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일
‘가을에도 야구하자’
2005년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를 봤던 팬이라면 이 문구를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롯데가 경기하는 날에는 외야석에 항상 이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가을 잔치’ 등으로 불렸던 KBO 리그 포스트시즌이 ‘가을야구’라는 별칭으로 통하게 된 것도 바로 이 ‘가을에도 야구하자’ 문구 덕분이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 팬들이라면 가을에 야구하는 것이 뭐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001년부터 4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롯데 팬들은 가을에 야구 한판 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가능성도 없는데 막연하게 가을야구가 하고 싶어서 현수막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2005년 롯데는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첫 5경기를 1승 4패로 시작한 롯데는 4월 후반 6연승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순위 싸움에 나섰다. 5월 10일에는 4년 9개월 만에 승패 마진 +7을 기록했고, 5월 중순 4연패를 당하고도 4위보다는 2위에 가까운 3위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었다.
마운드에서는 ‘전국구 에이스’로 등극한 손민한과 ‘닥터 K’ 이용훈이 원투펀치를 형성하고 노장진이 뒷문을 지켰다. 타선에서도 킷 펠로우와 이대호의 거포 듀오가 홈런포를 터트리는 와중에 하위타선에서도 박기혁이 3할 타율에 도전하며 짜임새 있는 라인업을 구성했다. 세대교체도 성공적이어서 2년 차 장원준과 강민호를 비롯해, 이원석, 이왕기(개명 후 이재율) 등이 1군에 자리를 잡고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줬다.
이렇듯 한껏 분위기를 끌어 올린 2005년 롯데(의 시즌 초반)를 상징하는 경기가 바로 5월 26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였다. 훗날 ‘엘롯라시코’라고 불리며 당사자들은 처절하고, 제3자가 보면 웃긴 경기를 양산해낸 두 팀은 사실 이 명칭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여러 명경기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대첩’이라는 단어를 야구계로 끌어온 경기가 바로 이 5월 26일 경기, 이른바 ‘5.26 대첩’이다.
경기 전까지 롯데와 LG는 나란히 3, 4위 자리에 있었다. 5월 24일부터 열린 양 팀의 3연전에서 첫날은 롯데가, 이튿날은 LG가 승리하면서 두 팀은 여전히 4경기 차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리즈의 승부를 가를 마지막 경기에서 롯데는 장원준을, LG는 장문석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비록 순위는 롯데가 더 높았지만 LG 역시 이병규-박용택 좌타 듀오가 각각 타격왕과 도루왕 싸움을 펼치면서 맹활약하고 있었기에 승부는 팽팽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LG가 크게 앞서 나갔다. LG는 2회까지 3점을 올리며 선발 장원준을 마운드에서 내렸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LG는 3회 말 1사 1, 2루에서도 대타 이성열이 1루 선상을 타고 빠져나가는 2타점 3루타를 터트리는 등 4점을 추가했다. 롯데는 4회 말 유격수 박기혁의 포구 실책으로 다시 한 점을 내주며 분위기를 완전히 LG 쪽으로 넘겨줬다. 그 사이 2회 초 1사 2, 3루 위기를 넘긴 LG 선발 장문석은 3회와 4회를 퍼펙트로 막아냈다. 누가 봐도 이미 경기는 LG의 승리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났다면 ‘엘롯라시코’가 아니다. 5회 초, 롯데가 드디어 반격에 나섰다. 선두타자 손인호가 2루타를 치고 나가며 만든 찬스에서 롯데는 강민호의 행운의 안타로 드디어 첫 득점을 올렸다. 박기혁의 좌중간 2루타로 추가점을 올린 롯데는 정수근의 볼넷과 신명철의 투수 강습 내야안타로 1사 만루를 만들었다. 여기서 3번 라이온 잭슨이 바깥쪽 공을 툭 밀어쳐 안타를 만들며 두 명의 주자를 불러들였다. 점수는 4대 8. 한 점을 줄 때만 해도 웃고 있던 장문석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나 롯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대호가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이어 등장한 펠로우가 친 큼지막한 타구를 우익수 루 클리어가 잡지 못하며 남은 주자 2명이 홈을 밟았다. 다시 돌아온 손인호의 타석에서 폭투까지 나오며 이제 경기는 한 점 차가 됐다. 점수는 줬지만 스트라이크 하나만 꽂으면 이닝을 끝내고 승리투수가 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장문석은 손인호에게 다시 안타를 내주더니 최준석에게는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2루타를 얻어맞으면서 결국 8대 8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빅 이닝이었다.
