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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과비평작가회의 원문보기 글쓴이: 홍윤선
【수필가가 주목한 수필집⑦】 임철호 《길 위의 정원》(2020, 에세이스트)
읽히는 수필집의 키워드 / 백남오
1.특별한 체험의 서사
임철호의 수필집 《길 위의 정원》(2020, 에세이스트) 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나의 현실적 삶이 고달파 눈물이 나는가 싶어 참으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수필집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도 없었다.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사람이란 것이 얼마나 모질고 독한 존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가냘픈 민초들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요즘은 수필집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 십 권의 책이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배달되어 오는 책들을 모두 읽기란 역부족이다. 이런 현실에서 임철호의 수필집은 단번에 독파했을 뿐만 아니라, 한없는 눈물까지 흐르게 했으니 특별한 경우가 아닐 수가 없다. 이건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도대체 그 힘이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읽히는 수필집의 근본적인 키워드를 살펴보고자 한다. 분명 거기에는 감추어진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인이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또한 수필공부의 핵심이란 생각도 든다. 다음 작품의 한 부분을 보자.
1948년 10월 여수. 순천반란 사건이 일어났고, 당시에 나의 아버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셨다. 내 나이 두 살 때였다. 그 참척의 고통을 할아버지가 어찌 견디셨을까. 확실한 것은 이듬해 어머니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다.
-수필〈느림의 시간 속으로〉 부분
구례 전역에서 무려 8백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토벌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교육자인 나의 아버지도 이런 와중에 날벼락 같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수필〈향연〉 부분
그냥 멍 할 뿐이다. 팩트를 정리해 보자면, 화자의 아버지는 총살당했고, 그때 나이는 두 살이고, 젊디젊은 어머니는 이듬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총살이라는 말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이야기란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현실 앞에 그냥 먹먹하기만 하다.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돌이켜보니 이것은 우리민족의 역사이고, 그런 불행을 딛고 화자가 살아온 구체적인 현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런 냉혹한 현실을 당하고도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절망적인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그가 헤쳐 나온 70년의 세월이 마냥 궁금해진다. 다행이도 그에게는 심지 굳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야말로 화자에게는 구원의 대상이었으며 부모의 역할을 대신 하였다. 할아버지는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하늘같은 분이다. 다음 글을 보자.
백운산 자락 가난한 산골 출신인 할아버지는 한 번도 당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발설한 적이 없었다. 증조부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천애고아가 되어버린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혼인을 해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집 한 칸,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아버지가 열 살, 작은아버지가 네 살 무렵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버텨 내다가 막다른 길목에서 운명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바로 일본행이었다. 서둘러 재혼을 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하동포구에서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탔다. 일본 시모노세키 항구를 거쳐 미야자키 현으로 가서 기와공장에 일자리를 구하고 정착하였다.
-수필〈할아버지 나뭇길〉 부분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일자무식인 채 친척집이나 남의 집을 전전하며 연명했다가 결혼했고 아들 둘을 낳았으나 아내는 젖먹이를 남겨둔 채 저세상으로 떠났다. 죽음을 무릅쓴 삶의 혁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벼랑에서 뛰어내리듯 일생일대의 모험이 식솔들을 이끌고 아는 이도 없고 언어도 낯선 일본행이었다. 그곳에서 모진 설움을 참아내며 닥치는 대로 험한 일을 했다. 가난과 궁핍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사무친 각오로 죽을힘을 다하여 돈을 벌었다. 그 절망의 끝에서 찾아낸 희망의 땅이 바로 일본 미야자키라는 곳이었다. 결국 고향 땅에 땅뙈기를 마련할 만큼의 돈을 벌어서 돌아왔다. 그렇게 두 아들을 최고학부까지 공부를 시키며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에서 사셨다. 일본의 소학교에 입학한 두 아들은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다. 특히 큰아들인 화자의 아버지는 머리가 명석하고 예의도 발랐으며, 학교행사 때마다 기수로 뽑혀 맨 앞에서 행렬을 선도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농업학교를 마치고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해 졸업 후에는 경상남도 창녕군에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4년여 근무를 하고 해방이 되던 해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구례군 지리산 성삼재 밑의 중동초등학교로 전근을 했다. 당시 그곳은 여순반란 사건의 여진이 멈추지 않았고 화자의 아버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하루아침에 금쪽같은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의 일생은 참척의 철천지한으로 옭아매어지고만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까지도 하게 되는 것이다. 화자의 할머니는 두 분이다. 친할머니는 화자의 아버지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계조모는 당신의 소생을 두지 못한 채, 화자의 아버지 형제를 키웠고 또 화자의 삼남매를 기르셨다. 화자는 태어난 순간부터 계조모 밑에서 성장하게 된다. 계조모가 어떤 성품의 사람이었는지 다음 글을 한번보자.
