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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호 영생으로 가는길
From the Mount of the Blessing 에서 발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장 1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면,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식어진다. 마음 속에 사랑이 결핍될 때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증세는, 자신이 세운 어떤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형제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편협한 비판의 분위기를 가지고 살게 되며, 다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고 결점을 찾아내는 정탐꾼의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렇하였다. 그들은 스스로의 부족을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영적인 교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갔으며, “내 자신, 내 기분, 내 지식, 내 방법”만을 고집하면서,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하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의 있으리라.” 고전 4:5.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각자가 저마다 결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하고 추측함으로써, 마음에 상처를 받고 오해하는 죄악에 빠진다. 사람은 오로지 겉으로 드러난 것을 통하여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동의 숨은 동기를 아신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 성경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롬 2:1.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 죄가 있음을 공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비난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유죄를 선언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유죄 판결을 그대로 인정하실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마태복음 7장 3절. 성경은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매우 무서운 죄로 묘사하고 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잘 찾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성품에서 결점을 볼 때, 그것을 지적해 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태도를 통하여 배양되는 잘못된 품성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의 결점을 “티”라고 한다면, 그 결점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죄는 “들보”에 해당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형제의 “티”를 지적하면서 정죄하는 이유는,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사랑과 희생에 완전히 굴복하지 않은 참된 회개의 경험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문을 여는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따뜻하고 친절한 정신을 잘못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 귀한 영혼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쉽다.
“티”와 “들보”에 대한 비유의 말씀에 의하면, 비판의 정신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이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욱 커다란 죄인 비판과 교만의 죄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품만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표준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성격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약점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위치에 놓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므로, 사람들의 동기를 판단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가장 나쁜 영향을 미치는 죄는 바리새인의 특징이었던 냉랭하고 비판적이며, 용서할 줄 모르는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대하고 동정적이며 사랑스러운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활동하고 헌신적으로 주의 사업을 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사랑과 동정의 정신의 결핍을 메꿀 수는 없다. 타인의 결점을 찾아내는데 남달리 예민한 지력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그러한 특성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약점과 결점을 비난하고 폭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비판과 정죄의 정신에 빠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죄를 지어서 양심이 켕기는 사람이 누구보다 먼저 죄를 알아 차리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남을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감추거나 변명하려고 애쓰게 된다. 아담과 하와 역시 범죄한 직후 즉시 이러한 비난의 정신에 빠져서, 불순종의 책임을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서로 비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비난의 정신에 빠진 사람은 형제의 결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지적하는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비판적인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상대방의 결점을 주변 사람들에게 폭로하는 죄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께서는 비난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타인의 잘못인 “티”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고, 비난하는 정신을 버리며,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버리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기 때문이다(눅 6:43). 비난의 정신은 악한 열매이므로, 비난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못된 나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을 독선적 또는 비판적으로 만들지 말라.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심령에 커다란 회개와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대가 어려움에 빠져 있는 어떤 사람에게 조언이나 권면을 해주고자 할 때, 그대의 말은 평소에 자신이 나타내었던 모본과 정신이 어떠했는가에 비례하여 그 정도의 감화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대는 선을 행하기 전에 먼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대 자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겸허하고 순수하게 변화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화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그대 자신에게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장미 덩굴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꽃을 피우고, 포도나무가 탐스런 포도송이를 맺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계시면,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살피고,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는 삶을 살지 않게 될 것이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도와주고 축복하고 구원하는 것이 그대의 동기와 목적을 물들일 것이다. 잘못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갈 6:1). 자신도 여러번 그러한 잘못을 범했던 사실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한번 바른 길을 떠났을 경우, 다시 그 길로 돌아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는지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범한 형제를 더욱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는 대신에, 형제가 빠져 있는 문제와 죄에 대해서 깊은 동정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충고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자주 바라보는 사람은 구세주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음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결코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위하여, 스스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결코 비판과 자만의 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 잘못을 범한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체면과 위신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라도 버릴 수 있다고 느낄 때, 비로서 그대는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고 형제를 도와 줄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 때에서야 비로서, 성령을 통하여 형제에게 아름다운 감화력을 끼칠 수 있다.
책망과 비난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며, 올바른 길에서 떠나게 만든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마음문을 걸어 잠그고 회개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리스도를 떠나간다. 온화한 정신과 친절하고 자비로운 동정만이 사람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그대의 품성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는 그대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를 그대의 마음 가운데로 받아 들이라. 그리하면, 아름답고 강력한 감화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그대의 말과 태도에 온유한 설득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투박한 발은 수렁을 헤메며, 끝없이 아름답고 연한 꽃을 밟지만, 부드러운 손은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친구의 가슴을 파고 들어 심금을 울릴 수 있다.”
From The Mount Of Blessing 에서 발췌
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태복음 7장 12절에 기록된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너무나 적은 사람들만이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많은 현대인들처럼,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존경과 대접과 인정을 받지 못할까봐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 많은 존경과 더 낳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접하는 것에 비례해서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받을지를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줄 수 있는지를 염려하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그들의 처지에 서라는 것이 황금률이다. 그들의 고충과,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황금률이다.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 하라. 그리고, 그대와 그들의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 다음, 그대가 그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에게 행하라. 바로 이것이 황금률이다. 황금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율법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마22:39).
황금률은 참된 친절의 원칙으로서, 예수님의 생애와 성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하늘의 법칙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동정과 사랑의 향기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나왔는데, 그와 동일한 향기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풍겨져 나와야 한다. 그러한 향기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피곤하여 비틀거리고 서있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소망의 빛을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품성 속에는 친절과 동정의 정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부드럽고, 순결한 감정을 갖게 되며, 모든 상황 속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우아한 분별력을 소유하게 된다. 황금률은 친절과 동정의 정신을 가지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황금률은 자신을 상대방의 위치와 처지에 두었을 경우에 자신이 상대방에게 바라는 만큼 상대방을 도와 주라는 명령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대는 은혜를 적게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빚을 진 처지에 있다는 것이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것은 자에게 다 내가 빛진 자라” 고 말했던 것이다(롬 1:14). 그대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진리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죄와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재산이 많아서 안락한 생활을 살고 있다면,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황금률은, 그대가 그들의 처지에 있을 경우에 원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만큼, 그들에게 은혜와 자비와 친절을 베풀라고 명한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으로서, 황금률이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를 암시해 주셨다.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한 것은 모두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실 정도로 귀중하게 여기신 인간을 낮게 여기며, 인간의 궁핍과 고난과 권리에 무관심한 신앙은 가짜 신앙이다. 가난한 자들과 고난당하는 자들과 죄많은 자들의 요구를 무시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임을 입증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가 이처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그분의 이름과 품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추고 있던 사도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들 중에 아무도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 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가난하고 불쌍한 교인들이 있도록 허용하시는데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교인들이 자신의 소유를 가난하고 불쌍한 교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도움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며, 도움을 주는 자는 마음 속의 이기심과 탐심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수술을 받는 것이다.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2~14
황금률을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곧이어 황금률을 따라서 걷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좁고 비탈진 길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길이 좁기 때문에 그곳으로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셨다. 왜 어려울까? 왜냐하면 황금률이 좁은 문으로 들어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대는 넓고 평탄한 길을 택할 수도 있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다. 만일 그대가 진정으로 하늘에 가길 원한다면, 그대는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한다. 좁은 길은 하늘을 향하여 뻗어진 오르막길이다. 그대가 오르막길 즉 좁은 길을 가기로 선택할 때, 그대는 매우 적은 무리들과 동행하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넓은 길인 내리막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 올라 가는 길이 좁고 험한 길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길이 어둡고 타락한 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이기적이고, 교만하며, 부정직하고, 부도적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마음이 이끄는대로 살아가게 된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특별하게 신경을 써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문과 길이 넓어서 우리의 발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해 보인다. 만일 이기심, 돈을 사랑하는 마음, 세속적인 정신, 그리고 애지중지하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 매우 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정, 주님께서 지정하신 좁은 길을 가기 원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한다.
