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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04. 17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연락이 없다는 건 잘 살고 있다는 뜻이라는 얘기지만 자기 위안의 뉘앙스가 있다. 즉 자식처럼 당연히 안부를 물어와야 하는 사이임에도 통 연락이 없을 때 너무 섭섭해하지 말자는 얘기다.
그런데 며칠씩 전화 한 통 없는 게 일상이 된 필자 같은 프리랜서에게는 ‘유(有)소식이 희소식’이 오히려 맞는 말 같다. 1년이 지나도록 연락 한번 없던 사람이 전화해서 원고를 청탁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정말 ‘무소식이 희소식’인 건 우리 몸 안에서 보내는 소식(신호) 아닐까. 뱃속 일러스트를 보면 수많은 장기가 복잡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우린 대부분의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 내부 장기가 전하는 소식은 십중팔구 불편함이나 통증이고 이는 병이 났다는 뜻이다. 특히 전혀 왕래가 없던 간이나 췌장에서 오는 소식은 심각한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 GIB 제공
내부 장기 가운데 그나마 자주 소식을 전하는 게 위(십이지장 포함)다. 올해로 쉰인 필자 나이쯤 되면 위의 소식을 몇 번은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화계가 약한 필자는 평소 식생활을 조심했기 때문에 40대 초반까지도 ‘무소식이 희소식’이었는데 수년 전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식사가 겹치면서 십이지장궤양과 위염에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그 전까지는 “누가 위경련이 와서 응급실에 갔다더라”는 말을 들어도 ‘경련 좀 났다고 응급실까지야...’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파보니 삶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 게다가 약을 먹고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도 위산분비가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즉 위산과다가 계속돼 수시로 허연 액체를 먹어 중화시켜야 했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이 “이미 위벽의 성격이 바뀌어서 나아도 재발하기 쉬울 것”이라는 불길한 얘길 했고 실제 지금까지 몇 차례 증상이 나타났다.
위액 수소이온농도는 맹물의 100만 배
그런데 밥을 먹고 난 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해보면 필자가 40년이 넘게 위와 무소식이 희소식인 상태로 지낸 게 오히려 놀랍다. 하루 세끼를 먹으니 1년이면 1000회 이상, 40년이면 4만 회 넘게 위는 들어온 음식을 소화하는 작업을 수행했다는 얘기다. 이게 단순히 근육을 꿈틀거리고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게 아니라 pH1의 강산인 위액을 뿜어대는 아비규환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한 채 40년을 살았으니 우리 몸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구조인가.
pH는 수소이온지수로 용액의 산성도를 나타낸다. 중성인 pH7을 기준으로 그보다 작은 값은 산성, 큰 값은 알칼리(염기)성이다. 따라서 pH1이면 산성이지만 이 숫자만으로는 얼마나 큰 차이인지 실감이 안 난다. pH는 수소이온농도의 상용로그에 –1을 곱한 값이다. 따라서 pH1은 pH7에 비해 수소이온농도가 100만 배나 더 높다는 뜻이다.
음식물이 위로 넘어올 때 위가 이렇게 강산인 위액을 분비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다. 먼저 음식물에 들어있을 수 있는 병균에 감염되는 걸 막기 위한 살균 작용이다. 다음으로 음식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 위 근육의 운동에 쉽게 부서지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위에서 분비되는 효소인 펩신도 강산에서 활성화돼 단백질을 분해한다. 이렇게 위에서 시달린 음식물은 죽(미즙)으로 바뀌어 본격적인 소화 흡수가 일어나는 소장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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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액이 독하다 보니 우리 몸은 정교한 장치를 마련해 위액 분비를 조절하고, 그 결과 위벽이 녹아내리는(소화되는)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음식이 위에 들어왔을 때만 벽세포(parietal cell)에서 위산(염산)이 나오고 동시에 점막경부세포가 점액과 중탄산염을 분비해 위벽의 세포를 덮어 보호한다. 그런데 어쩐 이유에서 이런 장치가 삐걱거리게 되면 위산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와 위벽을 손상시켜 염증이나 궤양, 역류성식도염 등 다양한 증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참고로 십이지장궤양은 위산과다가 주원인이지만 위궤양은 아스피린 같은 약물이나 염증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인 헬리코박터 파일로리도 주원인이다.
16년 동안 8억 명 복용
위산과다가 생겼을 때 급한 불을 끄는 방법이 바로 제산제를 먹는 것이다. 즉 약알카리성 완충제를 먹어 위액(염산 용액)을 중화한다. 필자도 위염이 재발했을 때 머리맡에 제산제를 두고 자다 새벽에 속이 뜨끔거려 잠을 깨면 들쩍지근한 희뿌연 액체를 먹고 다시 잠들곤 했다.