①나는 네댓 살쯤 되었을 무렵까지 자다가 오줌을 싸는 일이 많았다. 지금처럼 화장실이 방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헛간에 변소가 있어서 깜깜한 밤에 가기는 무서웠다. 게다가 그때는 김치 같은 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라 물을 많이 들이켜서 더 그랬을 것이다. 또 누가 챙겨주지 않아서 소변가리기가 늦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줌을 싼 날 아침이면 할머니는 가차 없이 내게 키를 뒤집어 씌우고 소금을 얻어오라면서 옆집으로 내몰았다.
-수필〈회억〉 부분
②“철아야! 무명 밭에 가서 무명 대 걷어 오니라이잉~.”
땔감이 귀하던 시절이라,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서 햇볕에 바짝 말라 수들수들해진 고춧대나 목화 대는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할머니의 음성은 늘 가냘프면서도 가슬했다. 어린 나는 싫다는 말 한마디 않고 밭으로 나가 무명 대를 걷어다가 나뭇간에 쌓아두곤 했다. <중략>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그래선지 심부름이나 마루 청소 등 소소한 허드렛일은 다 내 차지였다. 계절마다 심부름의 종류도 다양했다. 보리 베기가 한창인 초여름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쿠리를 내게 건네셨다.
“철아야! 수박, 오이 사줄텡게 얼른 논에 가서 보리이삭 주워 오니라이~잉.”
보리 까끄라기는 사나워 자칫하면 손을 베이고 설핏 찔려도 피가 났다. 유월의 땡볕은 따가웠고 나는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도록 열심히 이삭을 주웠다.
-수필〈철아야!〉 부분
계조모는 당신의 소생을 두지 못한 탓일까. 사랑을 주는 방법이 매우 서툴렀다. 인용문 ①은 화자의 유년기 이야기다. 어린아이의 야뇨증은 애정결핍에서 온다는 전문가의 견해가 있다. 어머니가 없는 화자에게 할머니마저도 따뜻한 사랑을 주지 않았으니 애정결핍증이 온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린 화자가 오줌을 싸면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에다 소금을 뿌리며 내쫒았으니 어린 마음의 상처는 쌓여만 갔을 것이다. 자신감과 당당함을 잃고 남들 앞에 떳떳하게 서지 못하는 못난이가 되었을 것이며, 그 피해망상증을 평생 극복하기가 어려운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지금도 “제삿날이면 할머니를 그리워하기보다 쓸쓸한 아픔이 도지곤 한다〈회억〉”고 술회한다. 인용 작품②는 청소년기에 할머니가 화자를 괴롭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도 화자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악착같이 이삭을 주워 담는다. 땀범벅이 된 몸에 까끄라기가 달라붙으면 어리고 여린 살은 무척이나 쓰라렸다고 회고한다. 더구나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도 할머니의 구박 때문이라는 말을 친지들로부터 들었을 때는 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을 더욱 풀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모두가 배고픈 그런 시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타고난 천성이 악독해서였을까. 참으로 고약한 할머니가 아닐 수가 없다.
2. 내면깊이 파고드는 문체의 힘
이제 화자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꿈이자 훨훨 장부이고 수재였던 아버지는 왜 총살이라는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을까 그 구체적인 사연이 궁금하기만 하다. 다음 글을 보자.
