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세계를 노래하는 시(詩)
- 박종인, 「어긋난 세계」(산지니, 2022)
김필남(문학평론가)
어긋난 세계는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어긋나기 이전의 세계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걸까? 박종인의 시집 『어긋난 세계』는 보고 싶지 않은 진실들이 담겨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나 볼 수 “세상의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시인은 이를 ‘어긋난 세계’라고 명명한다. 어긋난 세계를 다루는 시인은 분노와 원망과 회한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이 그리는 어긋남을 부정적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있었던, 외면해왔던 어긋나기 이전의 세계를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종인 시인이 어긋난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여유 없는 사회의 이기를,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을, 어긋나버린 어떤 관계들을, 고정불변의 진리처럼 굳어버린 세계의 어긋남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로 인해 박종인은 ‘어긋남’들을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형상으로 끊임없이 현실로 불러들인다. 그 어긋남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만나는 건 “자기중심적”인 ‘나’의 모습이다. 여유 없는 ‘나’를, 쉬지 못하는 ‘나’를, 쳇바퀴처럼 굴러가고 있는 ‘너’를, 진실을 외면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슬프고 아파서 외면하고픈 어긋남이다. 하지만 두렵다고 눈감지 말아야 할 진실을 담고 있는 어긋남이다.
어긋나 있는/ 이 세상을 많이도 원망했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 눈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 등쳐먹는 세상 등치는 세상 그러면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본전 생각만 했었다./ 누구에게든 무엇에든 인색했다./ 그것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인 줄도 모르고 (…)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것./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 내가 쓸모 있는 것./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할 때 없어지기 시작하고 욕심 낼 때 누추하고/ 진심을 외면하는 추락인 것을. (「세상에 이용당하자」 부분)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공감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손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가진 아주 작은 것을 누군가와 나누었다가, 그것을 돌려받지 못하면 괜시리 화가 난 경우도 있었다. 언제나 “남는 장사”를 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잘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세상에 이용당하자」에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내가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믿고 있다. 그렇다. 박종인의 시는 어긋난 세계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적이지 않다. 시인은 시를 통해 아직은 나와 타인을 믿고 있는 어떤 마음을 전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전제는 바로 ‘나’를 내려놓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기에 나와 내가, 세계와 내가 어긋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나’에게 시인은, 세상에 이용당하면 또 어떠냐고 아무렇지 않게 반문한다. ‘세상에 이용당해도 괜찮다’고 작지만 또렷하게 말한다. 그것은 시인이 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신호이다. 하지만 이 긍정의 목소리는 미약해서 잘 들리지 않는다. 아직, 시인은 이 어긋난 세계의 어긋남을 풀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또한 어긋남의 이유를 우회해서 들려주지도 않는다. “모순”과 “반어적인”인 상황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어긋난 세계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어쩔 땐 분노하고 원망을 삼키지도 않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는다. 정직하고 우직한 목소리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는 에덴, 젊고 싱싱한 차들이 쌩쌩 달린다. 갑작스레 사과 하나 훔쳐 먹자 도미노 현상이 전개된다. 멀쩡하던 도로가 용량을 초과한 트럭에서 큰 통을 하나 떨어뜨린 것 같다 문제가 많은 세상이다 도로는 급속히 부러지고 휘어지고 차에서 뛰어내린 통은 폭탄이다. 도로가 꽝꽝 폭발한다. (「어긋난 세계」 부분)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어긋남’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아니다. 용량이 초과한 트럭이 야기한 도로의 비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지만 “사고의 파편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며 해결되지 못하고 이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사고가 발생하자 “레커차가 구급차보다 발 빠르게” 먼저 달려오는 세계, “사람들이 신음”하고, “사건들이 아파서 아우성”치지만 어떤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모습은 단순히 우연으로 취급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아우성을, 비참한 죽음들을 이미 실시간으로 지켜본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어긋난 세계의 이야기는 지금도 세계에 득실거리며 해결될 수 없어 보인다.
이렇듯 시인은 “옳고 그른 도덕과 비도덕이 한꺼번에 무너”(「작은 작들의 어깨 겯기」)지고 “빼앗은 부자가 가난을 짓밟고도 행복”(「낮과 밤」)한 부조리의 세계를 반복적으로 그린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세계는 익숙하다. 세상의 비리와 부조리(세상의 현황),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시간 구하기」) “돈의 노예가 된 사람”(「돈키호테」)들이 득실거리는 곳, “질서와 무질서를 분리하고 악과 의를 구분할 블랙리스트”(「밀운불우」)를 만들어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곳이 바로 이 어긋난 세계이지 않던가.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시인이 구축한 세계는 비극적인 듯 보이지만 모호하고 불투명하다. 진실인 것 같지만 진실과 거짓이 미묘하게 뒤섞여 있다. 시인은 무엇이 정답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알린다. 그리고 느끼게 만든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는지 말이다. 특히 시인은 우리 사회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과 사고를 상기시키는 듯도 하다. 「어긋난 세계」에서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가 그려졌고, 「다수의」에서는 학교폭력의 문제들이 환영처럼 나타나고 이내 사라졌다. 아니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어쩔 땐 반어적이고 모호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확신을 가진 언어이다. 그리고 시인이 보는 세계의 어긋남은 하나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와 환경, 가족의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확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본래의 아름다움이 어긋나기 시작했죠. 야금야금 문명의 단맛에 쪼개지고 부서졌죠. (...) 도시계획은 뭉텅뭉텅 숲을 깎고 땅을 훼손했죠. 더벅머리 이마가 황량해졌죠. 주변머리 소갈머리에 다닥다닥 집들이 심겨지고 매연과 공해는 총각에게 모자를 씌웠죠. 숨쉬기 곤란했죠. 양심은 농익은 불빛들로 위험신호를 냈죠. 피부색이 시커멓게 변하고 열을 올렸죠. 온몸의 통증은 건강검진과 치료방법을 요구하고 있었죠.