하늘 가는 길은 이 세상의 높은 지위나 재물을 웅켜진채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좁으며, 자기 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나 협소하고, 안락을 즐기면서 그 길을 걷기에도 너무 험하고 힘들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서 감당하셨던 것이 고통, 인내, 자아 희생, 핍박, 궁핍일진대, 우리가 하늘 낙원에 들어가고자 할 때에 감당하여야 할 몫도 그러한 것들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단정짓지 말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으며, 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주의하고 완악한 사람들의 양심에 성령을 통하여 호소하심으로써,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노력하신다. 멸망으로 인도되는 길이 매력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만에 불과하다. 사단이 인도하는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지는 고뇌가 있을 뿐이다. 쾌락과 세속적 야망을 즐기면서 살 수 있지만, 그러한 인생의 종말에는 고통과 슬픔만이 있을 뿐이다. 이기적인 삶의 길은 그 전도가 유망하고 장미빛 꿈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길에는 참된 행복이 없으며, 허무함만이 있을 뿐이다. 멸망으로 가는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덮혀 있고, 환하게 빛날지 모르지만, 환하게 빛나던 희망의 빛은 얼마 안가서 절망의 암흑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깊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성경 말씀에 순종하며, 진리를 위하여 희생하고, 시련 속에서 인내하며, 유혹을 거절하는 것은 최후의 영광을 위하여 전진하는 발걸음들이다. 하늘 가는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하늘문을 들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인도자로 삼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늘 가는 길이 험하고, 비탈져 있고, 좌우편에 함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한다. 피곤할 때도 수고해야 하며, 연약할 때도 싸워야 하고, 낙심될 때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소망의 항구로 틀림없이 인도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친히 걸어 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분께서 그 길을 평탄케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남기셨던 발자취를 따라서 걸어야 한다.
영생으로 가는 길이 비록 가파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그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의 피곤을 씻어주고, 생기를 돋구어 주는 기쁨과 보람의 샘이 준비되어 있다. 그 길을 걷는 자들은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낙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한걸음 위로 올라갈 때마다, 그들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더욱 더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매 발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분으로부터 나오는 밝은 영광의 빛이 그들의 길을 비추어 준다.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들어가기 위하여 서두르는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한가지 목적만을 생각한다. 하늘 성문을 향하여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도 이와 동일한 열심과 목적을 가져야 한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나의 희생과 죽음을 통하여 너희에게 하늘에 들어 올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하늘은 너희가 최고의 관심과 노력을 쏟아부을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 문을 열어 놓았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고, 쟁취해야 할 승리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너희가 하늘 왕국에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전쟁과 투쟁을 통하여 전진하는 행군이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는 마음이기 때문에, 거기서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투쟁은 지금까지 인류가 싸웠던 전쟁 중에 가장 큰 전쟁으로서, 그것은 자아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다. 곧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 속에서 지시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분의 음성이 양심 속에서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을 굴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 속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음성에 우리 자신의 의지와 뜻을 굴복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구원과 영생을 사모하지만, 그것을 소유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넓은 길은 쾌락과 자기 중심의 길이지만, 그 길을 가는 사람 중에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 나오기를 열망하지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악을 극복하려고 하다가 실패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의 깊이를 이해해야 하며, 그분께 대한 감사와 충성심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참된 거듭남이 선제해야 한다. 오직 마음이 변화된 거듭난 그리스도인만이 승리할 수 있다. 포도나무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를 맺을 수 있는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처럼, 먼저 우리의 마음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마음이 순결과 사랑으로 채워진 자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좁은 길을 바라보지만,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과 세상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교만과 깨끗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아와 세속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라고 요구하지만, 그들은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진리의 요구를 거절한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4. 그들은 선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하지만, 그것을 결정적으로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의 음성에 따라서 순종하고자 하는 확고한 마음이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와 세상을 이기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아를 땅 속에 뭍어버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일치시켜야 한다.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실 수 없다.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된다. 교만과 이기심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사도 바울 역시,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간증하였다(골 1:29). 사도 요한이 설명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정의는 우리 모두에게 무엇이 진짜 믿음인가를 깨닫게 해준다.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좁은 문을 막고 서 있는 거짓 선지자들
좁은 길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에,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5. 예수께서는 사단이 거짓 목자들을 통하여 양떼들을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려고 애쓸 것을 아셨다. 그들은 양처럼 부드럽게 말하고 양처럼 순결한척 하지만, 진짜 모습은 이리이다. 누구든지 하늘 가는 길을 넓은 길처럼 꾸며서 설명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좁다고 하신 그 길을 넓다고 말하는가?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곧 이어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과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 설명하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리 떠나가라 하리라.” 마 7:16, 21~23.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으로써, 훌륭한 설교나 고상한 태도를 제시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각종 기적을 행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범하는 삶을 살면서 선지자 노릇을 한다면, 그들은 거짓 선지자이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과 진리를 어떻게 가르치며, 실생활과 품성에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다. 말로만 제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없다. 오늘날,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달콤한 말로써, 양떼들을 양떼들을 넓은길로 인도하고 있지만, 사도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선언으로 거짓 선지자들의 기만을 폭로하였다(요일 2: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 나를 따르느니라?요한 복음 10:27
아가타 뜨레쉬 의사
활동 과다증세(Hyperacivity, 기능 항진)는 오늘날 많은 아이들이 유년기 때에 겪게 되는 문제이며, 어린자녀들을 갖고 있는 부모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활동과다증의 아이들은 몸부림치고, 안절부절 못하며, 항상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걷는 대신에 뛰며, 계속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다. 활동 과다증을 가진 아이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으며, 생각하기 전에 행동을 하고, 충동적이며 쉽게 산만해 지고, 쉽게 잊어 버린다. 그들은 종종 일련의 여러가지 지시들을 잘 이행하지 못하며, 쉽게 낙담한다. 그들은 자주 우울하며, 짜증을 잘 부리고, 쉽게 화를 내며, 정신을 집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종류의 활동 과다증은 감정의 문제와 지적 수준에서 비롯되며, 또 다른 종류의 활동과다증은 부적당하고 일관성이 없으며 비효과적인 가정 교육에 그 원인이 있다. 대개 활동 과다증의 자녀를 갖고 있는 부모들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끌려다니는데, 왜냐하면 부모들이 아이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아이들의 요구 사항들을 모두 들어주기 때문이다. 소리를 지르는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아온 아이들은 얼마 안가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고, 결국에는 부모들이 그들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올바로 교육시키려면, 자녀들에게 대하는 행동과 말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되어야 한다.
응석을 받으며 버릇없이 자란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를 누루고, 가정에서 제멋되로 하는 아이로 성장한다. 이런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서도 자기 멋대로 하기 위해서 활동과다증을 나타내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사랑과 공의가 잘 조화된 교육을 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발육의 저하나 부진의 현상은 활동 과다증의 하나로 간주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아이들은 정신의 통제 능력이 몸의 운동 근육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자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이르면, 정신력이 근육의 발육과 조화를 이루게 됨으로써, 집중력과 주의력이 향상하게 된다.
활동 과다증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종종 학습 능력의 결함이 발견된다. 이런 종류의 아이들은 자전거를 고치고 복잡한 기계를 조립할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을 읽는 것을 배울 수없다. 많은 교육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여덟살 또는 열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보내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을 제대로 자제할 수 있는 조절 기능이 발전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추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학습 능력의 결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데, 그 이유는 청소년기가 될 때까지 남자 아이들의 발육이 여자 아이들 보다 부진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젼과,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오락들과 기타 여러가지들로 인해 받는 과도한 자극들도 활동과다 증세로 발전시킬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텔레비젼의 폭력 장면과 연속적으로 바뀌는 화면은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많은 자극을 준다고 한다. 매우 자주 바뀌는 텔레비젼의 영상 화면은 아이들이 짧은 시간 밖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길들인다. 신경조직이 혹사된 아이들은 종종 생각없이 성급하게 행동하게 된다. 부모의 지도하에서 아이들을 운동시키는 프로그램은 활동과다 증세를 갖고 있는 아이들을 침착하게 만드는데 효과적이다. 채소를 경작하고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은 활동을 부모들과 함께 하는 것은 활동 과다 증세를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다.
활동 과다증의 아이들은 갓난 아기 때부터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들은 잠을 자고 젖을 먹는데 어려움을 겪으며(잦은 복통), 그리고 종종 침대에서 기어나온다. 이러한 아기들이 기어가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물건들을 치우느라고 계속해서 분주하게 집안을 다녀야 한다. 또한 밤에 자기 않는다. 그들은 약물 복용시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반응들을 보인다. 예를 들면, 다른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드는 약물이 이런 아이들에게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들이 성장해 감에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이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한 아이와는 잘 놀 수 있지만, 함께 노는 아이가 여러명일 경우에는 종종 말 다툼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아이들은 함께 노는 친구들을 자기 멋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활동과다증의 아이들(특별히 남자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나이를 늦추고, 8살~10살이 될 때까지 가정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활동 과다증이 있으며, 자제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어린 시절에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이들 중에 많은 비율의 아이들이 성장하여 청소년이 되면, 심각한 문제들(마약, 낙제, 우우증, 각종 범죄들)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활동과다 증세의 가장 큰 원인은 아이들이 어떤 종류의 음식물을 섭취하며, 어떤 영양분을 공급받는가에 많은 관계가 있다.