1948년 11월5일 토별대로 참전한 국군 12연대 예하의 1개 대대 병력이 남원에서 구례 산동으로 이동하던 중 매복 중이던 반란군들의 습격을 받아 차량 14대가 전소하고 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전사하였다. 후속 지휘관으로 백인엽 중령이 파견되었다. 신임지휘관은 전임지휘관과 국군피해에 대한 보복전에 돌입해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적으로 고문하고 학살하였다. 양 진영이 모두 이성을 잃었고 전라도 땅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구례전역에서 무려 800여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토벌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교육자인 나의 아버지도 이런 와중에 날벼락 같은 화를 당하고 말았다. <중략> 아버지는 당시 학교 관사에서 생활했다. 변을 당한 그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던 산동면에서 약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산면 냉천리 본가에 다니러 왔다가 할아버지를 뵌 후 가지 않아도 될 학교로 출발하였다. 시국이 어수선하고 불안한지라 학교를 지키려는 책임감에서였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토벌군들이 다짜고짜 무력 연행하여 산동면 원촌리에 있는 누에고치 판매소에 하룻저녁 가뒀다가, 다음날 음력 11월 21일 새벽에 산동면 외산리 한천마을 참새미라는 곳에서 사살하였다.(과거사 진상조사보고서 기록에 의함)
-수필〈향연〉 부분
과거사 진상조사보고서 기록에 의하면 “당시 반란군은 12연대장이 사망한 후 국군을 습격하여 획득한 물자를 중동초등학교에 가져와서 정리한 적이 있었다. 이는 중동초등학교가 반란군 소굴이라는 의심을 낳았다.” 당시 화자의 아버지 임문주는 중동초등학교의 교장이었다. 1917년생이었으니 당시 31세의 꽃 봉우리 같은 청년이었다. 토벌대는 동료들이 당한 작전실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아무런 법규적용도 없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라를 되찾고 3년 만에 헌법이 겨우 제정되었으나 그 법은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못했고, 젊은 교육자는 원대한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동토에 묻히고만 것이다. 연약한 민초들은 누구에게 항변한번 못해보고 가슴에 비수처럼 꽃인 억울함과 원통함과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만 있었다. 화자의 아버지는 좌익이 아니었고 사회주의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부모에게는 지극한 효자였고, 교육열이 뜨거웠던 청년 교육자였을 뿐이다. 그럼에는 역사는 아직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70여년 긴 세월을 눈치 보며 연명하던 그들도 이제 한두 사람씩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 무섭고 암울했던 역사를 분명하게 증언할 사람도 없다.
어리고 어린 세 아이를 혼자 끌어안게 된 아내의 두려움과 고통은 어찌했을까. 해방이 되고 고향을 찾아와 장래의 행복을 기대하며 하루하루 희망을 키우던 그 순진하고 여린 새색시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여린 새색시가 바로 화자가 꿈에서도 그리워하는 어머니다. 그 후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한 것은 어머니는 다음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침묵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다음 작품을 보자.
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이니까 예닐곱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늦은 봄날, 나는 집 앞 골목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낯선 젊은 여인이 나타나 나를 데리고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로 가더니 내 손에 연필과 공책을 쥐여 주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바삐 떠났다. 영문도 모른 채 엉겁결에 받아 쥐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날도 집 앞 도랑가에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있었다. <중략>그때 엄마라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없었다. 내 앞에도 옆에도 없었다. 엄마의 얼굴이나 이름도 몰랐다. 엄마라는 존재 자체를 몰랐으므로 나는 내게 엄마가 없다는 것조차 몰랐다. 갑자기 그 여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도 꽤 오래 내가 엄마가 없는 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여인이 내 손을 잡고 갈 때, 이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엄마라는 것을 직감했다. 엄마의 음성도, 살 냄새도, 손길도 느낀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던가, 그립다던가, 서운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여인은 그날 이후 한 번도 우리 집에 찾아오거나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뇌리에서도 잊혀갔다. 다만 그날 도랑가에 피어있던 하얀 찔레꽃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다.
