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역사를 품다 13> - 《시조21》2024. 가을호 연재
삼국유사, 어떻게 만날까
김덕남
버스는 부산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현장실습을 가는 날은 언제나 설레면서도 기대 만발이다. 창밖을 휙휙 지나가는 정경에 눈길을 준다. 헐겁고 느슨한 시간을 원했으나 일정은 빡빡하고 시간은 촘촘하다. 영천을 지나자 낮게 깔린 초여름 안개가 산 쪽으로 물러갔다. 달은 빛을 잃어가고 아침 햇살이 차창으로 쏟아진다. 눈을 감으니 눈꺼풀 속으로 해가 들어오는지 온천지가 붉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갖고 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요즘은 왜 이렇게 하나씩 빼먹을까. 이러다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목적지인 인각사가 가까워지자 거울을 꺼내 나를 비춰본다. 여기저기 안전띠 푸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인각사로구나. 일연스님을 가까이 뵙기나 하는 듯 마음이 설렌다.
길은 절 안마당으로 천천히 끌려간다
여태 잠들지 않은 붉은 베옷의 선사
붓 씻어 / 말리는 소리 / 학소대에 닿는다
- 이정환 「인각사」 전문
“붓 씻어 / 말리는 소리 / 학소대에 닿는” 절벽에 눈이 먼저 간다. 물 맑은 위천 위로 펼쳐진 바위병풍이 위풍당당하다. 절벽에 일획을 그으며 두루미가 날아간다. 이 학소대에 기린麒麟의 뿔[角]을 얹었다고 전한다. 맞은 편에 절을 세우니 바로 인각사麟角寺다. 이 기린은 실제의 기린이 아니고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 즉 어진 사람이 나타날 증표라는 뜻으로 신라 선덕여왕 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기록도 함께 있다.
2020년, 범어사가 소장하고 있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5’가 보물에서 국보 제306-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에 부산 금정문화원에서는 2022년~2023년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으로 매 5개월 과정으로 ‘삼국유사 이야기 해설사과정’을 개설하였다. 강사는 정형진 신라얼문화연구원장이다. 문화품앗이로 개설하였기에 당일 수강 후에는 문화해설을 위한 ‘나만의 해설 매뉴얼’을 만들어 제출하고 매 4주째는 현장실습을 간다. 과정을 수료하는 마지막 날은 예비해설사로서 직접 문화체육관광부와 금정문화원 관계자 앞에서 해설 시연과 질의응답도 해야 했기에 다소 부담은 있었지만 공부할수록 빠져들기 시작했다.
『삼국유사』는 일연스님(一然,1206~1289)이 찬술하고 제자 무극스님(無極, 1251~1322)이 간행한 고대 역사서로 전 5권 2책, 9편이다. 고대 사회의 역사, 풍속, 종교, 문학, 예술, 언어 등이 기록되어 있다. 범어사 소장본은 권4~5를 1책으로 묶은 조선 초기본이다. 소장본 권5 머리말에 쓰인 ‘국존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원경중조대선사일연선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기록을 통해 일연스님이 찬술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범어사 소장본은 일제강점기 불교개혁 운동과 항일운동 및 교육활동을 전개한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스님이 광무 11년(1907)에 확보하여 소장하다가 범어사에 기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 유리벽 안에 보존 전시하고 있다.
오늘, 나는 부산 금정문화원에서 개설한 ‘삼국유사 이야기 해설사과정’ 현장실습 차 그 산실을 찾아왔다. 인각사 절 마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규모에 비해 소박하면서 다소 황량한 느낌이다. 안내판 너머로 넓은 마당에 인각사지를 발굴한 수많은 출토 부재들이 놓여있다. 둥근 기초석, 사각 모양의 석물, 긴 난간석, 홈이 파진 돌확에 세월의 더께가 돌꽃으로 피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출토물 부재 옆에 앉아 잠시 눈을 감는다. 여기 남은 부재로 기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는다. 지붕을 올리고 용마루를 놓고 치미도 올린다. 댕그랑 풍경이 울자 나는 꿇어앉아 먹을 갈고 일연스님은 붓을 든다.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신비하고 특이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하듯 써나가는 일연스님의 붓 스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단단한 시간이 얼멍덜멍 살을 내렸다
살아서는 이끼로 죽어서는 꽃으로 사는
천년의 세월을 건너 켜켜이 쌓인 내력
얼룩진 물확 위에 피어난 태고의 꿈
이울어가는 한 시절 속절없이 삼켰을
탈색된 야윈 숨소리 서녘 하늘 물들인다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눈물로 새긴 걸까
노을 담고 파르르 떠는 돌꽃의 어깨를
화엄의 범종 소리가 토닥토닥 다독인다
- 김나비 「돌꽃, 시간을 탁본하다 – 천년고찰에서」 전문
순간 눈을 뜨니 일행은 보각국사 비각 앞에 잔뜩 몰려 있다.