천연 치료법
가정 교육
1. 아이들은 질서있고 조용한 환경에서는 활동과다증을 자극하는 요인들이 있을지라도 잘 적응한다. 환경에 일관성이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들의 과도한 행동들은 크게 감소 될 것이다.
2. 일관성은 활동과다증의 아이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필요한 요소이다. 자녀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부모는 한번 말하면 그대로 시행한다는 것을 아이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만 한다. “만일 한번 만 더 하면 팔을 부러뜨릴 것야” 라는 식의 협박은 시행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들이 말한데로 시행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며, 결국 이러한 경우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다른 말에도 불순종하게 된다. 과격한 언어는 아이들로 하여금 불순종하도록 만드는데, 왜냐하면 부모들의 과격한 말이 그대로 시행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옳고 합당한 지시나 교훈을 주었을 경우, 일관성 있게 그것을 밀고 나가야 한다. 만일 엄마가 아이에게 목욕을 하고 자라고 하였을 경우, 아이가 타당한 이유없이 거절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일 엄마가 아이에게 목욕을 하지 않고 자도록 허용한다면, 아이는 언제든지 자신이 고집을 부리면 부모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될 것이다.
3. 자녀에게 무엇을 지시했을 경우에는, 그 일의 수행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대개 아이들은 쉽게 산만해지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과 이행하여야 할 것들을 기억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4. 부모들은 아이들 앞에서 잘 연합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부모는 가정 안에 확고한 규칙과 원칙들을 세워 놓아야 한다. 부모들 중 한쪽 편이 다른 한편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자녀들의 활동과다증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부모들을 서로 대립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들이 이혼하지 않은 가정의 자녀들보다 활동과다증과 같은 문제들이 더 많다.
5. 활동과다증를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규칙적인 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식사 시간, 그리고 잠자는 시간들이 1년 365일 일정하게 정해져 있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는 아이들은 불규칙한 시간에 잠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말에 잘 따른다. 잘 짜여진 생활 계획은 일관성 있고, 안정된 생활 분위기를 조성한다.
6. 아이들을 위해서 규칙을 세울 경우, 부모는 아이들에게 규칙을 어겼을 경우에 어떤 징계가 가해질 것인가를 말해 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규칙을 범하였을 경우,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7. 어떤 아이들은 관심을 끌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데, 왜냐하면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 부모가 자신들에게 주의를 기울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사소한 잘못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잘하였을 경우에 아이를 격려하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아이들을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다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의 물건들을 훼손하는 행동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서는 않되지만, 신경질을 부리는 것과 입을 삐쭉이는 것, 그리고 우는 소리로 말하는것과 같은 사소한 행동들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행동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 더욱 더 과격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행동들은 아무리 길어도 5일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좋은 행동을 인정해 주는 것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좋은 행동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된다. 만일 아이들이 자기 방을 청소하고, 불평없이 심부름을 하는 것과 같은 착한 일들을 했을 때에 칭찬을 해 주어야 한다.
음식 조절
페인골드 박사의 식이 요법은 많은 경우에 활동과다증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그가 권장하는 식이요법은 살리실산을 함유하고 있는 모든 음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살리실산을 함유한 식품 : 아몬드, 체리, 사과, 오이, 살구, 건포도, 검은 딸기(Black Berries), 구스베리, 보이젠베리(Boysenberries), 포도, 넥타린, 오렌지, 복숭아, 플럼, 자두 (Prunes), 레즈베리 (Raspberries), 딸기, 토마토
또한 BHT를 함유하고 있는 식품, 그리고 인공색소와 조미료를 함유하고 있는 음식들은 먹이지 말아야 한다. 4~6주 동안의 식이요법 후에 아이에게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위에 언급한 음식들을 시험적으로 한번에 한가지씩 다시 먹기 시작한다. 만일 위에 언급한 식품 한가지를 3~4주 동안 시험적으로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과다증이 증가되지 않으면, 다른 음식 한가지를 추가해서 그 음식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를 살펴본다. 이런 방법으로 위에 언급한 식품들을 모두 시험해 보는 것이 좋다. 이러한 식이요법이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을 경우,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페인골드 박사는 온 가족이 아이와 함께 식이요법을 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아이가 식이요법을 따르는데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음식 알러지가 활동과다증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설탕과 우유가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계란, 옥수수, 밀, 감귤류, 소고기, 돼지고기 역시 알러지성 식품이다. 커피, 차, 콜라, 그리고 초콜렛과 같이 위를 자극하고 신경을 흥분시키는 음식들 역시 활동과다증의 아이들의 식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또한 식초가 함유되어 있는 식품들, 치즈, 신 김치, 간장, 된장을 포함한 모든 발효 식품들과 베이킹 소다와 베이킹 파우다가 첨가된 식품들, 그리고 대부분의 매운 음식이나 자극성의 음식 역시 신경을 흥분시키고 위를 자극하는 음식에 포함된다. 당분과 정제된 탄수화물의 섭취를 엄격하게 금지해야 하는데, 이러한 음식물들 대신에 콩, 현미, 그리고 신선한 야채와 과일과 같이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이러한 음식들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비타민 B와 미네랄을 풍부하게 공급하지만, 가공된 식품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화에 소요되는 시간도 길다. 자연 그대로의 음식으로 식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부엌에서 절대적인 개혁이 일어나야 하며, 건강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약물 사용법
흔히, 활동 과다증의 치료를 위한 약물이 식욕의 저하, 근육의 경직, 몸의 흔들림과 경진, 현기증, 변비, 불면증, 두통과 복통을 일으키며, 신경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가 증가되어 손톱을 물어 뜯는 것과 같은 행동들을 초래하게 한다. 어떤 아이들은 알러지 증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약물들은 성장을 억제한다는 연구 자료도 있다.
약물의 사용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말살시키며,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력을 사용하여 행동을 고치려고 하는 대신에 약을 의지하도록 만든다.
감자의 영양적 가치
감자는 많은 양의 비타민 C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훌륭한 건강식품이다. 감자가 대중화 되면서부터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생기는 괴혈병이 점차적으로 보기 드문 질병이 되었다.
감자를 많이 먹는 나라에서는 이 병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
만일 우리가 한가지 음식만을 먹여야 하는 긴급한 상황에 처할 경우, 우리는 감자만을 먹고서도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낼 수 있다. 사람이 감자만 먹고도 오래 동안 살 수 있다는 것이,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덴마크의 식품학자인 힌헤드 교수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실제로 그와 그의 조수는 3년간의 전쟁기간 동안에 생 감자 또는 조리된 감자만을 먹고 살았다. 두사람의 경험을 통해서 감자가 거의 완전한 영양을 갖춘 음식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감자는 다른 야채들과 함께 먹는 것이 바람직한데, 왜냐하면 감자만을 먹게 되면 변비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감자 고르는 법
감자는 표면이 매끄럽고, 감자의 눈이 깊지 않으며, 상처가 너무 많지 않은 것이 좋다. 너무 큰 감자는 속이 비어 있고, 감자 중심에 고갱이가 많을 수 있음으로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엷은 초록색의 감자는 쓴 맛이 날 수 있다.
감자가 갖고 있는 에너지의 양은 빵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감자가 빵보다 훨씬 더 균형을 갖춘 음식인데 특별히 포타슘, 철분 비타민 C, B1,그리고 G의 양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감자는 칼로리의 양 역시 낮다. 감자는 전분이 많은 음식이기 때문에 신장이 적게 일하도록 한다.
바람직한 감자 조리법
기름에 튀기지 않은 감자는 모두 유익하지만, 가능하면 생 것으로 먹는 것이 좋다. 일단 표면이 벗겨진 생감자는 빠르게 산화되기 때문에 즉시 먹어야 한다. 감자즙 보다 더 빨리 푸른색으로 변하고 발효되는 음식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자는 생으로 썰어저 샐러드에 넣어서 먹을 수 있다. 맛을 내기 위해 감자를 즙으로 만든 후에 파슬리, 비트, 또는, 다른 채소들과 섞어서 사용할 수 있다. 감자 즙은 원기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식품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비타민 C를 빠르고 풍부하게 공급하는 식품이다. 생감자를 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유익을 놓쳐서야 되겠는가?
