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가혹한 삶♡
생각나는 대로 지난 날을 적어 본다.
나는 결혼을 참 빨리 한 편인데다 신혼 몇개월간 시골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혼자 살았었다.
남편 직장은 내무부 말단 계약직원으로 서울 이모님댁에서 출퇴근하면서 살림차릴 준비가 안되었는가 보다.
시조모님께서는 중풍으로 계시고, 간혹 정신을 깜박 깜박하시는 것 같았다. 소변보신 것을 자꾸만 문에다 뿌리시고 이불에 변을 바르기도 하셨다. 그때마다 씻기고 이불 세척과 냄새제거는 내가 담당해야만 했다.
농사일에 바쁜 시어머님께서는 조모님을 돌볼 시간들이 없으시고, 새댁인 내가 병구환과 집안일을 돌보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른 아침에 친정아버님께서 같은 마을에 사는 언니집에 오셨는데,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보니 나 때문에 오셨다 한다. 말씀인즉, 형부 언니에게 시아버님께서 결핵만기로 유전이라는 데도 중매를 했냐면서 호통을 치고 계셨다. 아버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고는 목멘소리로 네언니가 자세히 알아 보지도 않고 중매를 했다며 결혼은 안된다고 하면서 당장 집으로 가자고 했다.
형부 언니도 결핵만기라는 것은 몰랐다면서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만 하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는 결핵이 무서운 병이었다. 나는 의학이 많이 좋아져서 그만큼 걱정은 덜 해도 되지 않나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잡으신 손을 뿌리치며 내 생각을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혼조건이 뚜렸하지만 부부가 된 이상 나만 살겠다고 떠나면 환자가 둘씩이나 있는 이집은 어찌 되겠습니까?" 당장 파산될 것은 불보듯 뻔하지 않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 말씀대로 파혼이 되었다면 서로 더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저 하나 없는 사람치고, 포기하시고
그냥 조용히 돌아가세요. 저는 열심히 간호하며 희생하겠습니다."
난 6남매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내 딱한 사정을 다 듣고는 내딸 장하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더니 나를 어루만져 주셨다. 그리고는 부모님 잘 모시라 당부하며 뒤돌아 가셨다.
그후 다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시댁생활 몇 개월 후, 내 처지가 딱했는지 시아버님께서 적극적으로 서둘러 남편의 직장따라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종합청사에 다니고, 서울서 부동산하는 친지의 알선으로 연희동에서 전세집을 얻어 서울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 이듬해 첫 아들 진영이를 낳았다.
온 집안이 기뻤다. 그런데 낳은지 3개월 후,
감기 때문에 세브란스병원에 갔더니 심장이 나쁜데 선천성심장질환이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시작으로 젓먹이 아이의 아픔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린것 한데 온갖 검사를 다하며 그때마다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의사말씀이 우리나라에서는 완치가 어려우니까 일본으로 보내자고 하셨다.
이유인즉 진영이를 혼자 보내서 살아 오면 다행이고, 죽으면 우리나라 의학발달을 위해 실험대상이라 하셨다.
난 그말이 끔찍했고, 모유를 먹는 애를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어, 내품에서 죽어도 난 싫다고 거절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함에 할수없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는데 체중미달이라 수술할 수도 없는 처지라서 집으로 데리고와 키우기로 하고 정성껏 키웠다.
이웃 집에서는 서울대학병원으로 데리고 가 보라고 해서 갔더니 똑같은 판단이 나왔다.
정신없이 살고 있는데 시골의 시아버님께서 건강이 악화되어 우리집을 찾아 오셨는데 정말 몸이 형편없이 쇠약하셨다.
서울대병원 의사말씀이 종합진단 결과 치료만 잘하면 회복할 수 있단다.
나는 매달 한번씩 아버님 가래침을 받아, 바로 병원으로 가지로 가서 검사결과에 따라 주사와 약을 처방해주면 시골로 보내 주었다.
마침 건강이 빨리 좋아지시긴 하셨는데, 설상가상으로 시조모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으시고 술을 계속 드셨나 보다. 어머님이 옆에서 잘 위로해 주셨으면 그렇게 빨리 돌아가시지는 않으셨을 텐데, 전해 듣는 말에 의하면 아버님께 너무 무관심하고 냉정히 일만 하셨다고도 한다.
