호 장비를 한 채 딸아이 집으로 가서, 두 달 더 요양한 후 혼자서 화장실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니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 내 집에는 침대가 없었기에 잠을 자기 위해 바닥에 몸을 눕힐 때 따르는 고통이 너무나 심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켜야 할 때는 더한 아픔이 따른다. 옆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서 손으로 바닥을 짚은 다음 조금씩 기어가서 의자를 잡고 한쪽 무릎을 세운 다음 천천히 몸을 일으켜야 한다.
일어나는 데만 걸리는 시간이 10분은 족히 걸렸다. 이를 악물었으나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온몸이 계절과는 상관없이 땀에 절어버린다. 그러자니, 내 존재의 가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우울증이 날로 심하여져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내과에서 처방받은 수면제(졸피람)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 때 반 알씩만 먹으라고 하였다. 하루는 약을 먹고 누웠는데 쉽게 잠이 들지 않고 목이 말라 일어나다 그대로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또다시 입원하였다. 이번에는 요추 3번이 골절되었다고 했다. 주치의 말이 척추에 시멘트삽입 시술을 하면 위에 있는 뼈가 약해져 조그만 충격에도 골절이 쉽게 된다고 한다. 그런 데다 골다공증이 매우 심각한 상태라고도 하였다. 6개월 만에 요추 두 대를 꺾어버렸다. 또다시 보호대에 의존했다. 두 번째는 위험하여 더는 시술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정도 되니, 꽤 강인하다고 믿고 있었던 나의 정신력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또다시 짐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퇴원 후 아이들의 반대에도 나는 집으로 왔다. 홀로서기에 들어갔다. 열심히 병원엘 다니면서 물리치료도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프다는 핑계로 걷지 않으면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기에 버티어 내었다.
일 년을 고통과 전쟁을 치르다 보니 어느새 걸음걸이도 좋아졌고, 허리통증도 완화되었다. 서서히 나의 홀로서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한시름 놓은 듯해 보일 때 아이들이 제주여행을 권하였다. 어미의 삭아버린 몸과 마음을 보듬고자 한 딸의 배려였다. 썩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러자고 하였다.
하산할 때도 맨발이었다. 산을 내려온 다음 잠깐 쉬느라 그늘 좋은 곳에 모여앉아 음료수로 땀을 식혔다, 손자가 내 발에 묻은 오물들을 털어내며 발 마사지를 해 주었다. 내내 들고 다니던 신을 내어주며, “할머니 힘드셨지요, 할머니의 도전정신을 본받겠습니다.” "그래, 모두 고맙구나. 너희들이 있었기에 나의 오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허리가 좀 심하게 아프긴 하구다". 하며 웃어 보였다.
어찌 보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 몸으로 정상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여 이 세상에 뿌려진 씨앗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왕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된 이상은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누구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인생길에 포장도로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가다 보면 비포장도로도 만날 것이며, 유리조각도, 돌무더기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이 무서워 뒤로 물러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가족이나 이웃에게 폐만 끼치며 살아야 한다. 내가 허리가 끊어지고 무릎이 꺾이는 아픔을 참아내며 기어이 정상에 오른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몸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정신만은 지켜야 하겠기에 나는 계속 움직일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편하기만 한 것에 길들여지면 곧 폐인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손해 보는 인생인가. 재수가 없으면 밥만 축내면서 100수를 누릴 수도 있다고 한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맨발로 하산하던 나의 모습을 딸이 카메라에 담아주었었다. 집으로 와 컴퓨터에 옮겨 인쇄한 사진을 벽에 걸어두었다. 언제든 나의 정신력이 해이(解弛)해지고 개으름이 근접해 오면 그날을 회상하며 용기를 얻기 위함이다.
첫댓글 멋지세요
그리고 존경합니다^^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답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낙엽이 붉게 물들어 가는 계절이 왔습니다. 찬바람에 감기 조심 하십시요. 감사 합니다.
다녀가심 감사드립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감기, 코로나 조심! 또 조심!
오늘 하루도 데이빗 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들 이루어 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