-수필〈하얀 찔레의 추억〉 부분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다. 화자에게 어머니의 초상은 하얀 찔레꽃이다. 화자가 부모님의 부재를 의식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부터다. 학기 초가 되면 담임 선생님은 가정생활 조사서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때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이름을 적었다. 통신표 뒤편 생활기록부에는 조실부모(早失夫母)라고 기록되었다. 이때 입은 여린 가슴의 상처가 지워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자가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남 앞에 나서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 여긴다. 이제 화자는 당시 어머니의 심경을 상상해 보려고 노력한다. 어머니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것도 사랑이고 예의라 생각한다. 너무 젊었던 어머니는 아비 없는 어린 자식들을 홀로 키워낼 자신이 없었을 터이고,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두렵고 버거웠으리라. 뜻하지 않게 청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너그럽지 못하고 이해심 없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이겨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가 어느 곳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꽃을 피워냈을 것이다. 자식을 금쪽같이 여기고 살뜰히 보살피며 누구보다도 모성애가 강한 여인으로 살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참 좋겠다.”고 화자는 간절하게 소망한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평생을 안고 온 어머니를 놓아주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작가의 속은 몇 번이나 넘어지고 문드러졌을까. 세상의 수많은 결핍 중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한 결핍이 가장 큰 슬픔이라고 믿는 필자에겐 더욱 가슴 아리는 부분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내버려진 고아가 더 나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 부분에서 아픈 서사도 그렇지만 묘하게 끌어당기며 슬픔을 더욱 슬프게 하는 문체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사와 서경이 결합하여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 내듯이 서사와 문체가 결합하여 슬픔을 새로운 예술로서 내면화하고 승화시킨다는 점이 돋보인다. 다음 글을 보자.
연둣빛 봄차림을 했던 숲은 녹음이 제법 짙어졌다. 병아리 주둥이처럼 뾰족하게 돋던 새순이 어느새 허공으로 늘씬하게 솟아올랐다. 벚꽃도 철쭉도 흔적이 없고 민들레는 어느새 하얀 갓 씨를 모자처럼 쓰고 낮은 자리에 다소곳하게 서있다. 나는 숲속 친구들을 유정하게 살피며 개울가를 따라 걸었다. 길옆으로 찔레꽃이 만발했다. 하얀 꽃잎으로 노란 속살을 수줍게 감추고 상큼한 향기를 내뿜는 찔레꽃 주위로 벌 몇 마리가 윙윙 날더니 이내 꽃술 속에 코를 박고 꿀을 빤다. 갓난애가 엄마 젖무덤에 코를 박아 넣고 문질러 가며 젖을 빨아 먹는 모습과 흡사하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을까?
-수필〈하얀 찔레의 추억〉 앞부분
화자는 아직도 어머니란 발음이 어색하다고 한다. 단 한 번의 짧았던 만남은 아픔이고 슬픔이었다. 추억이란 아름답다고 하지만 화자에게는 깊은 상처이며 사무치는 그리움뿐이었다. 어머니는 “물푸레 잎 같은 쪼그만 여인, 눈물같이 슬픈 여인, 영원히 나 혼자 기다리는 여인, 그래서 불행한 여인”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부재가 유년기엔 부끄러웠고 청소년기엔 우울한 원망으로 변했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야 그리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어디서 불쑥 나타나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적막의 밤을 기다림으로 지새운 적도 많았다.
위 인용문은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이미지를 연둣빛 봄, 병아리 주둥이, 하얀 찔레꽃의 노란 속살, 상큼한 향기, 꽃술 속의 꿀로 형상화된다. 그러면서도 성에 차지 않자 “갓난애가 엄마 젖무덤에 코를 박아 넣고 문질러 가며 젖을 빨아 먹는 모습. 내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을까?”라고 통곡이라도 하듯이 자신을 엄마의 젖을 빠는 아기에 등치시키면서 그런 순간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다. 참 대단한 문장과 문체의 힘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러한 서정적이고 애절한 문체를 작품의 서두에 배치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부재를 더욱 절절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별처럼 반짝이는 시적표현에 오래오래 독자의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다. 문학에서 문체의 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러한 내포적인 이미지를 함축한 표현들이 이 수필집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작가의 생애와 내 삶의 위안
임철호는 해방 다음해인 1946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할아버지 나무 길을 따라다니고, 할머니의 잔심부름을 하며 초등학교를 다니며 꿈을 키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장교로 임관하여 국방대학원 91안보과정을 졸업하고 육군본부 관재계획관(부이사관)으로 전역했다. 군 생활 중에 월남전에 참전하여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작은 아들은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임관하여 예비역장군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현재 할아버지 증손자 둘은 의사가 되어 의료 활동을 하고 있으며, 둘은 공무원과 공군으로 각각 근무 중이다. 향년83세로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의 고난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이다.
