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奉呈杜僕射(봉정두복야)
- 두복야에게 드림
北 去 同 甘 苦 (북거동감고) 북으로 가서 고락을 함께 했고
東 來 共 死 生 (동래공사생) 동으로 와서 생사를 함께 했소
城 南 他 夜 月 (성남타야월) 성의 남쪽 타국 땅의 달빛아래
今 日 一 盃 情 (금일일배정) 오늘 한잔 술로 정을 나눕니다
(감 상)
시의 제목 앞 부분에 '奉呈'이라는 표현으로 보아서, 상대방에 대한 각별한
존경심이 들어 있다. 장군의 시들 중에는 그 시를 받는 분을 특정하고 나서
제목을 정한 시들이 몇편 있는데, 대체로 앞에는 贈자를 쓰고 다음에 姓과
직함을 쓰고 나서 마지막에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
贈金中軍士明 (증김중군사명) - 중군 김사명에게 드림
贈別宣水使居怡 (증별선수사거이) - 수사 선거이를 작별하며 드림
和陳都督璘韻 (화진도독린운) - 진린 도독의 운자에 화답함
그런데, 이 시에서는 贈대신에 奉呈을 쓰면서, 직함 뒤에 이름을 넣지 않았다.
상대방을 예우하는 마음이 더욱 독실해 보인다. 杜복야는 杜師忠 또는 杜思忠
이라고 하는 분으로 명나라 두릉(杜陵) 출신이며, 시성(詩聖) 두보의 21대손이
라고 한다.
일찌기 명(明)나라에서 裨將僕射門下主簿(비장복야문하주부)라고 하는 벼슬을
지냈기에 '두복야(杜僕射)' 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두사충 선생은 이여송과 함께
전란 초기에 조선에 들어 와서 육전에서 전공을 세웠다가 귀국 후에, 매부(妹夫)
진린을 따라 와 수군으로 다시 종군하면서, 이순신 장군과 가까워졌으며 풍수와
지리에 밝았기에, 전장터를 골라서 적에 대해 지리적인 우위(優位) 확보에 기여
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께서 순국하여 아산에 묘소를 정할 때 이 두사충 선생이 직접 묘터를
잡아주기까지 하였다. 전란 후에, 명나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大邱)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고 있다.
詩의 분위기가 앞에서 소개한 선거이 수사와의 전별시와 대동소이하다. 두 시의
운자도 모두가 生과 情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 많지 않은 이순신 장군의 시들 중
에서 역시 따뜻한 인간미(人間味)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