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21》 계간평
J에게 드리는 봄날의 시이야기
이정환
시를 읽는 일은 늘 즐겁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지요.
《시조21》 봄호에서 몇 편을 찾아 읽으며 이 글을 씁니다. 눈이 명민하지 못해서 좋은 작품을 더러 놓치기도 하지만 눈길을 끄는 시편들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게 됩니다. 독자로서 이때가 가장 행복하지요. 그러나 논의를 하려고 하면 언제나 저어하게 됩니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을 허투루 읽을까봐 두려운 때문이지요.
(중략)...
달력의 숫자들이 또박또박 걸어온다
정수리 치고 가는 분침과 초침 사이
덜어낸 분량의 일이 산더미로 놓인다
뉘우침에 잠을 잃은 그믐달 여윈 허리
늦게 띄운 속엣말은 성에꽃만 피워둘 뿐
오그린 쪽잠을 펴고 먼 발자국을 듣는다
-전연희, 「섣달」전문
함부로 벗기지 마라, 최루성 속내란다
동심원 퍼져가듯 그리움에 닿기 위해
한 겨울 땅 속에서도 달달한 향 지켰으니
화농을 도려낼 날 하나 내게 없고
성냥불 확 댕겨 타오를 눈빛도 없어
살 속에 살을 감추어 매운 눈물 담았으니
-김덕남, 양파 생각 전문
전연희 시인의 「섣달」은 끝까지 잔잔한 어조를 유지합니다. 달력의 숫자 들이 또박또박 걸어온다' 라는 첫수 초장에서 세월 앞에 꼼짝도 못하는 유한한 존재의 비애가 잘 묻어납니다. 특히 '또박또박 걸어온다' 라는 구절에서 '또박또박' 이라는 흉내 내는 말이 가슴 저 밑바닥을 일시에 휘저어버립니 다. '정수리를 치고 가는 분침과 초침 사이' 도 마찬가지입니다. 째깍거리는 시간의 작동 소리는 정수리를 부단히 치고 있는데 눈앞에는 '덜어낸 분량의 일이 산더미로 놓여 있습니다. 시간에 부대끼고 쫓기는 일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섣달인 까닭에 생각이 많습니다. 회한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뉘우침에 잠을 잃은 그믐달 여윈 허리' 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지요. '늦게 띄운 속엣말은 성에꽃만 피워둘 뿐' 이어서 '오그린 쪽잠을 펴고 먼 발자 국을 듣’ 습니다. 「섣달」은 이렇듯 한 존재를 몹시도 버겁게 만듭니다.
김덕남 시인의 양파 생각은 특이한 소재는 아니지만, 그것을 잘 극복하고 새로운 시 한 편을 빚었군요. 역량의 총화입니다. '함부로 벗기지 마라, 최루성 속내란다' 라고 하는데 어쩌면 시의 화자가 그러한 존재인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동심원 퍼져가듯 그리움에 닿기 위해서 '한 겨울 땅 속에서도 달달한 향 지'켜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화농을 도려낼 날 하나 내게 없고// 성냥불 확 댕겨 타오를 눈빛도 없어' 도 '살 속에 살을 감 추어 매운 눈물 담았으니' 나를 함부로 벗기려는 생각을 버려 줄 것을 청합니다. 이러한 '양파 생각'은 곧 시의 화자의 생각과 동일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눈에 끌려 들어온 여러 편의 시편을 함께 음미해 보았습니다. 어떠하셨는지요? 이 시편들로 말미암아 조금 마음이 따사로워지고 평화로워 지셨는지요? 그랬으면 하는 바람으로 붓을 옆으로 살짝 밀쳐놓습니다. 이팝 꽃, 아카시아 꽃향기 속에서 이만 총총.
이정환 1978년 시조문학 추천완료,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휘영청」외 다수, 단시조선짐 에워쌌으니』를 펴냄. 계간평
- 《시조21》 2016.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