우리 충격도 컸다면 몹시 컸다. 어느새 진영이가 그러저럭 잘 커줘서 동생을 보게 됐는데 남동생으로 건강했다.
그런데, 둘째 진욱이가 두달쯤 되었을 때 남편이 책상유리위 서류작성에 너무 무리한 업무로 팔에 급성 관절파열이 온 것이다.
경찰병원에서 큰 수술로 입원하여 한달만에 퇴원했지만, 진영이와 남편건강으로 병치례 수발들며 사는게 힘들게 바빴다.
몇개월이 지나 남편이 또 금성간염으로 생명에
위험이 왔다. 출근길에 구두를 신고 있는데 넥타이 옆으로 흰와이셔츠가 누렇게 물들고 있다. 준 종합병원에서는 못 받아 준다면서 빨리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아는 사람이 있는 고려 병원에 갔다. 다행이 그분들 덕에 수속진행이 잘되었다.
단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는 남편이었는데, 주치의가 나를 불러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며 남편한테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다.
잠시 하늘이 빙글빙글 돌며 세면바닥이 울퉁불퉁해서 정신이 없었다.
남편이 눈치를 챘는지 입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울면서 말렸더니 그러면 집에 좀 갔다 오자고 하길래, 충격이 심할것 같아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남편이 갑자기 눕더니 눈물을 흘렸다. 조금 있더니 나를 불러서는 만일 내가 어떻게 되면 사무실에 누구를 찾아가서 모든 것을 부탁한다고 하고, 부모님께 불효되어 죄송하다고 하면서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부엌으로 온 나는 벽을 붙잡고 소리없이 울었다.
마음을 좀 추스리고 다시 고려병원에 입원했다. 간 수치가 보통사람은 50이하가 정상인데 1,000이 넘는다고 했다.
다행이 입원한지 한달만에 의사말씀이 퇴원해도 좋다면서, 지극한 부인 간호결과 치료가 잘되어 건강이 금속도로 완치되었다고 박수까지 받으며 퇴원해 집으로 왔다.
간염은 밥을 잘 먹어야 한다고 했다.
박봉에 진영이 정기검사, 남편은 매일 인삼 3뿌리, 쇠고기 반근을 먹어야 했다. 수시로 회복에 좋은 보신탕까지 달여먹었다.
진영이는 다행이도 수술하지 않고도 지금 잘 크고 있다. 늘 걱정되지만 잘 커주는 진영이가 대견스럽다.
우리는 남편의 정규직 발령에 따라 대구로 이사를 왔다. 건강을 계속 관리하면서 대구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있는데, 남편 퇴근시간이 자꾸 늦어지는 것이었다. 옆집에서 공무원이 왜 자주 늦느냐며 나한테 알아보라고 했다.
늦어지는 시간이 밤12시를 넘는 퇴근이 계속 되었다. 이런저런 핑계가 정말인줄 알았는데 몇개월 뒤에 적은 월급에 융자가 있어 물었더니 또 이유가 있었다.
하루는 동구청 근무처 앞에 가서 불러냈다. 그때당시 못먹는 술을 먹고 화풀이를 했다.
남편은 그후에도 내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잘못 행동했다고 억지주장을 했다.
연속된 세월이 흘러 시청으로 발령났다. 당분간 뜸해서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또 늦는 퇴근이 계속되고 내가 아무리 고생하며 살아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자기 자신만이 있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어쩜 그럴수가 있을까, 나 몰래 숨기려면 끝까지 가던지 내가 박봉월급에 생활이 쪼달리는데 야속해 그 돈좀 달라했다.
한번은 싸우며 부부간에 숨길 것이 뭐가 있으며 가정을 위해서 성실하게 믿고 살자고 했다.
남편은 사정상 그럴 수 없다고 했고, 나는 분했지만, 내가 알지 못하도록 끝까지 감추라고 애원했다.
뻔한 봉급에 정말 속상하고 남편이 약속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본 남편은 내가 자기한테 한 행동에 비하면 냉정한 사람이다. 같이 사는 내 속을을 너무도 모른다.