사실 제산제를 먹는 건 소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위에서 미리 하는 것이다. 즉 위액이 섞여 pH가 2~3으로 여전히 강한 산인 미즙이 소장으로 넘어가면 소장벽이 손상되고 소화효소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따라서 췌장은 약알칼리성 완충용액인 중탄산염을 소장으로 분비해 미즙을 중화시킨 뒤 본격적인 소화 흡수 작용을 진행한다.
아무튼 위산과다로 괴로울 때 제산제가 긴요하지만 이건 하책(下策)이고 위산 분비를 정상으로 돌리는 약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약이 없다는 게 문제다. 즉 우리 몸이 알아서 균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그동안 제산제에만 의존해야 하는 걸까.
위산과다로 병원을 찾은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다른 약을 처방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즉 위산 분비 자체를 억제하는 약물이다. 이는 이미 나온 위액을 중화하는 제산제보다는 한 수 위의 책략이다. 그렇다면 이 약물은 어떻게 작용할까. 먼저 위산이 분비되는 메커니즘을 알아보자.
놀랍게도 위에서 위산(염산)을 분비하는 벽세포의 내부(세포질) pH는 7.2로 중성이다. 중성의 세포가 어떻게 위산을 분비해 위액을 pH1의 강산으로 만들 수 있을까.
벽세포가 분비하는 건 수소이온(H+)과 염소이온(Cl-)이다. 수소이온농도가 낮은 세포 내부에서 높은 위 내강으로 수소이온을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려면 펌프가 있어야 하듯 소위 ‘양성자 펌프(proton pump)’가 이 일을 한다. 참고로 양성자는 수소이온을 뜻한다. 양성자 펌프는 벽세포 세포막에 걸쳐 있는 단백질로 ATP라는 분자를 분해할 때 나오는 에너지로 구조가 바뀌면서 세포 안의 수소이온을 세포 밖으로 내보낸다.
▲ 위의 벽세포에서 위산(염산)을 분비하는 메커니즘을 묘사한 일러스트다. 왼쪽 세포막에 걸쳐 있는 빨간 덩어리가 양성자펌프로 수소이온(H+)을 위 내강으로 내보낸다. 위산분비는 여러 신호에 따라 정교하게 조절되므로 신호를 차단해 위산분비를 억제하는 약물도 있지만(예를 들어 히스타민수용체(H2)길항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 Memorang 제공
비유하자면 양성자 펌프는 양쪽에 문이 있는 출입구다.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위 내강이고 오른쪽이 세포질이다. 세포 안에 있는 양성자(수소이온)가 열린 문을 통해 펌프 안으로 들어오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반대쪽 문이 열리고 수소이온은 위 내강으로 나간다. 즉 두 문이 동시에 열리지 않기 때문에 수소이온이 농도가 높은 위 내강에서 낮은 세포질로 흘러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1970년대 양성자 펌프의 작동원리가 밝혀지면서 이를 방해하는 약물, 즉 양성자펌프억제제(proton pump inhibitor. 이하 PPI)를 만들면 위산분비를 억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1975년 이런 약물 티모프라졸(timoprazole)이 처음 만들어졌고 이를 개선한 약물이 최초로 상용화된 위산분비억제제 오메프라졸(omeprazole)이다. 오메프라졸은 벽세포 안으로 뚫고 들어가 구조가 바뀐 뒤 양성자펌프에 달라붙어 작동을 방해한다.
▲ 30년 전인 1988년 유럽에서 처음 출시된 최초의 양성자펌프억제제 오메프라졸은 위산과다 환자들에게 엄청난 희소식으로 2004년까지 무려 8억 명이 복용했다. 이제는 더 좋은 약이 많이 나와 별로 찾지 않는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79년 합성된 오메프라졸은 임상시험을 거쳐 1988년 로섹(Losec)이라는 약품명으로 유럽에서 출시됐다. 오메프라졸은 지금까지 나온 약물 가운데 가장 널리 쓰여 2004년까지 16년 동안 세계에서 무려 8억 명이 넘는 사람이 처방받았다. 올해는 오메프라졸이 나온 지 30년이 되는 해다.
오메프라졸 이후 다양한 PPI가 나왔고 덕분에 위산과다 환자들이 예전보다 고생을 덜 하게 됐다. 일양약품이 개발해 2009년 12월 출시된 14번째 국산 신약 놀텍(Noltec)도 PPI로 현재 국내 위산과다 관련 질환 치료제 시장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제약사가 세계 최초로 P-CAB 출시했지만...