감자 껍질에는 많은 양의 무기질 성분이 있기 때문에 껍질을 포함하여 먹는 것이 좋다. 감자가 가지고 있는 포타슘 중에서 60% 이상이 감자 껍질의 가까운 부위에 함유되어 있으므로, 껍질을 깎아 버리면 많은 양의 포타슘을 잃어 버리게 된다. 더우기, 포다슘은 짠 맛을 내기 때문에 감자 껍질을 깎지 않으면 소금을 뿌릴 필요도 없다.
감자를 요리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감자는 단백한 맛을 내기 때문에 각종 요리에 사용할 수 있으며, 가능하면 낮은 온도로 요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낮은 온도에서 감자를 익힘으로써, 영양분이 손실을 막기 위해서는 압력솥을 사용하도록 한다. 어떤 요리 방법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섭취하는 영양을 증가시킬 수도 있고 저하시킬 수도 있다.
감자를 적당하게 찌는 것과 끓이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감자를 증기로 익혔을 때에는 알카리성이 되며, 물에 끓였을 때에는 산성이 된다. 미국 농업 진흥청의 가정 경제 담당 부서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조리법을 사용할 경우에 영양소들이 산화되거나, 열에 의해서 파괴 되어 물에 용해되기 때문에 음식물에 있는 무기물과 비타민을 포함한 필수 영양소들을 조리 과정에서 32~76% 나 상실하게 된다고 한다. 압력솥으로 조리를 할 경우 산화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리를 하기 위하여 많은 열이 소모되지 않고, 물이 없이도 조리할 수 있다. 감자를 증기로 익히면, 비타민과 무기물이 손실되지 않고 보호된다.
구운 감자를 먹을 때에는, 잘 구워진 감자를 둘로 반쯤 쪼개고 그 사이에 아보카도와 견과류를 넣어서 함께 먹으면 매우 좋은 맛과 영양을 함께 섭취할 수 있다.
감자의 치료 효과
감자의 소화 과정에서 생기는 알카리성 회분(alkaline ash)은 산성증(acidosis)을 치료하며, 카타르(catarrh: 점막의 질환) 상태를 치료하기도 한다.
점막의 질환을 치료하려면 감자의 표면을 약 0.5인치(1.3세티미터) 두께로 깍아낸 다음, 그것을 국이나 스프에 넣고 짧은 시간 동안만 조리한다. 이렇게 조리한 국이나 스프에는 중요한 미네랄 성분들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감자 스프는 요산과 위 그리고 신장에 질병이 있는 사람의 치료에 많은 이익을 주며, 신체 조직에 미네랄 성분을 공급하기 위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감자 스프를 만들기 위해서 약 3/4인치의 두께로 6개의 감자의 껍질을 벗긴 다음 20분 정도 끓인다. 원한다면 맛을 내기 위해 셀러리를 첨가한다. 만일 위가 자극을 받으면 오크라(okra)를 넣는다.
감자에 있는 포타슘은 강한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간장에 활력과 탄력성을 주며, 유연한 근육의 움직임을 도와준다. 이것은 또한 몸의 건강과 좋은 체질들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포타슘은 몸의 “치료자”이며, 또한 몸을 회복시키는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이것은 또한 좋은 심장을 갖도록 하는 요소이며, 감자는 심장에 발생하는 모든 질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몸의 왼쪽 부분 또는 심장이나 몸의 내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감자는 최고의 식품이다.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온 치료법으로서, 감자 조각을 신체 중에 충혈이 생긴 부분 위에 습포를 만들어서 붙인다. 감자는 몸 안에 쌓여 있는 독소 물질이나 정맥 충혈들을 끌어내는 강력한 청소제이다.
치료제로서 사용하는 감자는 생감자 즙으로 마시는 것이 가장 강력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감자 즙은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 이외에 내장에 생기는 각종 질병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다.
질병을 치료하는 무우
좋은 질의 무우는 담백한 맛과 함께 모양이 좋고 부드러우며, 단단하면서 연하며 싱싱하다. 무우 잎의 상태는 무우의 질을 나타내지 않는데 무우가 그 속에 구멍이 많고 질긴 반면에 잎은 신선하고 색이 푸르고 선명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잎은 시들시들하고 많이 상했다 할찌라도 반면에는무우는 신선하고 고갱이가 전혀 없을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자란 무우는 일반적으로 맛이 강하고 단단하다. 손가락으로 약간의 힘을 주어서 무우를 누르면 고갱이가 있는지 속에 구멍이 많은지 확인할 수 있다.
치료적인 효과
무우는 배뇨를 촉진하며 식욕과 소화를 촉진시킨다. 무우즙은 카타르(catarrh: 점막의 질환) 상태를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면, 방광에 있는 담석을 방출 시킨다.
무우와 다른 야채를 함께 갈아서 즙으로 마시면 좋다. 이러한 즙은 특별히 혈맥동(sinuses)에 있는 카타르 충혈을 제거해 주며, 또한 담낭과 간을 깨끗이 하는데에도 도움을 준다. 1/3의 오이과 1/3의 피망과 1/3의 무우를 섞어서 만든 즙을 사용하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만일 즙을 마시기 불편하면, 사과즙을 넣어서 마셔도 된다.
신경계에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우와 자두와 쌀겨로 만든 즙이 매우 효과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즙은 비타민 B를 풍부하며 함유하고 있으며, 담즙이 잘 순환하도록 도와 준다.
치즈는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품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치즈가 갖고 있는 독특한 맛을 좋아하는데, 약 500~1000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치즈 중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치즈를 골라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치즈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근래에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연간 10,000,000톤이 넘는 막대한 양의 치즈가 생산된다고 한다. 또한 몇 년전에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미국에서 일년에 한 사람이 섭취하는 치즈의 양은 약 9.8 킬로그램 (21.5 파운드)에 달한다고 한다.
치즈가 이토록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단순히 치즈가 갖고 있는 특유의 맛을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치즈가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고 믿고 있다. 왜냐하면 치즈에는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칼슘과 단백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골다공증의 발병률이 급격하게 증가됨에 따라 칼슘에 대한 관심은 근래에 크게 증가되고 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치즈와 같이 우유로 만든 식품들을 애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치즈는 과연 안전한 식품인가? 치즈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서, 아래에 나열된 문제점들에 대한 염려도 증가되고 있다.
1. 치즈에는 상당량의 포화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함유되어 있다.
2. 치즈는 많은 양의 소금(나트륨)이 함유되어 있다
3. 어떤 특정 치즈에는 인체에 유해한 화학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다.
4. 치즈는 심각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에 의해서 오염되기 쉽다.
그럼 이제부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지방
식품과 건강 문제의 전문가들은 음식에 들어 있는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양을 제한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고지방-고콜레스테롤의 식품은 심장병과 동맥 경화증, 그리고 당뇨병과 암 이외에 다른 많은 질병들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식품학자들과 의학자들은 우리가 섭취하는 지방의 양은, 섭취하는 총 칼로리의 30% 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치즈의 경우, 일반적으로 치즈의 총 칼로리 중에서 70~75 % 가 지방으로부터 만들어 진다. 그래서 치즈 가공업자들은 우유의 지방 함유율을 낮춘 탈지유를 사용하여 치즈를 만듦으로써, 치즈의 지방함유율을 낮추었지만, 그것 역시 치즈의 총 칼로리의 약 50~55%가 지방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치즈를 건강에 유익을 주는 건강 식품으로 추천하기에는, 치즈가 함유하고 있는 지방의 양이 너무나 높다.
식품이 함유하고 있는 지방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두가지를 면을 생각해야 하는데, 하나는 그 식품이 함유하고 있는 지방의 양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의 종류이다. 건강을 유지하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섭취하는 지방의 양을 제한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지방을 섭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포화 지방 (인체에 유해한 지방으로써, 불포화 지방과 대조되는 지방)은 혈액의 콜레스테롤 수치를 증가시킨다. 치즈에 함유되어 있는 전체 지방의 약 2/3는 포화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치즈는 1 온스당 20~30mg의 콜레스테롤을 함유하고 있다. 1/2 컵의 커티즈 치즈 (cottage cheese)는 17mg 을 함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1% 지방이 함유되어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 커티스 치즈(1/2 컵)에도 4~5mg의 콜레스트롤이 함유되어 있다.
