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장사' 힘드네..음식점 80%, 5년 내 폐업
SBS | 김용태 기자 | 입력 2014.12.24 20:42
<앵커>
창업을 계획할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게 음식점이죠. 그런데 새로 문을 연 식당 10곳 중 4곳은 개업 1년 뒤에 문을 닫았고 5년 뒤에는 10곳 중의 8곳이 폐업하는 걸로 조사됐습니다.
김용태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10년 전 문을 연 서울 번화가의 지하 식당가입니다.
40개 정도의 음식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 주인이 한자리에서 10년간 계속 장사한 곳은, 이곳 설렁탕집과 이곳 순두부찌개 집을 비롯해 단 4곳입니다.
[이연표/설렁탕집 주인, 10년 운영 : 자주 바뀌는 데는 1년 만에 바뀌는 데도 있고요. 왜라고 물어보면 안 되죠, 영업이 안 되니까 바뀌는 거죠.]
새로 문을 연 음식점의 생존율은 1년 뒤 55%, 3년 뒤 27%, 5년 뒤에는 17%에 불과했습니다.
식당 10곳이 문을 열면 5년 뒤에는 2곳도 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문권순/통계청 경제통계기획과장 : 예술·스포츠·여가(스크린골프, 노래방 등)와 숙박·음식점업은 5년 생존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음식점은 다른 업종과 달리 주인이 50대인 경우 폐업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실직하거나 퇴직한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들이 음식점 창업에 많이 나서고 있지만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양광천/상가번영회장 : '1년 만에 성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착각이에요. 물론 참 운 좋게 성공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굉장히 힘든 상황이죠.]
전체 산업으로 넓혀 봤을 때도 대표자가 50대 이상인 경우에만 새로 생긴 업체 수 보다 사라진 업체 수가 많았습니다.
(영상취재 : 김태훈, 영상편집 : 김지웅, VJ : 정민구)
김용태 기자tai@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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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業易守成難(창업이수성난)
創 비롯할 창. 業 업 업. 易 쉬울 이. 바꿀 역. 守 지킬 수. 成 이룰 성. 難 어려울 난.
창업은 쉽지만 수성은 어렵다는 이야기다. 요즈음은 창업(創業)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지만 왕조시대에는 창업은 왕조(王朝. 나라)를 세우는 것(開國, 建國)이었다. 창업자의 뜻을 잘 계승하여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수성(守成)이라 한다. 이것은 ‘어렵게 얻고 쉽게 잃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재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는 쉽지만 힘들여 이루어 낸 것을 지키기는 어렵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맹자(孟子)였으며 그는 두 가지 모두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역사상 창업과 수성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인물로는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다. 이세민의 이야기는 ‘당서(唐書)’, ‘방현령전(房玄齡傳)’, ‘정관정요(貞觀政要)’, ‘군도편(君道篇)’, ‘자치통감(自治通鑑)’등에 전한다.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셋째 아들 이원패(李元覇)는 일찍 죽었다. 이연은 황제가 된 후에 큰아들인 이건성(李建成, 589~626)을 태자에 봉하고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 599~649)을 진왕(秦王)에 넷째 아들 이원길(李元吉, 603~626)은 제왕(齊王)에 봉했다.
이세민(李世民)은 무덕 9년 626년 6월 4일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 The Incident at Xuanwu Gate. 玄武門之變)으로 형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를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협박하여 왕위에 오른 당태종 이세민은 결단력(決斷力)이 뛰어난 좌복야(左僕射) 두여회(杜如晦, 585~630), 기획력(企劃力)이 뛰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 579~648). 대부(大夫) 위징(魏徵, 580~643) 등과 같은 현신들이 선정(善政)을 베푸는 태종을 장 보필했게 때문에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년~649년)를 이룬 것으로도 유명하다.
태종 이세민은 신임하는 신하들을 모인 자리에서 물었다.
“창업과 수성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그때 기획력이 뛰어난 우복야(右僕射) 방현령(房玄齡)이 답했다.
“창업은 비온 뒤 죽순처럼 일어나는 뭇 군울들 가운데 승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만큼 창업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대부(大夫) 위징(魏徵)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옛날 사실(史實)들을 보면 임금의 자리는 많은 어려움(艱難, 간난)속에서 어렵게 얻었다가도 잠시라도 안일(安逸) 속에 빠지면 쉽게 잃는 법입니다. 그런 만큼 수성(守成)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말하였다.
“방공(房公)은 짐(朕)과 더불어 천하(天下)를 얻고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 났소. 그래서 창업이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위공(魏公)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싻트는 교사(驕奢, 교만하고 사치함)과 방심(放心)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 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은 끝났소. 그러니 짐은 앞으로 제공(諸公)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태종의 말을 들은 신하들은 과연 태종다운 선택이라 생각하며 할 말을 잊었다. 태종은 자신의 말대로 당나라의 번성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정관정요(貞觀政要)는 그의 정치 철학을 담은 것으로 제왕학(帝王學)의 명작으로 꼽힌다.
태종 이세민은 645년 고구려에 침입하여 안시성(安市城)에서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왼쪽눈을 맞아 애꾸가 되었으며 4년후 죽었다.
현무문의 변(무덕 9년 626년)
The Xuanwu Gate Incident (玄武門之變) was a palace coup for the throne of the Tang dynasty on 2 July 626,[a] when Prince Li Shimin (Prince of Qin) and his followers assassinated Crown Prince Li Jiancheng and Prince Li Yuanji (Prince of Qi). Li Shimin, the second son of Emperor Gaozu, was in an intense rivalry with his elder brother Li Jiancheng and younger brother Li Yuanji. He took control and set up an ambush at Xuanwu Gate, the northern gate leading to the Palace City of the imperial capital Chang'an. There, Li Jiancheng and Li Yuanji were assassinated by Li Shimin and his men. Within three days after the coup, Li Shimin was installed as the crown prince. Emperor Gaozu abdicated another sixty days later and passed the throne to Li Shimin, who would become known as Emperor Taizong.
위징(魏徵, 580~643)
자는 현성(玄成). 거록군(鉅鹿郡) 곡양(曲陽: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진양(晉陽)의 서쪽) 사람이다. 위징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가난하여 출가해서 도사(道士)가 되었다. 수나라 말 617년 이밀(李密)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621년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어 이세민(李世民:후의 太宗)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발탁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했다. 629년 비서감(祕書監)으로 조정에 들어가 비부도서(祕府圖書)를 교정하여 군서치요(群書治要)의 편찬을 주도했다. 636년 양(梁)·진(陳)·북제(北齊)·북주(北周)·수(隋)의 5개 왕조에 대한 역사편찬을 주도한 공으로 광록대부(光綠大夫)에 임명되었고 정국공(鄭國公)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태종에게 수나라가 망한 것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현명한 신하를 중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위징의 간언은 태종이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태종의 연호)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射의 여러가지 훈음과 뜻
射 |
1. 쏠 사 |
射擊(사격) |
2. 벼슬이름 야 |
左・右僕射(좌・우복야) |
3. 산이름 야 |
故射山(고야산) |
4. 맞힐 석 |
射中漢王(석중한왕) 쏘아 맞힘, 숨긴 것을 알아차림. 射覆(석복, 석부) 덮어 가린 물건을 알아맞추기 |
5. 싫어할 역 |
無射于人斯(무역우인사) |
6. 음이름 역 |
無射(무역) 12율의 하나 |