이후 작가는 2013년 《에세이스트》에 수필로 등단하여 작가가 되었다. 필력을 발휘하여 모지에서 올해의 작품상 2회를 수상하였고, 2019년에는 《더 수필》에 선정되어 이름을 빛냈다. 2020년 3월에 수필집 《길 위의 정원》이 에세이스트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은 문학성을 인정받아 정경문학상을 받았다. 짧은 시간에 대단한 문학적 성장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내면에는 문학적 열정이 들끓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간절하고 안타까운 사연들을 쓰지 않고는 배겨내지도 못했으리라. 문학이란 자기 삶을 사막에서 건져내는, 아니면 자기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했을 때 그에게 수필과의 만남은 바로 치유와 구원의 여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딸의 출가와 아들의 혼사를 치른 뒤부터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일차 목적지는 아버지가 초임발령을 받고 교편생활을 시작한 창녕이다. 그곳은 그의 외가이기도하다. 아버지가 근무하던 당시의 학교 땅이라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0년 이후의 기록물만 교육청에 보존되었을 뿐 해방 전의 기록은 없었다. 해방 후 여러 차례의 학제개편, 교육자치제 시행에 따라 교육기관들이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문서이관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면 창낙초등학교는 현재 창녕유치원에서 사용하고 있고, 성산초등학교는 나사렛예수 수녀원으로 사용 중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상전벽해였다. 그나마 옛 성산초등학교터에서 7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느티나무를 발견한 것이 큰 수확이었다. 아직도 늠름하고 건강한 느티나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아버지를 상상한다.
느티나무의 몸속에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학동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재잘댐이 스미어있을 것이고, 술래잡기할 때 손과 이마를 나무에 대고 하나, 둘, 세었을 장난꾸러기들의 손자국이 배어있을 것이다. 가만히 팔을 벌려 나무를 안아 보았다. 그리고 귀를 둥치에 바짝 대고 나무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멀고 희미한 저 생명의 소리, 아버지도 가끔은 들어 보셨을까.
-수필〈흔적을 찾아서〉 부분
화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득한 세월의 저편, 할아버지가 재기를 했던 땅, 화자의 아버지가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던 이국의 그 땅까지도 찾아가보고 싶어 한다. 오직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낯선 이국땅을 헤매었을 할아버지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화자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3월 햇살 고운 날, 형제부부와 가이드역할을 자처한 딸이 동행했다. 1920년대, 할아버지는 일본 미야자키에 정착하였다. 그곳의 기와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먹고 살아야하고 아들 둘을 공부시키려면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구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화자는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있으므로 내가 있었다. 그의 고통과 고뇌가 나의 고통과 고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랑스럽거나 부끄럽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 고달팠던 삶을 잠시 보듬어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에게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외로움을 그 혼자서만 감당해야 한다면 나의 외로움 또한 나 혼자서만 감당해야할 것이다. 이번 여행은 내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러간다기보다, 한 외로움으로 한 외로움을 덮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수필〈기억의 땅〉 부분
그랬다. “한 외로움으로 한 외로움을 덮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효성이 아닐 수가 없다. 혈육이란 이렇게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대를 이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화자의 내밀한 사유와 내면의 깊은 곳을 흔드는 서정적인 문체까지 어우러져 수필읽기의 행복감까지 느끼게 한다. 문학작품이란 이렇게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세상에 알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치유라는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그렇게 일본 땅을 방문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흔적을 느껴본다. 참 다행인 것은 85세인 당시 공장주의 며느리를 만날 수가 있었다. 화자의 할아버지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행을 보고 할아버지를 좀 닮은 것 같다며 친근감까지 표현해 주었다. 아버지 형제가 다닌 오오요도 소학교까지 안내해 주었다. 여자교장선생은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언어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반겨주었다. 당시 아버지의 학적부를 보고 싶다고 하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1945년 무렵 학교에 포탄이 두발 떨어져 보관하고 있던 서류가 소실된 상태라 45년 이전의 자료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화자로서는 아버지가 뛰어놀고 공부했던 그 땅을 밟아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음이다.