치즈에는 해로운 콜레스테롤이 존재하는데, 그것보다 더 위험한 물질이 치즈가 체내에서 소화되는 과정에서 상당량 생성된다. 치즈에 포함된 콜레스테롤이 소화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이 독성 물질은 매우 적은 양으로도 동맥 혈관벽의 세포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순수한 콜레스테롤의 소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물질은 혈관벽에 미세한 영향을 미치는 미치는 것에 반하여, 치즈의 콜레스테롤이 소화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독성 물질은 혈관벽에 매우 유해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독성 물질들은 피자나 라자냐 처럼, 중간 높이의 온도에서 치즈를 요리하는 음식을 섭취하였을 경우에 많이 생성된다.
소금
치즈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소금을 넣은 과정은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왜냐하면 충분한 양의 소금을 넣어야만 박테리아 (starter bacteria)가 자라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치즈의 종류에 따라서 소금의 함유량에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치즈에는 많은 양의 나트륨이 함유되어 잇다. 커티즈 치즈(cottage cheese)에는 반 컵당 460 mg의 나트륨(소금)이 함유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치즈에 함유되어 있는 나트륨의 평균치는 1 온스당 약 250 mg 이다. 치즈의 포장에 표시되어 있는 나트륨의 함유량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트륨을 많이 섭취하면 할수록, 심장 혈관 질환의 발병률이 증가되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하루에 섭취하는 소디움의 양을 2,400mg(소금 1티스푼) 이하로 제한할 것을 권장하고 있음)
치즈가 함유하고 있는 독성 물질들
치즈에는 여러가지의 독성물질들이 함유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플라톡신(aflatoxin)이다. 아플라톡신 (aflatoxins)은 곰팡이균에 의해서 만들어진 식품으로부터 생성되는 발암성 화학 물질이다. 때때로 곰팡이가 번져있는 곡류나 너트(nuts)로 만든 사료를 먹은 소의 젖에서 아플라톡신이 발견되는데, 이와 같이 아플라톡신으로 오염된 우유를 원료로 사용하여 치즈가 만들어 질 수 있다.
소의 먹이가 곰팡이로 오염되었을 경우 이외에도 아플라톡신은 생성될 수 있다. 아플라톡신은 치즈를 만드는 제조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과학자들은 비교적 높은 습도에서 오랫동안 숙성시킨 치즈는 아플라톡신이 형성되기에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발표하였다.
이러한 치즈의 제조 과정에서 또 다른 종류의 발암 물질들이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치즈에는 암을 유발시킬 수 있는 잠재적 요인들이 매우 높이 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다. 남성에서 있어서, 치즈의 섭취량은 대장암의 발병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일주일에 치즈를 3번 이상 먹는 사람은 치즈를 일주일에 1번 이하로 먹는 사람들 보다 대장암에 걸릴 위험률이 2배나 높다.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연구 조사에 의하면, 1,010명의 유방암 환자들과 악성 질병이 없는 1,950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비교한 결과, 유방암이 걸릴 위험률이 치즈를 먹는 횟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바이오제닉 아민은 치즈에 있는 또 다른 부류의 화학 물질로서, 치즈를 숙성시키는 결과로서 형성되는데, 이 화학물질은 편두통, 구역질, 고혈압, 위경련과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치즈와 감염 물질
치즈는 위험한 미생물들이 번식하기 쉬운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살모넬라 (salmonella)”라고 불리우는 미생물이다. 이 미생물은 치즈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할 수 있다. 1984년 3월~7월 사이, 캐나다에서만 약 10,000명의 사람들이 살모네라 계통의 미생물에 의해서 전염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발병 원인 중의 하나가 치즈였다.
리스테리아 (Listeria)는 치즈를 오염시킬 수 있는 또 하나 위험한 미생물이다. 신생아들과 면역성이 약한 사랍들은 이 세균에 대해 매우 약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다. 리스테리아로 인하여 발병되는 질병은 심장이나 뇌를 감염시킬만큼 매우 치명적일 수 있다. 리스테리아를 예방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미생물은 치즈 산업에 매우 심각한 위협을 주고 있다.
숙성시키지 않은 치즈라고 할지라도, “부루셀라 (brucella)”라는 심각한 전염성 질병을 옮기는 매체가 될 수 있다. 부루셀라에 감염되면 체중이 감소되고, 저열이 나며, 냉기를 느끼고, 땀이 나는 것이 보통이다. 임파선과 비장이 부어 오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간, 심장, 뼈와 관절, 폐, 눈 그리고 남성 생식선 등과 같은 기관 조직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치즈 대신에 무엇을?
많은 사람들이 치즈를 먹음으로써, 두통과 구토 또는 알러지와 같은 문제를 갖게 된다. 이러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치즈를 먹지 않았을 경우에 어떤 호전적인 효과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물론 치즈를 먹었을 경우, 즉시로 어떤 나쁜 결과를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치즈를 마음놓고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많은 연구 결과들이 치즈가 우리의 몸에 미치는 유해한 영향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코 치즈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치즈가 신체에 미치는 여러가지 유해한 영향에 대한 염려가 증가함에 따라서, 치즈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치즈 대용품들이 마켓에 나오고 있는데, 대개 이러한 대용품에는 “non-dailry (우유가 포함되지 않았음)”라는 글이 쓰여져 있다. 치즈를 식탁에서 제거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책은 아니지만, 치즈 대용품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할 수 하다. 가까운 슈퍼마켓이나 건강식품점에 가면, 모양과 맛에 있어서 치즈와 유사한 대용품들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질의 칼슘을 충분하게 섭취하기를 원한다면, 치즈나 치즈의 대용품보다 훨씬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치즈에서 얻을 수 있는 칼슘보다 좋은 질과 풍부한 양의 칼슘을 채소와 곡류에서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그릇의 시금치에 들어 있는 칼슘의 양이 한 그릇의 치즈에 함유되어 있는 칼슘의 양보다 두 배나 더 많다. 브라콜리, 밤, 대부분의 푸른잎 채소들, 귀리와 해초류, 콩류, 두부, 그리고 순무에도 이와 비슷한 양의 칼슘이 함유되어 있다. 치즈와 우유의 섭취를 중단하고, 곡류와 채소를 다양하게 갖춰서 식사를 한다면, 칼슘 부족으로 인한 질병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백질에 많은 관심을 나타낸다. 미국에서 단백질의 일일 권장량은 여자의 경우에 46 그램이고, 남자의 경우에는 52 그램이며, 아이들은 23~36 그램이다. 이러한 숫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안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 몸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을 제정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체가 얼마 만큼의 단백질을 요구하는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민족과 인종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18~20그램의 단백질 만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진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앓고 있는 각종 퇴행성 질병들을 앓고 있지 않다. 요즈음은 오히려 과다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건강을 해치고 질병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선진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백질의 섭취량을 늘리는 대신에 줄여야 한다. 왜냐하면 고기나 치즈 또는 우유로 만든 식품을 먹지 않는 철저한 채식가들도 미국의 단백질 일일 권장양 (USRDA) 보다 많은 양의 단백질인 61-83 그램을 섭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치즈를 먹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치즈와 우유 제품은 편두통으로부터 암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질병의 원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치즈와 우유를 대신할 수 있는 천연 식품들을 자연계 속에 풍부하게 준비해 두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마련해 두신 최선의 식품들을 선택하지 않고, 입맛과 욕구가 요구하는대로 먹는다면, 결국에 가서는 그 댓가를 치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장 31절.
Landmark 에서 발췌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 속에 생명의 길로 들어 섰다.
300년 전, 베드포드 감옥에서 쓰여진 존 번연의 역작, “천로역정” 에는 인생 여정에 나타나는 온갖 경험과 슬픔, 낙담, 좌절, 불신, 회의와 같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영감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생애의 빛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을 묘사한 또 하나의 천로역정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진리의 좁은 길을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그리스도인의 꿈”에 담겨져 있는 영감적인 교훈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생애의 빛 편집실
어느 그리스도인의 꿈
“꿈 속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행장을 갖추고 먼 여행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나의 가족도 마차에 짐을 가득 실고서, 그들과 함께 여행길을 떠났다. 한참 가다 보니, 길이 점점 가파라졌다. 길의 한 쪽은 깍아지른듯한 낭떠러지였으며, 다른 쪽은 매우 미끄럽고 높은 바위벽이었다. 여행을 계속할수록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더 가파르게 되었다. 어떤 지점에 이르자, 그 곳은 길이 너무 좁아서 더 이상 마차를 끌고서 갈 수 없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차에 실린 짐을 말등으로 옮겨 실은 다음, 마차를 뒤에 남겨둔채 말을 타고 여행을 계속하였다.