이렇게 분위기를 가져온 롯데는 다음 이닝 수비가 중요했다. 그러나 5회 말 선두타자를 실책으로 출루시키며 위기를 자초한 롯데는 결국 1사 2, 3루에서 박병호의 희생플라이와 투수 이정민의 폭투로 2점을 다시 내줬다. 이어 6회 말에도 이성열의 솔로포가 터지면서 다시 스코어는 8대 11 LG 리드로 바뀌었다. 롯데는 8회 초 맞이한 무사 1, 2루 득점 기회에서 1루 주자 박정준이 포수 견제에 걸려 아웃되는 장면을 연출하며 한 점을 얻는 데 그쳤다. 8회 말 종료 시점에서 전광판에는 ‘9-11’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9회 초가 찾아왔다. 롯데는 1아웃 후 이대호와 펠로우의 연속 안타가 나오면서 주자를 2루와 3루에 두게 됐다. 이어 앞선 4타석에서 3안타를 몰아친 손인호가 투수 다리 사이를 스치고 중견수 쪽으로 빠져나가는 적시타를 기록,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야말로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당시 MBC ESPN 임주완 캐스터의 말)라는 말이 나올 순간이었다. 여기서 끝났다면 대첩이 아니다. 다음 타자 최준석이 밀어친 타구는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에 떨어졌다. 역전 투런 홈런. 1999년 가을, 최준석에 앞서 등 번호 20번을 달았던 선수가 대구에서 때려냈던 그 홈런과 비슷한 코스였다.
▲ 이른바 ‘5.26 대첩’에서 결승 홈런을 기록한 최준석 / 사진=롯데 자이언츠
9회 들어서 처음 리드를 잡은 롯데는 ‘돌직구’ 노장진을 곧바로 투입했다. 모두의 기대대로 노장진은 9회 말을 무실점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롯데의 13대 11 승리. 롯데는 8회 초가 시작될 때만 해도 2%였던 승리 확률을 두 번의 공격과 두 번의 수비를 통해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이날 롯데의 6번 타자로 나선 손인호는 5타수 4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시즌 타율을 0.317에서 0.336까지 끌어올렸다. 이날 활약으로 손인호는 김재현(0.371)과 이병규(0.363)에 이어 타율 3위에 올랐다. 마운드에서는 신인 이왕기가 2이닝 무실점 호투로 데뷔 첫 승을 거뒀다.
흐름을 탄 롯데는 비록 다음 시리즈인 한화 이글스전에서 1승 2패를 거뒀지만 28일 경기의 연장 10회 끝내기 안타로 여전히 분위기는 고조된 상태였다. 여기에 6월 첫 2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9연전의 시작을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그 9연전이 지옥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롯데는 6월 6일 현대 유니콘스전을 시작으로 8연패에 빠지며 첫 9연전을 1승 8패로 마감했다. 이어 8월 중순 다시 찾아온 9연전에서도 6패(우천 취소 3경기)를 당하며 결국 5위로 밀려났다. 2005년 18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을 기록하며 MVP를 차지한 손민한의 타이틀 앞에는 ‘포스트시즌 탈락 팀 최초 MVP’*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다.
* 사실 1983년 이만수(삼성), 1985년 김성한(해태)도 포스트시즌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1983년에는 한국시리즈만이 포스트시즌이었고, 1985년에 플레이오프가 도입됐으나 이 시즌에는 삼성의 통합 우승으로 인해 모든 팀이 포스트시즌을 경험하지 못했다.
▲ 2005년 5월 26일 롯데-LG전 박스스코어(사진=박스스코어 프로젝트)
PS. 5.26 대첩이 열리기 정확히 한 달 전인 4월 26일, 현대 김재박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5월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재박 감독은 어느 팀을 특정해서 지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깜짝 상승세를 보여주던 롯데를 그 팀으로 추측했다. 조금 늦은 6월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정말로 내려가는 팀이 나왔고, 이후 김재박 감독의 발언은 약간의 윤문(潤文)을 거쳐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이른바 ‘DTD’라는 야구계 최고의 법칙으로 재탄생했다.
양철종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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