은연중, 지구에게 유해를 가한 다수의 피고가 즉결심판에 곧 회부되겠죠. 더더욱 심각한 건 관계를 모르는 사실이 더 치명적 병이랄 수 있죠. (「즉결심판」 부분)
무분별한 도시계획은 숲과 땅을 훼손한데서 끝나지 않는다. “더벅머리의 미남 총각의 머리숱”을 확연히 줄어들게 만들었고, 온몸의 통증을 야기 시키는 데로 나아가게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지구에게 유해를 가한 ‘다수’는 즉결심판에 회부되어야 마땅하지만, 문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다수’가 모른다는 데 있다. 아니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개발이 멈추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치명적인 병(病)이라고 명명한다. 연이어 발생하는 사고에,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은 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다수였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이런 부조리함, 부정부패 등의 어긋난 세계를 바로 잡을 수 없어 보인다. 물론 당장은 바로 잡을 순 없지만 이 현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우리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가족 관계조차 ‘이상한 거래’이고, ‘어긋난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온통 어긋남으로 가득 찬 세계가 박종인이 보고 있는 사회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졌다. 시인은 이 코로나로 세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말하지만, 이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어긋남이라는 데서 의미가 있다. 전 세계 유래 없었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이기를 바라보게 하고, 어긋나 있는 세상에 “잊고 살았던 아름다움”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우리의 일상을 멈추게 만들었지만 “어긋난 세계를 바로 잡고 인류의 적 바이러스를 지구 밖으로 밀어”(「긍정적 사고」)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시인에게 부패와 욕망이 들끓는 세계, 부조리한 현실, 병들어 가는 지구를 파괴하는 문명의 이기를 이겨내는 것이 바로, 코로나였고 변종들을 몰아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코로나는 우리의 삶을 잠깐 멈추게 만들어, 더 나쁜 것들을 바라보게는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가 바이러스를 몰아내려고 한 시도, “걱정하는 심사가 모든 사심을 내려놓고 진정과 진정이 이어지”게 만든 그 시간이야말로 긍정적이었음을 알고 있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맹렬히 관찰하고 통렬히 비판한다. 바뀌지 않는 세계에 원망도 하고 때로는 감상에 젖거나 회의감에 빠지기도 한다. 시인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세계에 대한 원망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 않는다. 「진정한 효도」의 화자는 어긋난 세계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사고를 겪지만, 자신의 아들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고 위로한다. 화자는 “아들 하나를 더 얻”었다고 덤덤히 말한다. 화자 혹은 시인에게 어긋난 세계를 바로 세우는 것은 바로 타인을 염려하고 위로하고 용서할 수 있는 태도이다. 이 어긋난 세계가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사람의 소중함”에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 어긋난 마음을 합치려고 해도 괜찮겠지요. 다각의 굴절에 따라 재충전 장소가 견고해질걸요.
다양한 싸움에서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기까지 속마음을 다 내보이세요. 반칙과 의심이 1순위겠지만 상대에게 우선권을 드리세요. 노력이 어긋나 수포가 되고 실핏줄이 살짝 어렸다고 발광하지는 마시고요. 순간이 독이 될 땐 조용히 호흡 조절을 하세요. 불쾌한 기억이 떠오를 땐 혼자서 사람의 소중함을 음미하세요. 맥박과 체온이 정상이면 한 방 강하게 따발총을 날리기도 하시고요. 휘감는 회오리에 어긋난 문제가 있어도 유머러스하게 잽싼 몸으로 대처하면 미래가 지겹지는 않을 거예요. 한 방울 이슬 같은 촉촉함으로 마음을 적시고 살며시 웃음으로 달래보기도 하시고요. 그러면 아마 강한 바람이라도 멈출걸요. 지그시 힘겨루기에서 항복하세요. 그러면 평생 같이 달려야 할 상대가 꽃잎처럼 화사한 고화질의 품격이 될 거에요. (「싸움의 기술」)
「싸움의 기술」은 여태 어긋난 세계를 원망하고 분노하고, “발광”하던 시인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싸움의 기술’을 알려준다고 하지만 정작 그것은 싸움을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싸우지 않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에게 우선권을 주는 일, 조용히 호흡을 하고 “사람의 소중함을 음미”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상대를 진정으로 이기는 것, 어긋난 세계를 “평생 같이 달려야 할 상대”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일러준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고화질의 품격이 되는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어긋난 세계를 만든 것이 인간이라면, 그것의 매듭을 푸는 일 또한 인간임을 시인 박종인은 『어긋난 세계』를 통해 알리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 김필남
* 경북 안동 출생
* 2007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 전) 부산작가회의 사무차장(2014.3.1.-2016.2.28.)
* 전) <오늘의문예비평> 편집위원, <작가와사회> 편집위원
* 저서: 『삼켜져야 할 말들』
* 이메일 : feel45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