“가면 갈수록 길은 계속 좁아졌다. 절벽 아래로 미끄러져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바위벽에 바싹 붙어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말 등에 실은 짐보따리가 벽에 닿아서 절벽쪽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짐보따리를 말등에서 내려 절벽 아래로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말을 타고서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길은 더욱 좁아져 갔으며, 우리는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 어려운 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한 손이 우리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굳게 잡아서 인도하여 주는듯 하였다.
“길이 너무나 좁어져서,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말을 버려둔채 일렬로 서서 앞사람의 발걸음을 따라 가야만 하였다. 이 때, 작은 밧줄이 위로부터 우리 앞으로 드리워졌다. 우리는 매우 좁아진 길에서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밧줄을 꼭붙잡고 전진하였다. 우리가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 밧줄도 앞으로 움직이면서 우리를 인도하였다.
“여행길의 종점이 가까워질수록, 길이 너무나 좁고 험해지자, 우리는 신고 있던 신발과 양말까지 벗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행의 마지막 지점에 거의 당도하였을 때에는, 우리와 함께 여행하던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여행길에서 만나게 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여행을 포기하였다. 길이 좁아지면서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뒤로 쳐지기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시련과 고난을 통과할 때마다 더욱 더 분발하여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진지한 모습으로 전진하였다.
“우리가 길에서 떨어질 위험은 더욱 증가해 갔다. 우리는 바위벽에 바싹 붙어 갔지만, 길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우리의 발은 안전하게 디딜 수 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거의 모든 체중을 밧줄에 걸어야만 하였다. 우리의 발이 땅에 닿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몸 전체가 위에서 내려온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함께 동행하는 여행자들도 마찬가지 형편이었다.
“저 절벽 아래로부터 떠들썩한 환락의 소리가 들려 왔다. 우리를 모욕하는 조롱 소리가 들려 왔으며, 저속하고 세속적인 노래 소리가 들려 왔다. 슬픔과 좌절과 허무함을 토로하는 소리가 방탕한 웃음소리와 섞여서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 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절벽 아래의 어두움이 짙어지고, 들려오는 소리들이 심해지면 질수록 더욱 더 조심스럽게 좁고 험한 길을 걸어 갔다. 우리들 각자가 매달려 있던 밧줄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굵어졌다.
“나는 바위벽의 이곳 저곳에 얼룩져 있는 피자국을 보았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도 우리와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 좁은 길을 걸었다면, 우리도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아픈 발에서 흘러내린 피자국을 보면서, 우리는 낙망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깊은 골짜기에 다다랐으며, 거기서 길은 끝났다. 이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점점 굵어져서 마침내 우리의 몸만큼이나 굵어진 밧줄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하여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의지하고 있는 이 밧줄은 정말 믿을만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밧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내 앞에 서있는 남편의 입에선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으며, 나의 얼굴에서도 진한 땀이 흘러 내렸다. 무서운 믿음의 투쟁이 우리 앞에 있었다. 이 마지막 순간에서 실패한다면, 지난 여행 동안에 우리가 참았던 모든 고난과 고통들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골짜기의 저편에는 푸른 풀밭의 아름다운 평원이 있었다. 하늘 궁전에서 퍼져 나오는 영광의 빛은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이 골짜기를 건너갈 수 있을까? 만일 밧줄이 끊어진다면, 우리는 죽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엇이 이 밧줄을 붙들고 있을까?’ 라는 염려의 말들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밧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뿐이다. 좁은 험로를 걸어오는 동안 그것은 줄곧 우리의 유일한 의지가 되었으며, 유일한 안전이 되었다. 단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낙담케 한적이 없었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이러한 말이 들려왔다. ‘하나님께서 그대가 잡고 있는 밧줄을 붙들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 그대들을 여기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신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 모두는 그 말에 동의하였다.
“나의 남편이 먼저 줄을 잡고 골짜기 저편의 아름다운 땅으로 건너 뛰었다. 나도 곧 뒤따랐다. 아, 평안한 안도감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정신이 우리의 온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골짜기를 건너 온 모든 여행객들은 하나님의 찬양하는 승리의 함성을 크게 외쳤다. 그들의 음성에는 완전한 행복이 담겨져 있었다.”
꿈의 의미
진리는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여행객들을 두무리로 나눈다. 진리를 진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진리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고 분발하여 전진하며, 진리가 요구하는 시련과 희생이 두려워서 진리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서 어둠 가운데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달하는 사람들은 진리가 인도하는 대로 끝까지 순종하며 따라가는 여행객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진리가 주는 고난에 참가할 뿐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통과하면서 인내와 겸손의 교훈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회오리 바람과 폭풍우와 홍수 속에서도 당신의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더 큰 위험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에게 재난을 허용하신다. 당신의 백성들이 어려움과 고난이 없는 길을 걸어갈 때, 그들의 믿음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음성에 진지함이 사라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허용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시련들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서 더럽고 추한 기질과 이기심들을 버리도록 인도한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더욱 더 온유 겸손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성품을 통하여 영광을 받게 되신다.
여행자의 단계적 경험
첫번째 시험 : 길이 좁아져서 마차를 절벽 아래로 버려야만 했을 때, 마차에 실려 있는 짐과 마차가 주는 안락함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 “이제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까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여기서 쉬자” 라고 말하면서, 마차에 걸터 앉아 쉬기로 결정하였다.
두번째 시험 : 첫번째 시험을 견디었던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두번째 시험에서 실패하였다. 길이 좁아져서 말등에 실려 있던 짐보따리들을 내려서 절벽 아래로 던져야 했어야만 하였을 때, 어떤 사람들은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향하여 아래로 내려갔다.
세번째 시험 : 길이 점점 좁어지고 험해져서, 신발과 양발까지 벗어야만 하였을 때, 첫번째와 두번째 시험에 견디었던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바닥이 아프다고 불평하면서 되돌아 내려갔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매일 계속되는 시험과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하늘을 향하여 전진하는 여행길이다. 진리가 희생과 고난을 요구할 때, 그것에 순종하기로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실수와 부족한 성품 때문에 고통을 당할 때,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깍이고 다듬어질 수 있도록 조용히 인내하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
왜 하나님께서는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말과 마차 걱정은 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조금 올라가다가 짐을 버려야 하며, 결국에는 신발과 양말까지도 벗어 버려야 한단다” 라고 미리 알려 주시지 않으셨을까?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한꺼번에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을까?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자비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뜻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우리의 모습을 동정과 자비의 눈으로 내려다 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뒤엉켜 있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한꺼번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위대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한번에 한계단씩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요한 시험과 고난을 단계적으로 허락하심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불필요한 짐보따리들을 버리도록 인도하신다.
여행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혼돈되고 당혹케 하는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어두움을 뚫고서, 진리의 빛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좁은 길이 아무리 험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어떤 길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 말라. 좁은 길은 진리의 길을 의미한다. 좁은 길은 진리가 어떤 것을 요구할 때, 그 요구가 자신의 이기적 본성과 상충될지라도 그것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서 순종하며 전진하는 길을 의미한다. 혹시, 그대는 여행길이 점차로 좁아질 때마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리면서 서성거리지 있지는 않는가?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일지라도, 그대는 계속해서 전진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진리를 수호하는 하나님의 군사이다. 군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목적과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의 군사들은 불편함, 어려움, 희생, 고난과 같은 힘겨운 의무들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고르고 선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용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에 골몰해서는 안된다. 사단은 모든 힘과 전략을 다하여 우리를 지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우리의 자아(self)를 통하여 우리를 제압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진리만이 우리를 지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군대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메고, 대장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4
밧줄을 잡고 가는 그리스도인들
여행길이 너무나 좁아졌을 때, 사람들은 위에서 내려온 밧줄에 자신의 온 체중을 실고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발은 땅을 밟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이 땅을 여행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진리의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밧줄에 온 몸을 의지하고 전진하는 여행자들을 비웃고 조롱하는 소리가 절벽 아래의 어둠 속으로부터 들려왔지만, 밧줄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흩트릴 수는 없었다. 바위벽과 좁은 길 위에는 중간 중간 핏자국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보다 앞서 그 길을 걸었던 순교자들의 혈흔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이 걸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들이 겪지 않고 극복하지 않았던 것들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분의 발걸음이 이미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다져 놓았기 때문에, 비록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서도 걸을 수 있다.