이제 화자도 늙어가고 훗날을 기약할 수 없다. 마음의 한적한 빈터엔 회한만 쌓여가고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다. 그리움의 색깔도 연두에서 초록으로, 초록에서 보라, 분홍, 빨강이 되었다가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였던 미움도 어느 순간 그리움이 되었다. 이제 이 수필집의 표제작이기도한 〈길 위의 정원〉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일찍이 부처님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근심과 걱정거리에 갈팡질팡한 때도 있었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순간순간의 결정에 장애물로 작용했던 적이 많았다. 간사함과 욕심이 마음을 흔들고 정신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한주먹도 안 되는 자존심과 명예, 돈 욕심에 온몸으로 부딪쳤던 일들이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소요유(消遙游)의 경지를 흩트려 놓는다. 욕심 없이 분수에 맞는 삶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뒤돌아보니 수많은 욕심을 품고 살아온 것 같다.
-수필〈길 위의 정원〉부분
이 작품은 퇴직 후 9월의 어느 평일, 왕십리역에서 용문행 전철타고 양수리 운길산 역에 내려서 그 일대의 풍광을 감상하며 사색하는 내용이다. 평일의 나들이니 치열한 현실적 삶은 떠난 후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여유로움일지도 모른다. 이미 노년의 삶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 감회가 얼마나 무궁하고 새롭겠는가. 북한강 변을 걷고 양수대교를 바라본다. 물의 정원, 마음의 정원, 풀꽃의 정원 등 길 위의 정원을 거닐며 사유를 이어간다. 마음의 정원에서는 “마음속에 끼어 있는 욕심 한 줌 털어내고 돌아가면 남은 생이 더욱 가벼워지려나.”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위 인용문에서도 화자는“한주먹도 안 되는 자존심과 명예, 돈 욕심에 온몸으로 부딪쳤던 일들이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 소요유(消遙游)의 경지를 흩트려 놓는다.”고 삶을 토닥인다. 화자에게 무슨 명예와 돈 욕심이 있었겠는가. 그런 부분을 털어내려고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 역시 한 인간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희망에 동참한 것이라고 본다. 화자가 남다르게 겪은 상처와 아픔만큼으로도 세상에 지불해야할 모든 빚은 모두 갚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이글의 결론을 맺을 차례다. 글의 서두에서 읽히는 수필집의 키워드를 살펴보고자 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임철호의 수필집 《길 위의 정원》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보면 우선 특별한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특별한 서사란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그야말로 놀라운 이야기를 말 한다. 임철호의 경우 여순반란 사건 때 아버지는 총살당했다. 그때 화자는 젖먹이 2세였다. 젊은 어머니는 다음해 집을 나갔다. 계조모 밑에서 갖은 구박을 당하며 성장한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자체가 불가능한 서사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서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개성적인 문체와 문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작품집의 경우 가슴깊이 파고드는 애절한 문체와 서정적이고 담백한 문장이 슬픈 사연을 더욱 아리게 내면화시켜준다. 세 번째로는 독자의 삶에 위안을 주는 글이어야 한다. 한편을 작품집을 읽고 위안을 받지 못한다면 굳이 힘들게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길 위의 정원》의 경우 작가의 아픈 상처와 삶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독자는 위로를 받을 수가 있다는 점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팍팍한 것이다. 특별히 현실적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달프고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삶을 비관하다가도 책을 읽으며, 이런 쓰리고 아픈 삶도 있는가 싶어, 이에 비하면 나의 상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싶어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게 또한 사람이고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이런 모든 요건을 두루 갖춘 수필집이 임철호의 《길 위의 정원》이라 생각한다. 일독을 권하며 그의 다음 작품집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