사람 마음이 다 그렇듯이 오메프라졸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약효가 좀 아쉽다느니 부작용이 어떻다느니 말들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놀텍을 비롯해 약효나 부작용을 개선한 PPI 신약들이 나왔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과학자들은 다른 메커니즘의 약물을 고민했고 마침내 ‘칼륨 경쟁적 위산분비억제제(potassium ion-competitive acid blocker. 이하 P-CAB)’ 개념을 떠올렸다.
양성자 펌프는 사실 양성자 혼자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칼륨이온(K+)과 연동해 작동한다. 앞의 양쪽 문 출입구 비유를 들면 이렇다. 세포막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위 내강이고 오른쪽이 세포질이다. 세포 안에 있는 양성자(수소이온)가 열린 문을 통해 펌프 안으로 들어오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반대쪽 문이 열리고 위 내강으로 나간다. 이때 위 내강에 있던 칼륨이온이 들어와 자리를 채워야 문이 닫힌다. 그리고 반대쪽 문이 열리고 칼륨이온이 세포질로 나간다. 이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수소이온이 위 내강으로 나간 뒤 칼륨이온이 들어갈 자리를 약물이 먼저 차지해 문이 열린 채 있으면 위의 사이클이 중단된다. 즉 이 양성자 펌프는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약물 이름에 ‘칼륨 경쟁적’이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놀랍게도 세계 최초의 P-CAB은 유한양행이 개발해 2007년 1월 출시한 9번째 국산 신약 레바넥스(Revanex)다. 당시 오메프라졸의 영광이 재현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신약 허가를 얻는데 실패하고 약효도 기대에 못 미쳤는지 초기 100억대 매출에서 내리막길을 걸어 지난해에는 12억 원에 불과했다.
일본 제약회사 다케다 역시 P-CAB인 보노프라잔(vonoprazan)을 개발해 2015년 자국에서 승인을 받았다(약품명 다케켑).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임상이 진행되고 있고 조만간 승인될 것으로 보이는데 기대가 큰 것 같다. 한편 국내 제약사인 CJ헬스케어에서 개발한 P-CAB 테고프라잔(tegoprazan)도 임상시험을 끝내고 지난해 8월 위식도역류질환치료제로 품목허가를 신청했다. 별문제가 없다면 올해 안으로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 보노프라잔과 테고프라잔은 임상시험 결과 PPI보다 여러 측면에서 더 나은 걸로 나와 과연 이들 약물을 대신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무튼 위산과다 환자들로서는 기대를 품게 하는 희소식이다.
구조 밝힌 결과 예측대로 작동해
학술지 ‘네이처’ 4월 12일자에는 보노프라잔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양성자 펌프의 구조를 밝힌 일본 나고야대 연구자들의 논문이 실렸다. 즉 위 내강 쪽 문이 열린 채 칼륨이온 대신 보노프라잔이 자리를 차지한 상태를 X선 결정학으로 ‘본’ 것이다.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론이 예측한 대로 보르프라잔이 붙은 양성자 펌프는 엉거주춤하게 열린 채 작동이 멈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약물작동 메커니즘이 명쾌히 밝혀지면 아무래도 믿음이 더 가기 마련이다.
▲ 학술지 ‘네이처’ 4월 12일자에는 새로운 유형(P-CAB)의 위산과다 치료제 보노프라잔이 양성자펌프에 붙어있는 상태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 실렸다. 왼쪽 위는 보노프라잔의 분자구조이고 아래는 양성자펌프가 수소이온과 칼륨이온을 받고 내보내는 사이클을 보여준다. 보노프라잔(P-CAB)은 위 내강 쪽 문이 열린 상태의 양성자펌프(E2P)에 달라붙어 작용을 방해한다. 오른쪽은 약물이 붙은 상태에서의 양성자펌프 구조다. / ‘네이처’ 제공
필자는 지난해 이맘때 위산과다 증상이 재발해 두 달 넘게 고생했다. 겨울 동안 운동 부족에 감기몸살로 밥을 제대로 못 먹었더니 몸무게가 저체중 범주(체질량지수(BMI) 18.5 미만)로 떨어져 급한 마음에 식사량을 좀 늘렸다가 일주일 만에 탈이 난 것이다. 매일 아침 마즙을 갈아먹고 양배추 추출성분인 약을 해외직구로 사서 복용하고 삶의 소소한 즐거움인 커피까지 끊고 나서야 간신히 회복했다.
지난 여름 이후 ‘다행히’ 무소식이 희소식인 상태로 지내고 있는 위에게 이 자리를 빌려 모처럼 안부를 전하며 글을 마친다.
“이보게 위, 그동안 잘 지냈나? 자네의 수고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그리고 답신은 안 해도 되네. 정말이야.”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