길이 좁아지고 가파라질수록, 밧줄에 대한 의존도는 증가되었으며, 밧줄에 대한 의존도가 커질수록 밧줄은 점점 굵어졌다. 그런데, 밧줄은 믿을 만한 것인가? 무엇이 밧줄을 붙들고 있는가? 세상 끝이 다가 올수록 사단은 온갖 기만과 계략을 다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므로 종말이 다가올수록, 우리는 하늘이 인정하는 진리의 말씀에 우리의 온 생애를 맡겨야 한다. 진리를 붙잡은 우리의 믿음에 더욱 많은 힘이 주어져야 한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밧줄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붙잡고 있는 밧줄은 정말 믿을만한 것인가? 그것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진리인가?
또한 밧줄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전진하는 믿음을 상징한다. 그대는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 나아가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진리를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해서는 않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피하지 말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그대로의 진리의 길이어야 한다. 그대가 진리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그대가 아무리 열심히 그 길을 걷는다고 할지라도 그 길의 끝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길인 좁은 길에는 고난과 아픔이 있으며, 진리에 순종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희생과 외로움이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 길을 피하여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면, 바로 그것이 넓은 길을 걷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육체의 욕망과 본능을 만족시키는 넓고 평탄한 길을 선택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
구세주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진리 때문에 예수께서 받으셨던 반대와 미움을, 좁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 여행자들도 견디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온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린다면, 그분께서는 즉시로 우리의 마음을 받으셔서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신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의 영의 지배를 받게 되어서,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된다.
그대는 그리스도인의 여행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진리를 어떠한 태도로 대하는가? 진리가 그대의 생애의 방향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그대 자신이 좋아하는 진리만을 골라서 받아들이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에 따라서 생애하는 사람이다. 진리가 그대에게 마차를 버리라고 요구하면 마차를 버려야 하고, 진리가 그대에게 말을 버리라고 요구하면 말을 버려야 한다. 진리가 인도하는 길이 좁아져서 등에 짊어진 짐보따리를 버리라고 요구하면, 주저없이 그것을 버려야 하며, 좁은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신발과 양말을 벗으라고 요구하면,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진리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이 커다란 희생이나 손해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것은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라 그대의 구원에 지장이 되고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구원을 위해서 항상 최선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라.
그대가 잡고 있는 밧줄은 진리이어야 한다. 진리인 굵은 밧줄이 그대의 인생을 인도해야 한다. 사단은 그대의 주위에 여러가지 비슷한 밧줄을 느려뜨려 놓음으로써, 그대를 멸망으로 끌어 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조심하라. 윗 방향에서 내려온 밧줄이라고 해서 아무 것이나 붙잡아서는 안된다. 사단이 내려준 밧줄을 붙잡고 있는 그대의 믿음이 아무리 진지하다고 할지라도,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대는 먼저 진리의 밧줄을 찾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 밧줄에 온 몸을 실고서 따라가야 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이다. 진리의 밧줄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손으로 밧줄을 굳게 붙잡아야만 한다. 절벽 저쪽에 있는 하늘 본향으로 건너 뛰기 위해서는 오직 밧줄만을 의지해야 한다. 그대의 믿음 전체를 밧줄에 실고서 힘껏 뛰어야 한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에 나타나는 유혹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가는 믿음을 소유하자!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진리의 밧줄에 의지하여 좁은 길을 걷는 것, 바로 이것이 그대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성경에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길과 그 지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깊이 깨닫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강병국
한 부자 법권이 예수께 달려 와서 무릎을 꿇고 물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는 그에게 계명들을 열거하시면서 이것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 관원은 어릴때부터 그것들을 다 지켜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때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가 버린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마 19장, 막 10장, 눅 19장 참조).
이 부자 법관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달려 왔다”고 마가복음 10:17은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진리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훌륭한 종교인이었다는 뜻이다. 그는 진실로 영생에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법관은 어딘지 모르게 늘 마음속에 맴돌고 있는 한 가지 불편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그는 열심히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활동하며 선교 사업과 구제 사업에 많은 헌금들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도 그에게 진정한 평안과 구원의 확신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드디어 예수께 나아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의문을 솔직하게 털어 놓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자기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선하게 살고 있으며 종교적인 생활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를 칭찬하시고 영생에 이미 들어갔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줄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는 깜짝 놀랐다.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에 그만 그의 마음속이 완전히 폭로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기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마음속 깊은 동기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겉으로는 잘 지키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찌만, 사실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갇그 차 있었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당황하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영생을 얻기 위해서일지라도 자기가 가진 그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슬픈 말씀 가운데 하나를 바로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 말씀은 “그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부자 법관에게 던진 질문을 통하여 우리 인류 모두에게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계신다. 그 첫째는, 계명을 지키는 일은 겉으로 행하는 행위보다는 오히려 마음으로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맞는 새로운 마음을 창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타고난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도 없으며 또한 지키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하늘에 들이실 수가 없다.
이때에 제자들은 심히 놀라서 서로 말하기를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저희를 바라보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이란 우리가 쌓아 나가는 고행 길이 아니다. 구원이란 우리가 공로로 얻어 내는 상품이 아니다. 구원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는 선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선물을 받기 위해 믿음의 손을 뻗쳐야 한다. 그때 그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경험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을 때에 굉장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호가 다루고 있는 구원의 단계들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계단들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힘과 노력으로 쌓아 나가는 경로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페이지부터 전개되고 있는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길과 그 지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오늘날 흔히 유행하고 있는 오해된 구원에 대한 이해들이 속히 바로 잡아지게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구원에 대한 두가지 복음이 있다. 한무리는 진리를 발견하고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가운데 승리의 삶을 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무리는 복음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죄와 세속의 노예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있는 가르침과 신앙의 방향이 정확하게 성경과 일치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수많은 목사들의 설교와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진리이고 어떤 것이 오류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물론, 이것을 구별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나 성직자들일 경우, 평신도의 입장에서 그들의 설교와 가르침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각종 가르침과 설교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열렬한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리에 대한 지식은 크게 결핍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진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큰 교단에 속한 교회에 다님으로써, 자신의 영적 안전을 도모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비록 정통이라고 불리우는 교단에 속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각 단일 교회의 사역자들이 개인적으로 믿는 바가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분들이 어떠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의 가르침을 받아드렸느냐에 따라서 구원을 설명하는 그들의 설교와 가르침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교회의 이름에 자신의 영생을 맡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우기 각 성직자들의 개인적인 영성과 신앙체험에 따라서, 그들이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들어온 각종 가르침과 설교들을 성경을 통하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지적 판단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거나, 인간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팔자”나 “운”에 맡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사야 8:2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생에 깊은 관계가 있는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떤 조직이나 직분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함으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그 말씀이 타당하고 논리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가르침과 설교와 학설이 있는데, 어떻게 평신도들이 그러한 것들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러한 질문을 가진 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하여, 이 글을 준비한 것이다. 기독교회 내에 300여개의 교파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주장하는 여러 종류의 신학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초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두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참된 복음
1. 믿는 자의 마음과 양심을 새롭게 변화시켜 줌으로 써, 세속과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생애를 통하여 구 원에 이르게 한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깊은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한다
오해된 복음
1. 이기적인 마음과 성품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정욕 과 죄의 습관들에 물들어 있는 변화되지 못한 생애 를 살면서도,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였으므 로 더 이상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 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는 죗된 삶을 살면서도 구원에 대한 잘못된 안정감을 갖도록 만들 어 준다.
참된 복음과 오해된 복음을 분별하는 방법
참된 복음 : 구원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다.
오해된 복음 :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 saved, always Saved).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
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
2. “그런즉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명기 7:9
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여호수아 22:5
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5.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한일서 5:2~5
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는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7,18
7.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6
8.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13
설명 :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이미 과거에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현재 또는 장래에 자신이 어떤 죄악적 습관에 빠져서 살아갈지라도, 자신이 이미 받은 구원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자기 기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영적인 성장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에 자신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던 단 한번의 결정에 의해서 확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는데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으며, 믿는 자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서 잃어버릴 수도 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 10:3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24.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디모데후서 2:12
참된 복음 : 각 사람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다.오해된 복음 : 각 사람의 구원과 멸망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예정론).
인간의 지성적 선택에 의거한 구원
1.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2.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에스겔 18:20,21
4.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로마서 8:1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설명 : 예정론은 중세기 기독교회의 잘못된 신학으로부터 유래 되었다. 예정론의 원조라고 불리우는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는 중요한 진리를 간과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지정해 놓으셨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있도록 정해 놓으셨다는 예정론을 세우게 되었다. 물론, 에베소 1장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 표현을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고 해석하면 성경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리고 만다.