비각에 모셔진 보각국사비는 응회암으로 앞뒷면이 떨어져 나가고 두 조각으로 깨어져 비석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돌조각으로 남아있다. 비는 충렬왕21년(1295년)에 왕명에 의해 일연스님의 제자인 무극(청분淸玢)이 지어 올린 행장을 바탕으로 문장가 민지閔漬가 비문을 짓고 문인인 죽허竹虛가 왕희지 글씨체를 찾아 모아 만들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비문 앞면은 일연스님의 발자취와 추모의 정을 담고 뒷면은 비를 세우게 된 과정과 제자 이름을 새겼다. 애초 4,000여 자였으나 지금 160여 자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맨눈으로 판독하기가 어렵다. 왕희지의 글씨체를 얻기 위해 많은 사람이 탁본하였고, 글씨 조각을 떼 품으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속설이 있어 비석은 수난을 면치 못했다. 정유재란(1597년) 시 겨울이다. 왜군들이 탁본을 위해 불에 달구어 땅에 엎어놓은 채 방치하여 비석이 깨지고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처참한 모습이다. 일연스님의 삭정이 같은 뼈대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린다. 탁본이 남아있어 그나마 스님의 생애를 짚어 볼 수 있다.
일연은 경산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김견명이다. 법명은 일연, 입적 후 보각이란 시호를 받았다. 9세에 광주 무량사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 받고 22세에 승과 합격하고 비슬산 대견사 등에서 수행하다 41세에 선사의 법계를 제수받았다. 44세에 무신 집권자 최우(후에 최이로 개명)의 처남인 정안의 초청으로 남해 정림사에서 대장경 경판 불사에 참여한다. 정안이 최우의 아들인 최항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남해 길상암으로 옮겼다. 54세에 대선사를 제수받았다. 원종 2년(1261) 무신정권이 끝나면서 당시 수도인 강화도 선월사와 포항 오어사, 비슬산 인흥사, 경주 행재소를 거쳐 63세에 왕명으로 운해사에서 대장경 낙성법회를 봉행하였다. 72세에 청도 운문사, 77세에 개경 광명사로, 78세에는 국존으로 책봉되고 다시 운문사로 내려왔다. 79세에 인각사로 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나 1년 후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5년 후 삼국유사 집필을 완성하고 84세에 입적하셨다.
일연스님이 살았던 13세기는 무신정권, 몽골의 침략, 원에 복속된 시기였다. 몽골은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 11회에 걸친 침략과 퇴각을 반복하여 고려인들의 삶은 전쟁의 공포 도가니 그 자체였다. 스님은 전국 사찰을 두루 주석하면서 피폐해진 국토와 헐벗고 굶주린 백성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운문사에서 삼국유사 자료를 정리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인각사에서 본격 집필에 들어가 1289년에 완성을 보았다. 그야말로 발과 가슴으로 써 내려간 무엇보다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 간행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고, 1512년 경주부사 이계복이 발행한 정덕본正德本이 완질로 남아있었다. 임진왜란 시 도꾸가와 이에야스 손에 들어가 천황에게도 빌려는 줄지언정 그냥 주지는 않을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빌려준 목록도 일일이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는 400년 동안 잊혀진 책이었다.
그러던 중 1904년 일본은 『삼국유사』를 출판하였다. “최남선은 일본에서 간행된 『삼국유사』를 가져다 《계명》 제18호에 실어 널리 보급시켰다. 최남선에 의해 415년 만에 ‘백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어려운 진서’ 『삼국유사』가 빛을 보게 되었다.”(『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저자 고운기, 현암사 2009년)
최남선은 삼국사기는 정사요, 삼국유사는 야사라 말하면서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삼국유사를 선택하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의 햇살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보각국사비 옆의 보각국사탑 앞에 섰다. 상대석과 하대석이 팔각이나 원형에 가깝고 2단으로 이루어진 몸돌과 지붕돌이 있다. 몸돌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란 탑의 이름이 있다. 각 층에는 연꽃과 사천왕입상, 보살상이 희미하나마 보인다. 추녀를 살짝 올린 지붕돌이 천년세월을 지키고 있다. 단조로우면서도 아늑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한참이나 머물렀다. 바닥에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토기의 파편이 몇 개 눈에 띈다.
