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이야기 10
첫 시련 “영아 소동”
명동 성당 건축 문제로 정부의 금교령 (1988, 6)
선교사들의 활동 중단 명령
이상한 소문
서양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데려다가 공짜로 먹이고 입히는데
이유가 있다.
조선 아들을 데려다가 남색을 즐긴다더라.
잘 먹인 다음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판다더라.
조선 아이의 신체를 해부용으로 쓰고 눈알은 사진기 렌즈로
쓴다더라.
프랑스 공사관 요리사 오봉엽
조선 아이를 잡아 연한 살은 칼로 썰어 먹고
피를 잔에 받아 마시는 것을 보았다.
덜 익혀 피가 내비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자르고
붉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보고 인육을 먹는 것으로 착각
서양 오랑캐, 서양 귀신, - 불신과 공포의 대상 선교사들
당연히 민중이 흥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학교 병원에 몰려가
“조선 아이를 내 놓으라”고 시위 하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시위대 – 부모의 손에 끌려가고
선교사 사택에 돌을 던지며
선교사 집에 고용된 조선인들에게도 폭행
선교사들의 자국 공사관에 보호 요청
미국 러시아, 프랑스 외국 공사관은 정부에 항의 “치안 유지”
요청하였다.
정부가 “외국인에 대한 소문은 모두 거짓이며 정부는 외국인을
보호할 것이다.“는 내용의 고지문을
거리에 붙이고, 병력을 선교사 사택과 병원에 내보내고
순찰을 강화하자 진정 국면
제물포항에 정박 중인 미국과 러시아 함대 장병들이 서울에
진군하여 무력시위를 벌인 것도 도움이 되었다.
거짓이었지만 기독교를 내세운 진보적 개화파의 세력 확산을
우려한 수구파 보수 세력의 음모가 깃들어 있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1885년 이후 사회 분위기가 급속하게 개혁 쪽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여 선교사를 모함하려는 소문을 만들어 퍼뜨림으로
기독교와 개화 세력의 기세를 꺾으려 했던 것이고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던 민중이 이런 보수파의 음모에 이용
되어 소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얻은 것도 많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민중은 “정부가 외국 선교사를 보호한다.”
라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떠돈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존재와 사업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었다.
특히 1888년 여름 서울 근교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희생자가
나왔는데 이때 선교사와 교인들이 헌신적으로 진료활동을
펼치는 것을 보고 선교사를 신뢰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선교사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고 선교 사업을 돕기까지 하였다.
스크랜턴 선교 보고 (1년 후)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통과하였다.
전에 우리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하면 비웃기만 하던 그들이
이제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것을 볼 때 우리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또 기운이 나는지 모릅니다. 확신하는
바는 우리가 한국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민중 시험기라고 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한국 민중은 기독교를 시험했고,
그 결과 기독교가 민중을 위한 종교인 것을 깨닫고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신뢰를 표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아소동을 지나면서 기독교의 반대자가 지지자로 바뀐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있음”이 확인 되었다.
영아소동이 기독교 선교에 기여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아 소동을 거치면서 훗날 한국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활약하게 될 사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이 조선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돌 때부터 이
소문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미궁의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증을 얻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집에
들어간 모험가들이 나왔다.
김창식이다. (대표적인 사람)
황해도 수안의 가난한 농부 출신
21살에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마부, 머습, 장사꾼 등 밑바닥
생활을 하였던 대표적인 민중 출신이다.
영아소동이 잇을 때 남대문에 있었던 그가 외국인들이 ‘조선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풍설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던
차에 배재학당에 다니던 친구 이교영의 소개를 받아 새로 나온
올링거 선교사 집에 사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현장을 목격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맨 처음 일하던 집은 미국 사람 올링거 목사의 집이었는데
나는 그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 주인 내외의 생활을 매우 주의
하여 살펴보았으나 아무리 살필지라도 조금도 불의한 행동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몇 해 동안 그 집안에서 일하는 가운데
그 집 주인 내외가 가히 본받을 만한 사람인줄 깨닫고 그들에게
감화를 받아 예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김창식 증언)
김창식은 2년 후 세례를 받았고
이후 감리교 전도인이 되어 평양 선교 개척자로 활약
1901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고 전국을 순회하며 많은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민덕기도 비슷한 경로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남대문에서 숯 장사 (어려서 부모 여의고, 삼촌 일을 도음)
영아소동, 선교사의 집에 군중들과 함께 돌을 던질 정도로
선교사들을 미워함
그런데 자신이 던진 돌에 맞고도 화를 내기보다는 미소를 띠며
좋은 말을 하는 선교사의 태도에 1차 충격을 받았다.
그도 선교사의 집에 들어가 그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싶었다.
삼촌을 통해 선교사의 집에 요리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위장 취업해 들어갔다.
스크랜턴의 집이었다. 그리고 유심히 탐색하였다.
4년 동안 계속 되었다.
김창식과 마찬가지로 그드 감동을 받았다.
특히 스크랜턴 대부인에게 감명을 받았는데
대분인은 자상하셨을 뿐만 아니라 전덕기가 있는 자리에서는
철저하게 한국어를 사용하여 전덕기로 하여금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하인 신분인 자신에게 언제나 경어를 사용하였고,
식사 때도 선교사 가족들과 같은 식탁에 앉도록 하였다.
민중 출신 전덕기에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양반들에게 모멸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유교적 봉건사회
에서는 맛볼 수 없는 충격과 감동이었다.
노블 선교사 찾아가 “나는 스크랜턴 박사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나도 박사님
처럼 되고 싶어요.” 고백
1896년 세례
1905년 목사 안수
선교 중단의 위기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이 선교사와 기독교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식함으로 민중이 선교의 협력자가 되었고,
김창식과 전덕기와 같은 걸출한 천민 출신 전도 인들을 얻은
교회는 한국 민족사에 중심 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전화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