종교 개혁자이며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예정론의 모순을 밝히 드러내었지만, 예정론을 믿는 어거스틴의 후예들이 아직도 교회 안에 많이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예정론을 받아들일 경우, 그는 유혹과 죄를 극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며, 다른 영혼을 위하여 전도해야 할 이유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죄와 세속의 종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구원받았다는 두려운 착각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지” 만(딤전 2:4), 각자의 자유 선택에 따라서 진리에 순종하는 자들은 영생에 이르고, 불순종하며죗된 삶을 고집하는 자들은 결국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죄에 머물러 있기로 고집하는 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린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브리서 10:26,27 (예정론은 살아남는 이들 제14호, 16페이지에서 다루었음)
참된 복음 : 그리스도인은 죄를 이길 수 있으며,또 이겨야 한다.
오해된 복음 :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 재 강림 하실 때까지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승리의 요구와 약속들
1.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2,23
2.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4.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5:14
5.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6.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로마서 8:6,9
8.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9.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리라.” 갈라디아서 5:16
10.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11.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브리서 8:10
12.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서 24절
13.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순종하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4
14.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마태복음 12:50
설명 :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는데,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죄를 미워하고 버리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예언을 보면, 각 교회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자들의 모습을 “이기는 자”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이긴 자들인가? 죄와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이기는 자”에게만 영생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 3:21.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때까지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는 오류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구원과 예수 재림을 위하여 올바로 준비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위험한 기만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죄를 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진실한 회개와 개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아무나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자신의 마음과 생애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만이 힘입어 죄를 이길 수 있다.
참된 복음 :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법적인 면제 조치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된 상태를 의미한다. (칭의란, 죄인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게 되었다” 는 선언을 받는 것 임)
오해된 복음 : 칭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법적 조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의롭다는 선언을 내리시는 조건
1.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 하겠노라. 출애굽기 23:7
2.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7
3.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3,24
4.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8
5.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6 .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7
7.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28:13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9.
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설명 : 그리스도께서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사법적인 선언이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에게 무죄함을 선고하는 하나님의 선언은 반드시 회개한 죄인의 마음 상태와 정확하게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거짓말 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에 죄를 품고 있는 죄인에게 의롭다는 선언을 내리실 수 없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7:15
회개란 지적으로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범한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기 때문에 그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마음의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하여 순종하겠다는 결심으로 표현된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시는데,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변화가 죄인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면,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에서 성결로, 불순종과 반역으로부터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은혜가 자신의 죄를 가리워 주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생활 가운데 죄와 탐욕이 그대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다고 믿는다. 만일 그렇다면, 십자가의 은혜가 죄를 인정하고 허용한단 말인가?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에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 속에,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모하는 변화를 가져오는 위대한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그 때까지의 우리의 생애가 아무리 죄로 가득찼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전혀 죄 지은 일이 없는 의로운 사람처럼 가납되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다.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참된 복음 : 성화는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마음이 성화된 사람은 거룩한 생애를 살게 된다.
오해된 복음 : 성화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애쓰는 인간의 율법주의적 노력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인 신앙 생활의 열매
1.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4:3
2.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3.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9:144.
4.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5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베드로후서 1:10,11
6.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5:4
7.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8.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사도행전 15:9
9.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3,4
10.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2,23
1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12.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서 13:21
13.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1
설명 :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한 순종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랑과 충성의 표시이다.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순종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 어떻게 율법주의일 수 있는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행위와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참된 순종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류를 위한 하늘 아버지의 선물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온 마음을 다하여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을 율법주의자라고 정죄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화(거룩함)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스럽게 맺히는 영적 열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칭의(용서, 의롭다 하심)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성화(거룩함)된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처럼, 믿음을 통하여 성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구원받을 성도들이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선물로 설명하고 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칭의) 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성화)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도행전 26: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칭의),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성화)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칭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성화) 하였음이라.” 로마서 8:1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칭의)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성화).” 마태복음 6:12
복음은 생명이 없는 학설이나 이론처럼 소개되어서는 안되며, 생애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소개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은혜의 능력을 체험한 참된 증인들이 될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아들이게 된다. 죄인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악의 본거지를 떠날 수 있다. 십자가에 접근할 때마다 그대의 심령은 순화되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었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그대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대의 마음과 성품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순결하게 변화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죄에 대한 그대의 애착심이 죄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많고 속절없는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라. 예수께서는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죗된 그대를 깊은 동정과 슬픔으로 안으시면서, 사랑의 손으로 그대의 상처를 쌓매시고,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 정결케 해주실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그분께서는 그대가 영원한 생명의 길로 들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남들에게 그렇게 되라고 설교하는 대로 제 자신이 거듭나고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도자로서 갖게 되는 평판과 명예의 종이 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영혼들을 저에게로 이끄는 이기심으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시고, 그들을 하늘로 이끄는 주님의 마음을 제게 주소서.
영원한 생명에 접촉하는 이들을 사려 깊고 친절하게 도와줌으로써, 영혼들의 시선을 주님께로만 이끌게 도와주소서. 저로 결코 거칠게 되지 않게 하옵시고, 불필요하거나 가혹한 말을 하지 않게 하시며, 예민한 영혼들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게 도와 주소서. 저로 용기있고 명랑하고 열심있는 종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부르심에 거룩한 열성으로 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저에게 게으름과 죄를 예민하게 느끼는 양심을 주옵소서. 저를 세속으로부터 지켜줄 보호의 방벽을 제 앞에 높이 세워 주소서. 저로 하여금 이것이 안전한가, 저것이 행적정인가, 또는 이것이 인기있는가를 생각지 않게 하옵시고, 이것이 옳을 길인가를 주님께 묻게 하여 주옵소서.
저로 제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높이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저에게 큰 마음을 주셔서, 사소한 일들을 간과하도록 도와 주시고, 고의적인 것이나 부지중인 것이나 그들의 허물을 잊어 버리도록 도와 주옵소서. 제게 은혜를 베푸사 보복하거나 변명하려는 입을 막아 주옵시고, 무엇보다도 저를 반대하거나 저에게 상처를 입힌 자들에게 제가 가진 영향력이나 지위를 사용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저로 제 동료 일꾼들의 사업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저로 사소한 일을 피하고, 진리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모든 일들에서 양보의 정신을 나타내게 하여 주옵소서. 저로 저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에라도 제 윗사람에게 하듯 존경과 예의로 대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를 도우사 일이 잘되지 않을 때, 그 핑계를 찾는 대신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제가 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일들을 남에게 요구하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저로 언제나 형제의 성공을 참으로 기뻐하게 하시고, 그것이 나에게 손해가 될지라도 그의 성공을 위하여 기도하게 도와 주소서. 저로 다른 사람의 실패나 어리석음의 껍질을 벗기지 않게 하시고, 제가 형제에게 대하여 좋은 것을 말할 만한 것이 없을 때에는 입을 다물도록 도와 주소서. “그의 입을 지키는 자는 그의 생명을 지키려니와 입을 크게 여는 자는 파멸을 당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하루에도 여러번씩 기억하게 하소서. 현인의 말씀대로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분을 일으킨다”는 말씀을 기억함으로써, 분노의 신이 저를 유혹할지라도 참게하여 주옵소서. 제 형제가 제 계획이나 제 견해를 밝히 이해하지 못할 때에라도, 항상 은혜를 베풀도록 하옵시고, 다만 원칙과 진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만 하늘이 무너져도 굳게 서게 하옵소서.
저로 경솔하거나 성급한 판단을 행치 않게 도와 주소서. 갑작스런 일에는 즉각적인 관심과 행동을 취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먼저 기도를 드리고 결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그릇 행한 이들을 다룰 때에, 저로 사랑과 자비와 참된 공의를 시행케 하사, 제가 제 자신이 취급받기를 원하는대로 그에게 행하게 하소서.
오! 주님이시여, 저를 도우사 기도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최선보다 못한 것은 아무것도 주님과 당신의 사업에 바치지 말게 하옵소서. 저로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처음과 나중 그리고 최선으로 삼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10.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강병국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교제와 돌보심과 안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분 속에서 우리 영혼이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는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바꾸어 하나님의 계획대로 따르기에 기꺼워하는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고통이나 시련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고통이나 시련들을 이기고
견딜 힘을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데려감을 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신실하게 보존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해야 할 일이나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일을 할지를 알고 또 잘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특권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