탑이 이 자리로 옮겨지기 전에는 해가 뜰 때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능골의 어머니 묘소를 비추었다고 한다. 죽어서도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애틋하게 전해온다. 『삼국유사』 마지막을 ‘효선孝善편’으로 장식한 것도 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일연스님의 사리와 영혼이 여기에 계신다고 생각하니 옷깃이 여며진다.
바로 옆의 석불좌상은 눈코입을 다 버렸다. 없는 눈, 없는 코로 세상 보며 숨을 쉰다. 이제 본래로 돌아가고 있는 석불을 앞에 두고 내 눈코입을 만져본다. 언젠가는 다 없어질….
비와 탑을 둘러보고 돌아서니 후대에 새로 짓고 중수한 작은 규모의 극락전, 미륵당, 산령각, 국사전 등이 보인다. 국사전은 ‘일연스님 생애관’으로 스님의 영정과 일대기, 비석 탁본, 향가 「찬기파랑가」가 전시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없는 우리 민족의 상고사, 즉 고조선과 단군의 존재, 발해와 부여, 가락국의 역대 왕력, 향가 14수 등을 소개하고 수많은 설화와 신화를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김부식(1075~1151) 등 여러 사관에 의해 저술되어 체제나 문장이 정제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삼국유사』는 일연스님 한 사람에 의해 신화나 설화 형식으로 자유롭게 기술하여 읽을수록 재미를 더한다.
특히 한자의 음(소리)과 훈(새김)을 빌려 표기한 향가 14수는 시조의 모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을 어디에도 비할 바 없다. 향가는 신라시대 우리말 표기법인 향찰로 쓰인 시가이다. 대체로 주술신앙, 불교신앙, 밀교신앙을 바탕으로 그 시대의 재난이나 불안, 고뇌 등을 극복한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노래했다. 그 뜻이 매우 깊고 표현이 아름답고 맑다. 「도솔가」와 「혜성가」는 주술신앙의 아름다움을, 「제망매가」 「원왕생가」 「안민가」 「천수대비가」는 불교신앙을 바탕으로 간절한 기원을, 「풍요」 「모죽지랑가」 「찬기파랑가」 「원가」는 비극의 절절함이, 「우적가」 「처용가」는 익살로 세상을 바로 잡겠다는 해학이, 「서동요」와 「헌화가」는 우리의 가슴에 웃음을 던지는 훈훈함이 있다. 읽을수록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맑아진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어디 가서 서동과 선화의 국경을 넘는 사랑과 수로와 허황옥의 국제결혼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원효와 요석의 성속을 넘어선 사랑이나 처용의 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으며, 누이의 죽음을 한탄하고 그리워하는 월명사의 절절한 아픔을 가슴에 새길 수 있으랴. K문화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것도 이런 스토리텔링을 가진 우리 민족의 DNA를 물려받았음이 아니겠는가.
세상 힘든 길이 마음의 짐 지는 걸까
용서하고 잊기 위해 절집 찾은 어느 하루
바람이 등 뒤로 와서 / 내 어깨를 다독인다
법당 앞 배롱나무 자다 깨다 듣는 설법
울울한 시간 두고 써 내려간 이치대로
가슴에 불씨 하나를 / 촛불처럼 밝힌다
- 김용주 「인각사」 전문
일연스님은 사기史記가 아닌 유사遺事를 남겼다. 후대인들이 읽으라고 남긴 스님의 유언집遺言集이 아닐까. 숙연한 감정을 넘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위대한 유산遺産을 물려받았다. 삼국유사의 ‘삼’은 단순한 숫자의 ‘삼’이 아니었다. 삼라만상의 ‘삼’처럼 많은 것을 두루두루 담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왕력편’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 외에 ‘기이편’에서는 고조선(단군, 위만, 기자), 마한, 진한, 변한, 부여, 발해, 이서국, 낙랑국, 대방, 말갈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를 반만년으로 끌어올렸다. 종교문화의 뿌리나 풍류도, 시가를 이해할 단서가 여기에 다 있다. 스님은 종교 지도자요, 역사가요, 서민을 사랑한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삼국유사』는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과 상상력을 키워주는 인문학서요 역사서다. “가슴에 불씨 하나를 / 촛불처럼” 밝힌 ‘삼국유사 이야기 해설사’ 과정을 공부한 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이 과정을 개설해 준 금정문화원에 감사드린다.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현대시조100인선『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시조21》2024.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