자기자신에 대해 늘 관대하고 자기가 우선인 그리 흔한 성격은 아니다. 한때는 두고 보자라는 생각이 들며 나도 따뜻하고 좋은 사람 만나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을까~
늦게 귀가하는 것 변함없고, 어떻게 내가 아파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신만 깍듯이 챙길줄 아는 사람이란 말인가~
난 남편을 믿으며 사랑받고 살고 싶다.
아이들도 벗나지 않고 잘 크고 있는데,
이제 마음이 병이 오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나는 남편에 생활을 파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행동으로 협조해 달란다는 말이다. 말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면 될 것을 화가나 있는 나에게 자기가 늦은 과정을 설명하려고 한다. 나는 왜 늦게 오는가 하는 과정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참새가 죽어도 짹하고, 처녀가 애를 나도 할말이 있다는 격이다.
한분있는 부산 형님행실이 외박까지 하며 돌아다닌다는 이야기 들었다. 과정을 듣기 전에는 나쁜 행동이라 판단할 수 밖에 없듯 그와 똑같다.
가족이 싫다고 하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나도 평지풍파가 참 많았고 업으로 생각한다. 남은 인생 노력하며 생각하는 자세로 살고싶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살았으면 바랄게 없겠다.
가족 건강관리를 지금도 계속하고, 이젠 내 몸에도 이상이 오는 것 같다. 참을 수가 없도록 가슴이 아프다.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면 결과는 뻔한 것, 내 마음이 회복되게 남편이 도와줬으면 부탁하고 싶다. 나를 병들게 하지마시오. 난 아직까지 당신 아내야!
누구에게 자랑거리가 아니라 못쓰는 글로 표현해 봤다.
1993년 어느날 밤에
뒤늦게 책장정리하다 파란만장한 아내의 넋두리를 훔쳐 읽자니 한만은 인생에 참으로 할말이 없구려~
그런 와중에 금산장 인삼팔이, 미국아이 제시카 등 너덧명의 어린아이들 돌보미까지 하며, 갖은 풍파의 헌신적 사랑이 있었기에 가정을 등하시하고 직장에만 매달렸던 남편을 사무관 간부까지 만들었다 생각하오.
지금 생각해도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가정은 뒤로하고 오직 직장사무가 우선이었지~
힘들게 공무원 시작한 후, 오로지 머리속엔 공직의 간부가 되고 싶었던 목적 뿐이었어. 지금 생각하니 참 답답한 인생이었네그랴.
그 후에도 찾아온 복어알 중독, 급성 전신마비, 갑상선이상 등으로 수많은 시련을 겪을 때마다 당신이 헌신적으로 그 뒷바라지를 다 해냈으니 참으로 장한 모진 인생었어. 고맙소!!
그 와중에도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문턱이나마 맛보며, 미래빌1단지 부녀회장과 패트롤맘 화원읍 대표회장을 거치는 등 대단한 여장부야!
이제 좀 쉴만하니 뒤늦게 당뇨까지 찾아와 투병생활하고 있는 한만은 험한 인생길에 투병생활까지 하고있음에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오~
그래도 천사같이 착한 두며느리들이 복으로 굴러왔다 생각하고 위안을 갖길 바래요.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손주들 잘되길 기원하면서 건강챙기며 멋진 노후 즐겨봅시다.
요즘도 내몸하나 관리도 힘든데 한시도 쉬지않고 아동지킴이와 시니어동행 등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음에 참으로 장한 여인이라 생각한다우~
지금껏 굳세게 잘 견뎌왔듯이, 앞으로도 잘 버텨나가길 바래.
당신은 틀림없이 잘 이겨낼거라 믿어!!
내가 더 잘하려고 노력할께. 표현력은 부족해도 넘보다 속정깊은 남편이라 생각해 주기 바라면서 굳세게 이겨내길 바란다오.
당신 사랑해요!
하늘도 야속하지, 틀림없이 이생 다하기 전에 당신한테 큰 복주고 갈거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걷고 힘내자구 알겠지!!
2024년11.26. 부친 43주기 맞아
※ 부친 생전에 우리가정에도 여장부며느리가 들어왔다고 좋아하셨던 그 좋은 기운받고, 더욱 건강하길 바라면서 부족한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