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사 [ 文殊寺 ]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文殊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누가 창건
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절이 자리한 문수산은
신라와 고려 때는 영취산(靈鷲山) 또는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였다.
면 이름 청량면은 바로 아 청량산에서 유래하였다.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 《범우고
(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984년 신격호(辛格浩)의 시주로 대웅전을 중창하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범종각·산신각·종무소·요사채 등이 있다. 산신각 뒤에 화강암으로
제단을 쌓고 모신 대형 불상이 있다.
《삼국유사》 권5 〈연회도명문수점〉편에 문수보살과 변재천녀(辨財天女)에 얽힌 설화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연회라는 승려가 이 절에서 매일 《묘법연화경》을 읽자 연못에 있는
연꽃이 사시사철 시들지 않았다. 이에 원성왕이 신기하게 여겨 연회를 국사(國師)로 초빙
하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연회는 서쪽 고개 너머로 달아났다. 그가 고개를 넘자 밭을
갈던 한 노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라에서 벼슬을 주어 나를 매어 두려고
하므로 피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노인은 ‘수고롭게 멀리 갈 필요가 있느냐?’라고 되물
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5리쯤 더 가다가 이번에는 시냇가에서 노파를 만났다. 노파도
그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앞서 노인에게 한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러자 노파는 ‘앞에
만났던 노인은 문수대성(文殊大聖)인데 왜 그 말을 듣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연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급히 돌아왔다. 뒤에 연회는 궁궐에 들어가 국사가 되어 많은
일을 하였다. 당시 연회가 만났던 노인은 문수보살이고, 노파는 변재천녀였다고 한다.
그래서 연회가 넘었던 고개를 문수고개, 변재천녀를 만난 곳을 아니고개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또 무거(無去)설화도 전한다. 경순왕이 나라의 장래를 문수보살에게 계시받고자
두 왕자와 함께 문수사로 가는 길에 동자승을 만났는데, 동자승이 왕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이에 문수대성에게 계시를 받고자 한다고 하였다. 동자승은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서갔다. 일행이 태화강을 건너자 갑자기 동자승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에 경순왕은 하늘이
자신을 져버린다고 탄식하며 환궁하여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동자승이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고 하고, 왕이 탄식한 곳을 헐수정이라고 한다.
특징
이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극락전이다. 이 건물이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청하스님이 주지로 들어와 이 절이 본격적으로 중창을 하기 시작한 때는
1982년이지만, 극락전은 그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건물은 고풍을 풍기고는 있지만 규모 면에서 주위의 대웅전보다 너무 작아 오히려 초라한 느낌마저 준다. 극락전 옆에는 자그마한 3층석탑이 있다. 이 탑신의 특징은 1층이 긴데 비해 2, 3층은 짧아 탑이
상승하는 느낌은 있지만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낙수가 급하고 끝에는 풍경을 단 구멍이 있다. 1,2 층 기단사이에 돌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극락전을 돌아 오르면 미륵전이 있다. 이곳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병풍 암석에 붙어 있는 돌부처인데, 형체가 너무 파괴되어 그 원형을 유추하는 것마저 힘들 정도이다. 당초 이 돌부처는 청송사탑 인근에 있던 것을 청하스님이 발견해 이곳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 돌부처 옆에는 최근 만들어진 약사여래상이 있다. 연꽃 위에 앉아 약병을 들고 점잖게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지만 최근에 만들어져 옛 맛이 없는 것이 흠이다.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지었다는 대웅전은 모습부터가 아름답다. 1982년에 신축된 대웅전은 밑에 돌을 3단으로 바친 뒤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았는데 사방 돌계단에 새겨넣은 연꽃 무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는데 이 자리는 옛날부터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였다.
유래
문수사를 찾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석탑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락전 옆의 3층 석탑은 이 사찰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문수사가 창건될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절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석탑이 있다. 그런데 문수사에는 탑이 없다는
것은 문수사 인근의 망해사·영취사·청송사지에 아직 탑이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청하스님은 문수사에 원래 탑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옛날에는
탑이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하스님은 현재 이 절의
산신각 석벽 쪽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옛날에는 탑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탑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문수사는 신라 원성왕때(789∼798) 연회국사가 창건했다. 기록에는 문수산 아래 영취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이 절 주위 토굴에서 큰스님이 숨어살면서 보행을 닦고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원성왕이 신기하게 생각하고 연회스님을 청해 국사로 봉하려고 했다.
그러자 연회스님은 국사가 되는 것이 싫어 암자를 등지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연회
스님은 길을 가다 한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연회가 농부에게 자신이 암자를 떠나는
이유를 밝히자 농부는 연회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나무랐다. 연회는 농부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는데 이번에는 변재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번재
처녀도 연회가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떠나는 것을 말리는 것이었다. 이때 연회는 처음 만난
농부가 문수보살임을 깨닫고 가던 길을 돌아서 농부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 문수암이라는
암자를 지어 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변재처녀를 만났던 곳에는 보현암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수사 창건 설화를 보면 문수사가 지어진 당위성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문수사
창건에는 다른 얘기도 있다. 일부 기록은 문수사를 지은 스님이 연회국사가 아니고 자장
율사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중국을 다녀온 자장율사가 울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문수산의
모습이 너무 깨끗하고 성스러울 뿐 아니라 스님이 중국에 머물렀던 청량산과 너무 닮아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약사여래상
동전이 수없이 바위에 붙어있다.
문댐돌-소원을 빌고 문댐돌을 문지르면 문댐돌이 멈춘다는 전설이다. 실제 문대면 뻑뻑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아주 어울리지 않는 삼층석탑이 명부전 옆에 세워져 있다. 작은 규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