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2. 06.
음악이나 예술품이나 건축물이나 첫 만남이 중요하다. 최초의 맞닥뜨림에서 어떤 느낌이나 감동을 받았는가.
2005년 봄이었다. 나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을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취재 여행 중이었다.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박물관 구역(MQ)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레오폴트 미술관에 들렀다.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이 미술관은 단순하게 말하면,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전용 미술관이다. 이곳에서 여러 작품들을 보았지만,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 빈 박물관 구역의 레오폴트 미술관. / 조성관 작가
'철학'은 왜 진품이 없을까
그것은 클림트의 '철학'이었다. 벽면을 다 채우고도 남을 거대한 그림. 철학이라는 제목은 붙어있으나 제목과 그림이 금방 연결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클림트를 '키스'밖에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때는 내가 본 '철학'이 진품이 아닌지조차도 알지 못했다.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느낌은 특별했다. 철학으로 대표되는 클림트의 학부화(學部畵)가 20세기 유럽사의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오스트리아 교육부는 1894년 환상(環狀)도로에 준공된 빈 대학에 걸어놓을 학부화 그림을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에게 의뢰한다. '철학' '법학' '의학' 3종류였다. 서른두 살의 클림트는 이미 부르크극장 천장화, 빈미술사박물관 벽화 등으로 빈 미술계의 스타 화가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교육부가 '철학'을 그려 달라며 화가에게 제시한 주제는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였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계몽적 메시지였다.
그로부터 6년 뒤 '철학'은 1900년 3월 빈 분리파회관에서 첫선을 보였다. 그런데 클림트가 완성한 철학은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와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벌거벗은 노인, 서로 부둥켜안은 젊은 연인들, 어린 아이 등이 한 덩어리로 뒤엉켜 물줄기처럼 저 멀리 은하수 같은 곳으로 빨려 간다. 클림트는 철학을 존재의 고통과 죽음으로 해석해 표현했다.
'철학'은 빈 화단에 천재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언론, 교육부, 미술계 등 빈 사회는 시대를 앞선 천재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나 생각하는 뻔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천재 클림트는 누구도 생각 못 한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화단의 기득권 세력이 클림트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 클림트의 1900년작 '철학'
파문이 확산되었다. '클림트가 흉측한 그림을 그려놓고 철학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빈에서 뭇매를 맞은 이 그림은 4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받는다.
뒤이어 완성한 '의학'과 '법학'도 욕을 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교육부는 예정대로 학부화 3점을 사들이기로 결정한다. 이번에는 또 다른 곳에서 문제가 터져나왔다. 빈 대학 당국이 학부화 그림 게시를 거부한 것이다. 교육부는 다시 국립현대미술관에 인수를 권유한다. 국립현대미술관도 여론의 눈치를 보며 난색을 보였다.
자존심이 상한 클림트는 그림 값을 돌려주고 작품을 돌려받는다. 그러면서 결심을 한다. 다시는 정부 주문 작품을 그리지 않겠노라. 클림트가 후반에 상류층 부인의 초상화와 풍경화에 전념하게 되는 계기다. 이것은 오귀스트 로댕이 칼레 시(市)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칼레의 시민'이 논란을 빚자 공공기관 의뢰 작품을 거절하는 것과 흡사하다. 후원자 두 명이 학부화 3점을 구입하면서 클림트는 한숨을 돌렸다.
클림트가 타계하고 20년 뒤인 1938년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병합된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이후 학부화 3점은 몰수되어 한곳에 모이게 된다. 그곳이 빈 교외의 임멘도르프성(城)이다. 1945년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에서 퇴각하면서 임멘도르프성에 불을 질렀다. '철학'을 비롯한 학부화 3점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 독일 바이에른주에 자리한 노이슈반슈타인성. / 위키피디아 제공
노이슈반슈타인성(城)의 비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핀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5~8년간 점령했다. 히틀러는 이 기간 피 흘리지 않는 또 다른 전쟁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미술품 약탈이었다. 고향 린츠에 거대한 총통미술관 건립을 계획한 히틀러는 그곳에 채울 미술품을 점령국에서 조달하기로 한 것이다.
빈 미술대학 입학시험에서 재수하고서도 두 번씩이나 낙방한 전력이 있는 히틀러는 미술품에 대한 집착이 누구보다 강했다. 이런 심리적 강박의 기저에는 화가가 되려 했지만 화가가 되지 못한 열등감도 작용했다.
히틀러는 프랑스‧오스트리아‧네덜란드‧벨기에의 예술품들이 독일의 그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직적인 기획 약탈이 시작되었다. 대상은 오래된 성당과 유명 미술관, 그리고 상류층의 소장품이었다. '유대인 미술품 소장 금지법'과 같은 기상천외한 법을 만들어 약탈의 합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벨기에 브뤼헤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성 모자상' 같은 게 대표적이었다. '성 모자상'은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작품이다. 클림트의 초상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포함한 우리가 아는 수많은 예술품이 그 대상이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빈에 살던 유대인 사업가의 부인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클림트가 1907년에 완성했다. 바우어 부부는 이 작품을 아파트 응접실에 걸어두다. 그러나 이 초상화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탈당한다. 나치는 절도행각을 감추려 출생증명을 삭제한다. 원래 그림 제목을 지우고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라고 붙였다.
2015년에 나온 영화 '우먼 인 골드'는 바우어 집안 소장품인 이 초상화가 나치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오스트리아 정부 소유가 되어 벨베데레에 전시되다가 마침내 원소유자 유족에게 환수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숙모의 초상화를 되돌려 받고 이를 미술품 경매에 내놓았다. 2006년 경매에서 이 초상화는 1620억 원에 낙찰되어 당시 세계 최고가를 기록한다.
▲ 노이슈반슈타인 성에서 미술품을 가지고 나오는 대원들. / 뜨인돌 제공
나치는 점령지로부터 약탈한 예술품들을 일단 성이나 광산에 숨겨둔 채 종류별로 앨범을 만들어 총통에 보고했다. 하나씩 베를린으로 비밀리에 운송했다. 오스트리아 알타우제 소금광산, 독일 지겐 구리광산‧하일브론 광산‧메르케르스 소금광산, 독일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한 1000여 곳이 은닉 장소로 이용되었다.
나치 독일이 서유럽의 예술품들을 쇼핑하듯 쓸어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연합군은 기념물 전담반을 편성한다. 흔히 '모뉴먼츠 맨'으로 통칭되는 이 특수 부대의 정식 명칭은 '기념물‧미술품‧기록물 전담반'(MFAA: The Monuments, Fine Arts, and Archives section). 인류의 위대한 정신 유산을 구조하라는 특수 임무를 맡았다. 연합국에 소속된 13개국 각 분야의 남녀 최고 전문가 350여 명이 전장에 투입되었다. 실제로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전문가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활약상은 로버트 에드셀‧브랫 위터의 책 '모뉴먼츠 맨'에 의해 처음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지 클루니가 2012년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독일 바이에른주 남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이다. 월트 디즈니사의 심볼 모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성은 나치가 프랑스로부터 약탈한 미술품들의 핵심 보관소였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과 루벤스의 걸작을 포함한 여러 예술품들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은닉되었다.
▲ 파리 로댕미술관의 '칼레의 시민들'. / 조성관 작가
우리가 프랑스를 여행할 때 파리 로댕 미술관이나 칼레 시청 앞 광장에서 감상하게 되는 '칼레의 시민'은 '모뉴먼츠 맨' 대원들의 노고(勞苦) 덕분에 가능했다. 미술품 숫자 워낙 많아 대원들이 물품을 성 밖으로 꺼내는 데만 6주가 걸렸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 이후 서울 수복 작전을 펼칠 때다. 유엔군은 북한군 수뇌부가 덕수궁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덕수궁을 공습하면 북한군 수뇌를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었지만 미군은 고심 끝에 폭격 보류 결정을 내린다. '모뉴먼츠 맨'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경험한 미군은 한국인의 문화유산을 파괴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2020년은 클림트의 '철학'이 탄생한 지 120년. 유럽 여행에서 미술관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술품들이 2차세계대전의 포화(砲火) 속에서 살아남지 않았으면 우리는 과연 인류의 걸작을 감상할 수 있을까. 히틀러의 손에서 인류의 정신유산을 구출해낸 영웅들인 '모뉴먼츠 맨'에 고개가 숙여진다.
조성관 / 작가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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